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나님 나라는 '아름다운 배반'이다!

 

  

I. 부자가 기가 막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 불리는 예수의 말씀(눅 16:1-8a)은 기독교 역사 이천 년 동안 언제나 수수께끼였다. 성서 저자로부터 시작하여(눅 16:8b-13) 많은 학자들이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였으나 어떤 질문들은 끝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 청지기는 불의하였는데도 왜 칭찬받았을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데, 어찌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의 새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도 여느 비유들처럼 예수의 튀는 생각을 담았을까? 아니면, 이 비유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알아도 전하기 거북하니 그냥 무시해버릴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많은 이들에게 어쩌면 거북살스런 느낌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주인과 종들 사이에는 원래 곱지 않은 감정이 있기 마련이다(참고, 눅 7:25).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청중이 그리 잘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외지에서 온 이 부자 지주와 그의 청지기에 대하여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그가 부자 지주이며 특별히 외지인(不在地主)이라는 점이 청중들로 하여금 ‘거리감’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을까?

하루는 자기의 청지기에 대한 악성 루머가 부자에게 들렸다(1절). 직역하면 이렇다: “이 사람[청지기]은 그의 재산을 허비한다고 그에게 기소되었다”(diablhqh). 여기 “기소(참소)하다”를 뜻하는 ‘디아발로’(diaballw)는, 사람을 참소하는 “마귀”인 ‘디아볼로스’(diabolo")와 같은 말뿌리를 갖는다. 선량한 사람들이 마귀에 의해 참소당하듯, 청지기도 사람들에 의해 기소당한 것이다.

이제 그 청지기는 자신의 고용주로부터 ‘신뢰’를 의심받게 되었다. 본래 부자와 청지기 사이처럼 위탁 경영을 매개로 한 고용의 관계에서, 신뢰란 청지기가 ‘능력’과 ‘정직성’을 보일 때에만 그리고 그 고용주 부자가 이를 인정할 때에만 성립하는 법이다. 사람들의 말대로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였다면, 그가 무능력했거나 부정직했다는 뜻이다. 이제 부자는 그로부터 신뢰를 거둘 수도 있었다.

부자는 드디어 청지기를 “불렀다”. 요즘 말로 하면 그를 법정으로 소환했다는 뜻이다. 그에겐 분명한 혐의가 있었다.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고 증식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낭비한다고 들렸기 때문이다. 부자가 물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2절). “네 보던 일을 셈하라”는 말을 직역하면, “네 청지기직의 장부를 가져오라”는 뜻이다. 장부를 보면서 꼼꼼히 계산하자는 말은, 당시 통용되던 경제 행위의 관행에 따라 정의(정상)를 회복하자는 뜻이다. 말대로라면 부자는 청지기가 가져올 장부를 보고서야 그의 정직성을 판단할 것이다. 그것이 정의를 세우는 길이다. 그렇다. 역시 가진 자는 배운 자답게 합리적이고 다스리는 자답게 공정하며 말로나 외모로나 연출도 세련되었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내면 부자의 행동은 거칠고 폭력적이었음이 드러난다. 본래 이런 상황이라면, 소문을 들은 부자는 그 청지기에 대한 항간의 소문이 사실인지 조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청지기로부터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상하게 진상을 조사하려 하지도 않았다. 청지기는 변명의 기회조차 상실한 것이다. 아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청지기는 모르고 있었다. 부자는 너무나도 독단적이었다. 우리들 독자에게 부자는 멀게만 느껴진다. 반면에 이 청지기는 동정심마저 자극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청지기 편으로 가르고 있다. 불쌍한 이 청지기를, 우리 같으면 어찌할 것인가?

II. 인간미: 동정(同情) 그리고 동일시(同一視)

“청지기가 속으로 말하였다”(3절). 우리에게만 은밀하게 속삭이듯 그 피해자가 말 걸어온 것이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3절)? 부자 모르게 내뱉은 독백이었다. 그것은 우리만 엿보는 그의 속마음이기도 하다. 말마따나 왜 이리 ‘약한 모습’ 보이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이 진솔함을 따라 우리는 청지기의 내면 세계로 이끌린다. 그리고 맘 속 깊이 그와 하나가 된다!

아, 드디어 그 독재적 자본가는 ‘나’(= 청지기)에게서 “청지기직을 빼앗고 있다”(3절)! “빼앗는다”를 뜻하는 희랍어 단어는 본래 “끊쳐낸다” 또는 “찢어 없앤다” 등에 대한 상징적 언어로서 확실하게 폭력성을 함축한다. 나는 부자의 그 폭력에 이렇게 ‘수동적’이었다. 나 스스로는 어찌 할 수 없었다. 희생양이 된 것이다.

