1. ‘작은’ 나무가 되어 ‘주변’에 서라

(막 4:30-32; 눅 13:18-20; 마 13:31-32; 도마 20)

 

I. 겨자씨와 백향목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겨자씨의 비유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얼핏 기억에, 인간의 육안(肉眼)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씨앗이 가장 큰 나무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강단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같이 확장될 것이라는 믿음을 전한다. 예수의 음성을 되살린다: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 아래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예수의 이 말씀은 구약성서의 종말 비전에 나타난 ‘나무’의 이미지와 너무 흡사하다. 선지자 에스겔과 그리고 훨씬 이후에 다니엘은 세계수(世界樹)의 이상을 이렇게 전하였다:

나 주 여호과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놓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겔 17:22-24).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단 4:10-12).

예수의 겨자씨 비유와 구약성서의 나무 예언 사이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1) 씨(혹은 가지)가 땅에 심긴다. (2) 그것은 큰 나무(또는 이에 준하는 것)가 되도록 성장한다. (3) 그 가지가 무성해지고 새들이 와서 깃을 들인다.

2. 제국(帝國)의 꿈

예수의 겨자씨 비유가 구약의 ‘나무’ 이미지에서 왔다면, 나무의 종말 비전은 역시 ‘중심’과 ‘높이’에 다름 아니다. 에스겔의 환상 가운데 “이스라엘 높은 산”은 시온 성전이 있는 야훼의 높은 산 곧 성전산이다(참조, 겔 20:40; 40:22). 이는 세계산(世界山: world-mountain)에 대한 고대 동방의 이미지가 예루살렘 성전산에 적용된 것이다(참조. 사 2:2; 시 48:3; 슥 14:10). 그 나무는 높아질 것이다. 에스겔의 영향을 받은 다니엘의 환상에서, 세계수는 그 뿌리가 땅에 박혀있지만 그 나무는 얼마나 높은지 그 키가 “하늘에 닿아있다.” 더욱이 그 나무는 예루살렘의 성전산이라는 온 세계의 ‘중심’에 있다(참조, 겔 5:5). 다니엘은 그 나무가 아예 우주의 중앙에 있어 땅 끝에서도 볼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각양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인다”는 것은 보호를 바라는 모든 생명체에게 그 나무가 생명의 도피처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중의 새들이 깃을 들이는 큰 나무(특히 눅 13:18-19)는 ‘위대한 나라’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이다(참조, 겔 31:2-6).

그렇다. 구약성서의 환상에서 ‘나무’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다. 에스겔과 다니엘의 종말 비전은, 이스라엘의 미래 곧 그들의 메시아 왕국이 이렇게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으리라 예언한다. 이 나무야말로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사용된 가장 귀한 고급 목재이다. 하나님은 하늘을 향하여 올곧게 뻗은 레바논의 수려한 나무 백향목 꼭대기로부터 ‘높은’ 가지 하나를 취하여 땅에 심을 것이다. 거기서 난 연한 가지는 다시 이스라엘의 ‘높고 빼어난 산’ 아니 우주의 ‘중심’에 심기울 것이다. 아, 이 세계수의 뿌리는 땅에 닿았으나 그 키는 하늘(하나님)에 닿도록 그렇게 자랄 것이다! 이 나무는 입사귀가 아름답고 열매가 많아 만민에게 식물(食物)이 될 만하고, 들짐승들은 그 그늘에 안식하며 하늘을 나는 새들은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다.

이 나무의 비전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투사라면, 이 세계수는 메시아 왕국의 염원에 다름 아니다. 우리네 한민족처럼 언제나 주변 열강에게 압제와 착취만 당해왔던 한 많은 민족 유대인들! 그들이 꿈꿔온 메시아 왕국이란, 그 나무처럼 세계 만민이 흠모할 만큼 ‘중심’에 자리하며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서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그들만이 배타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세계의 중심에 서서 세계를 지배하는 그런 나라였다. 일종의 ‘세계 제국’이었던 것이다. 모든 나라들이 ‘중심’에 서고자 하듯이, 모든 인생들이 ‘높아지려’ 하듯이.