나는 어쩌면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나는 아직 청지기 직분을 유지하고 있다. 나에게도 방법은 없지 않았다. 물론 고민도 있었다. “주인으로부터 신용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까? 차라리 다른 유력한 이의 청지기가 되도록 일자리를 알아볼까? 아니면, 이도저도 포기하고 그냥 주저앉을까?”

나는 계속하여 중얼거린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3절). 속 좁기는 나도 주인과 마찬가지였다. 위기의 상황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그 많은 방법들 가운데 고작 두 가지 극단만을 모색한 것이다. 하나는 소작농이 되어 땅을 파고 농사를 짓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것도 싫어 구걸하며 빌어먹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내미가 떨어지기엔 주인이나 나나 한가지였다. 농사를 짓기에는 육신이 너무나 약하였고, 구걸하기엔 체면이 몹시 구겨졌다. 육신은 약하나 자존심은 강하다. “그러한즉, 노동할 수도 없고 수치스러울 수도 없다!” 도무지 이런 위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어떠한 노동과 노력도 포기한 채 빈둥거리며 호의호식하려는 전형적인 ‘놈팽이’(lumpen)가 아닌가? 그렇다. 나는 체력이 약하여 내 손으로는 벌어먹지도 못하는 놈팽이였다. 그러나 자존심은 또 강하여 내 손으로는 빌어먹지도 못하는 위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복안은 있었다. 기상천외한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주인에게 빚진 그 자들의 계약서(채무 증서)를 주인 몰래 ‘위조’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빚을 상당 부분 탕감해 주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하니라. 그가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니라.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하니라. 그가 말하되, ‘밀 백 석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4-7절). 이제 날이 밝으면 세상은 뒤바뀔 것이다. 기름 백 말은 졸지에 오십 말로 둔갑하고 밀 백 석은 팔십 석으로 탈바꿈할 것이다(6-7절).

III. 뒤틀기: 배신 그리고 농락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청지기의 행위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 채무자들이란 청지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 부자 주인에게 빚진 자들이었다(5절). 따라서 탕감은 채권자인 부자 주인만의 권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지기는 채무자들을 “낱낱이” 불렀다(5절). “하나씩 하나씩” 불렀다는 뜻이다. 탕감의 음모를 은폐시키기 위함이었다. 공문서(채무 증서)의 변조와 탕감의 음모는, 청지기와 채무자들 사이에 “재빨리” 이루어져야 했다(6절)! 뭔가 불미스런 일은 신속하게 끝내야 한다. 그의 행위는 심각한 경제사범(經濟事犯)에 다름 아니었다.

범죄의 규모는 예상치 못할 정도로 컸다. “기름 백 말”은 팔백 내지 구백 갤론의 분량으로, 올리브 나무 150주 가량이 있어야 산출할 수 있다. 평균적으로 계산하여 당시 노동자 임금의 3년치에 해당한다. 그 절반이나 자기의 것인 양 인심을 썼으니, 거액을 도둑질한 셈이다. 또한 “밀 백 말”은 1,100부쉘의 분량인데, 약 백 에이커의 토지가 있어야 생산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노동자 임금의 7년치 또는 8년치에 해당한다. 그 반의 반을 도적질한 것이다. 이상은 그 주인이 얼마나 큰 재벌이었나를 보여준다. 또한 탕감의 규모가 큰 만큼 범죄의 규모도 엄청났음이 당연하다. 한 가지 더, 본문은 빚진 자를 오직 두 사람만 언급한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 구조나 채무의 관행으로 볼 때에 부자에겐 훨씬 더 많은 채무자가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의 이 비유가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두 경우만을 언급할 뿐이다. 여하튼 그 청지기가 저지른 금융 사고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하였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몸으로 와서 밑천도 없이 얄팍한 ‘머리’ 하나와 오직 간사한 말재간만으로 이제껏 호의호식하며 살게 한 것이 뉘 ‘은혜’란 말인가?” 이것은 차라리 배신이었다. 그러나 청지기는 주인의 막대한 재산을 가로채 자신의 것인 양 마음대로 유용하였다. 배신은 몇 가지 계산 끝에 왔다. 우선, 그는 자기의 회계 장부를 뜯어고쳤으니 자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사실은 이제 감쪽같이 은폐될 것이다. 그래서 상당 부분 책임을 면할 것이다. 물론 ‘공문서 위조’의 혐의를 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다음으로, 이 묘책은 청지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빚진 자들에게도 분명 엄청난 이익을 보장할 것이었다. 빚진 자들에게 탕감의 말할 수 없는 은혜란 그 청지기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그들이 그 부자로부터는 빚을 탕감받지만, 이 청지기에게는 또다른 형태의 빚을 지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배신은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의 결단력이란 영악과 교활, 음모와 술수, 그리고 날조와 배신으로 위기를 호기로 삼는 것이었으며 자기만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 청지기는 우리네 저질스런 정치인들이나 더러운 기업인들이나 음흉한 법조인들 혹은 그들의 간사한 참모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화려한 배신을 통하여 청지기는 자신에게 닥친 극단의 위기 상황을 단숨에 반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청지기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그가 자기의 주인에게 이렇게 못된 짓을 한 것은 주인에게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전에 주인은 나에게 악랄하게 대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나는 주변의 지인(知人)들로부터 그리고 청중들로부터 많은 동정과 무언의 격려를 받고 있지 않은가?” 변명의 기회도 주질 않고 자신을 해고시킨 주인의 그 ‘폭력’을 청지기가 속 시원히 복수한 셈이다. 이제는 청지기가 주인 몰래 주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청지기의 영악함은 부자의 폭력적 독단에 대한 보기좋은 앙갚음이었다.