3. 나무와 나물 사이

예수님 같으면 동시대 유대인들이 지녔던 이 높음과 중심의 정치학을 어떻게 받았을까? 아니, 어차피 예수님의 이 말씀이 구약성서의 그 종말 비전으로부터 왔다면 이 비유를 듣던 예수의 청중이 기대한 것은 무엇일까? 자기들 이스라엘이 이제는 더 이상 제국들의 지배와 압제를 받지 않고, 오히려 제국들보다 더 큰 제국이 되어 모든 제국들을 다스릴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기대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예수의 음성을 다시 듣자! 구약의 세계수 환상과 예수의 겨자씨 비유 사이에는 공통점만이 아니라 차이점도 있다. 왜 백향목이 아니고 겨자씨일까? 그것은 가장 작은 것을 가장 큰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화려한 수사(修辭)는 그만두고서라도 구약 예언에서 그토록 중요한 ‘중심’과 ‘높이’의 언급은 어찌하여 아니 나타날까? 아니, 그것이 다 자라도 “모든 나물보다 크다”는 말씀은 또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는 영영 우주의 중심에 설 수 없다는 것일까? 그 키가 하늘에 닿은 백향목(世界樹)처럼 될 수는 없다는 것일까? 대체 무슨 영문일까?

가만히 비유를 다시 읽자. 가만히 가만히 예수를 다시 읽자! 수수께끼와도 같은 예수의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1) 마태와 누가(Q), (2) 마가, 그리고 (3) 신약성서에는 없지만 아주 늦게 20세기 중엽에 발굴된 도마복음(예수의 비유나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신약학자들은 도마복음을 가장 빈번히 인용한다. 공관복음과 함께 너무나 귀한 예수전승이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기 때문이다.)의 본문에 등장한다: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들 위에 깃들였느니라”(눅 13:18-20).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모든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들 위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 아래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제자들이 예수에게 말했다.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말해주십시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그것은> 모든 씨들보다 더 작다. 그러나 그것이 경작지에 떨어지면, 그것은 큰 나물을 내고 하늘의 (그) 새들에게 안식처가 된다”(도마 20).

위 본문들 사이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차이점이 있다. 첫째, 마가에서는 새들이 “그 그늘 아래” 둥지를 트는 반면, 누가와 마태(Q)에서는 새들이 “가지들 위에” 앉아 쉰다. 도마에서는 이같은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 둘째, 누가와 마태(Q)에서는 겨자씨가 다 자라 “나무”가 되지만, 마가에서는 그저 “모든 나물보다 큰 것”이 된다. 그래봐야 나물일 뿐이다. 도마에서는 군소리 없이 그냥 “큰 나물”이 된다. 셋째, 오직 누가와 마태(Q)에서만 이 비유는 누룩의 비유로 연결되어 있다(눅 13:20-21; 마 13:33).

4. 초라한 나라의 낮으신 하나님

말할 것도 없이 이 이야기는 전형적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점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학자의 눈으로 관찰하자. 전승이 ‘자라면서’ 겨자씨도 ‘자란’ 것이다! 마가와 도마에서는 그 씨가 “큰 나물”이 되거나 혹은 “모든 나물보다 큰” 어떤 것이 되었다. 이것이 마태와 누가에서는 “나무”가 되었다. 더욱이 마가에서는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 모든 나물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되도록 대조를 연출한다. 마태는 마가의 이 최상급 대조를 받아들여 마가처럼 대조의 비유를 만든다.

복잡한 얘기는 그만두고, 예수의 시상(詩想)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더 쉽게, 예수의 가르침에서 그 씨앗이 다 자란 결과는 무엇일까? 예수의 비유는 구약의 메시아 왕국을 그 모본(模本)으로 하였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을 향해 올곧게 뻗은 그래서 하늘에 닿은 백향목이 아니다. 우주의 중심에 선 세계수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무와 나물 사이에 있다. 어쩌면 작고 초라한 나무에 불과하다(누가와 마태). 아니, 그게 아니라 나물들보다 조금 더 큰 것이다(마가). 아니 아니, 그냥 큰 나물에 불과하다(도마). 전승이 성장함에 따라 겨자씨가 성장하는 경향을 감안하면, 이 비유의 본래 형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물과 같았을 것이다.

이 무슨 불경한 말씀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작으리라니, 이 무슨 불경한 말씀인가! 더욱이 역사가 플리니에 의하면 겨자 나물은 다 자라도 1m 남짓의 ‘작은’ 키일 뿐이다. 그리고 그 씨는 뿌려지기 무섭게 ‘어느 곳에나’ 금새 넝쿨처럼 덮어버린다. 땅의 중심에서 우아하고 수려하게 고고하고 빼어나게 자라질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 다 자라도 이렇게 초라하고 볼품없는 나물이 될 것이다. 또한 그 나물은 더이상 세계의 중심에 있지도 않는다. 이스라엘 땅의 어느 곳에라도 하찮게 존재하면 된다. 이 무슨 황당한 말씀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작고 초라한 나물과 같으리라니, 이 무슨 황당한 말씀인가!

이것은 차라리 나에게 시험이었다. “예수의 시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앞에 위대함이 아니라 왜소함으로 다가온다!” 보일 듯 말 듯 예수는 상(形象)을 그리고 우리 앞에 내어놓는다. 보고 또 보았다. 하지만 온통 혼란뿐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형편없는 것이다!” 알 듯 모를 듯 예수는 비유를 말하고 바람결에 음성을 날린다. 듣고 또 들었다. 하지만 그의 음성은 언제나 난해하였다. “높음이 낮음으로 변하고 중심은 주변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도무지 예수는 왜 그 위대한 ‘메시아 왕국’의 민족적 염원을 배반하고서, 하필이면 이렇게 초라한 언필칭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예수의 표정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아, 왜일까? 아아, 무엇일까? 잡힐 듯 말 듯 해결의 실마리가 머리를 맴돈다.

5. 다 이리로 오라!

물음은 내게로 이렇게 왔다!(물론 여기 “나는” 필자 자신이면서, 모든 독자들에게도 동일한 경험이 공유되기를 바라는 뜻에서의 ‘보편적인 나’이다.) 역사의 질곡을 살던 유대인들이 억눌림과 빼앗김의 ‘한’을 풀고자 제국들보다도 더 강한 ‘메시아 왕국’을 꿈꾸었다면, 그 나라도 제국주의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힘의 경쟁에서 패한 자들의 꿈꿔온 희망이 힘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라면, 그것도 힘의 논리가 아닐까? 만일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이러한 메시아 왕국과 같다면, 그 안에서도 역시 힘이 지배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정의가 힘이 되질 못하고, 힘이 정의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강자가 약자를 먹는 우리들 문제 많은 사회와 다를 바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제국주의에 다름 아닐까?

깨달음은 계시처럼 내게로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힘이 지배하는 제국이라면, 나처럼 힘없는 자들은 또다시 압제와 굴욕의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중심에 서고 높이 솟아있다면, 우리같은 서민은 그렇게 높은 문턱을 넘어 중심으로 진출할 수 있을까? 아니,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작아야 나같이 볼품없는 자가 그 안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아니,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든 아무렇게나 널려 있어야 나처럼 형편없는 자들이 그 안에 몸붙여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는 우리에게 희망이다. 예수의 음성은 희망의 언약이다.

예수의 음성으로부터 우리는, 그 ‘초라한 나라’로 초대를 받는다. 그 나라는 우리에게 꼭 맞는 나라이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려 낮아지신 하나님을 뵈옵는다. 하나님도 낮아지셨는데 내가 겸손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나라가 초라해졌는데 뽐내며 잘난 척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문턱을 낮추었는데 그리로 아니갈 사람은 또 어디에 있을까? 언제나 ‘중심’에 서고자 하며 ‘높아지려고만’ 애쓰는 우리네 군상들에게,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 우리네 속물들에게, 아니, 예수를 말해도 도무지 상류 사회만을 꿈꾸는 우리네 교회들에게 예수의 비유는 이렇게 도전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