비유의 초입에서 주인의 폭력이 권력에 기초하였다면, 청지기의 폭력은 영악함과 교활함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비유의 처음에 부자는 권력의 소유자로 나타난다. 그의 독단적인 판단은 그가 권력자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그의 청지기 또한 희생자로서의 능력을 가졌다. 그는 동정심으로써 청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희생자의 힘은 바보스런 부자의 권력보다 컸다. 비유의 처음엔 부자가 못됐고 청지기가 불쌍했으나, 이제는 청지기가 악랄하며 부자가 희생양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예수도 비유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줄곧 독자된 우리들을 청지기의 편으로 갈라놓았다. 우리는 끝내 그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제일 못난 ‘놈팽이’로 드러났고 가장 교활한 배신자로 입증되었다. 못내 우롱당한 느낌이다. 그것도 예수에 의해 말이다. 진정 배반당한 것은 우리들이다.

IV. 마음이 교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번에는 부자가 청지기에게 공격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비유의 끝’은 우리를 더 깊은 함정으로 빠뜨린다: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교활하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절a). 회계(會計)와 감사(監査)를 다루는 보통의 비유들은, 막판에 주인이 와서 정확한 계산 끝에 악한 자를 벌 주며 잘한 자를 상 주는 것으로 마무리한다(마 18:23-35; 25:14-30; 눅 19:12-17 등). 질서를 세우고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너무나 악랄한 경제사범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청지기를 처벌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무소불위의 그 권력자는 복수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를 칭찬한다. 왜일까? 칭찬의 내용은 더더욱 놀랍다. 그것은 결코 그의 지혜로움(sofos)이 아니다. “그가 교활하게(fronimws)행동한 것”이다(8절). 교활함은 칭찬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를 칭찬하면서도 주인은 그를 “비리(악, 죄, 부정직)의 청지기”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악인이 칭찬받는 나라란 말인가?

이 비유는 예수님의 여러 다른 비유들처럼 (1) 부자(또는 주인), (2) 관리인 청지기, 그리고 (3) 채무 소작농들(또는 소농들)을 갈릴리 사회-경제 피라밋의 단면처럼 3단계로 제시한다. 그들은 채무에 의하여 종속관계로 얽혀있다:

부자(지주)------> 청지기(중개인)-------> 소작농(생산자)

소작농들(“주인에게 빚진 자들”)은 생산계층이다. 그들은 노동력에 의존하여 농사를 짓고 많은 부분을 지주에게 도지(소작료)로 상납해야 한다. 부자는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재벌로서 ‘부재지주’(不在地主)이다. 그의 자본은 외국(타지역)으로부터 국내에 진출한 것(外資)이며, 의도적이든 결과적이든 고금리 채무관계로써 소작농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부자와 소작농들 사이에 청지기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청지기는 부자의 모든 재산을 떠맡아 국내에서 관리/운영하는 ‘위탁 경영인’이다. 그의 사회적 역할이란, 자본가와 생산자 사이에서 생산과 분배 그리고 지배와 착취를 중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똑똑하고 영악하며 교묘하고 교활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산계층(소농과 소작농)에 대한 지배와 착취가 가능하다. 세상에서 청지기 하기는 교활하기 나름이다.

예수의 시적 상상(詩的 想像) 가운데, 청지기는 본래 그의 직업에 요구되는 덕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는 충실히 교활하였다. 그는 과연 자신의 고용주로부터 칭찬받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예수의 예상치 못할 신학적 상상(神學的 想像)은 어디에 있는가? 비유의 함정은 어떤 점인가? 그것은, 청지기가 ‘교활의 미덕’(기술)을 하층민이 아닌 상층민에게로 발휘했다는 점이다! 청지기의 교활함이 하층민을 향할 때는 지배와 착취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상층민을 향할 때는 빚진 자들을 향한 자본가의 탕감이 되고 눌린 자들의 해방이 된다! 청지기의 이기심과 범죄는 ‘작은 정의’를 희생한 것이다. 그가 하층민을 탕감한 것은 더 악한 구조를 깸으로써 ‘큰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V. 결론은 사람이다!

난마처럼 얽혔던 예수의 수수께끼가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다. 일견(一見) 예수께서 우리를 우롱하면서까지 청지기를 ‘불의한’ 자로 만드신 깊으신 신학적 성찰도, 서서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본가와 생산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생산과 분배 그리고 지배와 착취는 필히 채무관계와 금융관계를 수반하였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을 법적으로 금지하였다(출 22:24; 레 25:35-37; 신 23:19-20). 율법을 준수하면서도 이윤착취의 실리를 동시에 이루는 방법이란 요령 있고 교활하게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높은 이자를 원금에 포함시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엔 율법을 훌륭히 지키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기름 50말을 빌려주며 계약서에 원금을 100말이라 쓰고 밀 80석을 빌려주며 100석이라 기록하면 되었다(이 경우, 금리는 기름이 100%였고 밀이 25%인 셈이다). 이 모든 ‘부정한’(불의한) 실무(實務)는 의당 부자 지주가 아니라 청지기가 담당하였다.

사람들의 모함과 실직의 위기에서 그 영악한 청지기가 취한 방법이란, 교활하게도 그 불법적인 계약서를 재위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름 100말을 50말로 그리고 밀 100석을 80석으로 바꾸었다. 고금리 이자분(기름 50말과 밀 20석)을 변제하고 원금만을 계상(計上)하는 것이었다. 청지기의 천성적인 교활함이 채무 소작농들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에게로 향했으니, 이것은 분명 당시의 금융 관행에도 역행하고 자본가(주인)의 이익에도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까지도 채무 소작농이 유리하도록 계약서를 위조하여 약한 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었다(5-7절). 더욱이, 불법적 고금리를 변제하고 율법의 본래 취지대로 원금만을 계상하니, 날조가 아니라 원상회복인 셈이었다. 나아가서, 의도적이든 결과적이든, 채무와 종속이라는 구조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권력과 자본의 편이 아니라 무력자와 빈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었다. 그의 행위가 세상의 안목으로는 금융 질서의 파괴였고 불의(不義)였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안목으로는 ‘정의의 회복’이었다.

예수의 심오한 통찰은 여기에 있다. 인류 역사상 권력과 정의는 언제나 동의어였다. 정의는 항상 권력자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들 세상에서 권력은 언제나 정의였다. 그러나 비유의 세계에서 예수는 권력과 정의의 강철 같은 유대를 녹여버린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정의는 권력의 편에 있지 않고 오히려 약함과 동일시된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 “그 나라는 예외 없이 약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비유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닳고 닳은 그 청지기가 비유의 중반 즈음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직장과 돈을 잃는 대신 그는 ‘사람’을 선택하였다. 그가 택한 것은 빚에 허덕이는 소작농들이었고 가장 ‘사람다운’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제야 ‘사람’이 된 그 청지기를 비로소 그들 집의 식탁교제에 손님으로 초대할 것이다(4절). 함께 밥을 먹자고 부르는 것은, 수용 신뢰 연대 그리고 평화를 상징한다. 그 교활한 자가 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인간의 조화롭고도 이상적인 삶은 돈과 권력에 있질 않고,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데 있다!” ‘가치들의 반란’이 아름다운 배신을 연출하였다!

세상의 부자들을 향한 예수의 도전이 여기에 있다. 돈만을 좋아하는 우리네 속물들을 향한 예수의 간곡한 부름도 여기에 있다. 부자는 막대한 자본과 고금리 채무관계로써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며 자신의 부(富)를 축적하려는 부재지주였다. 자본주의나 물신주의(物神主義)가 늘 그러하듯, 그에게는 ‘사람’보다 돈이 귀했고 그래서 ‘사람다움’보다는 실적이 중요했다. 그러므로 청지기로는 가장 교활한 자가 가장 적합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교활함은 뜻밖에도 자신을 향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배신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였다. “그 배신자는 지금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사람’을 추구하고 있다. 그 자가 지금 가장 ‘사람다운’ 사람들에게로 가고 있다.”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라면, 이 이야기의 끝에서 부자는 드디어 ‘이야기’(예수의 세계, 하나님의 사건)에 참여한다. 깨달음은 이렇게 온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깨끗이 지는 것이고, 독단적 권력자가 교활한 무력자에게 끝없이 패하는 것이며, 돈이 사람 앞에 철저히 무릎 꿇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