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못난 아비의 불의한 나라(2)

(막 12:1-12; 마 21:33-46; 눅 20:9-19; 도마 65-66)

 

의문 투성이 비유

신약 복음서들이 전하여 주는 모양대로라면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정말 의문 투성이다. 전적으로 무능하리만큼 인내심 가득한 주인이, 당할 만큼 다 당한 후 곧바로 생각을 바꾸어 그렇게 빨리 피의 보복을 감행하는 것은 얼마나 어색한가? 무엇보다도 만일 주인이 제정신의 사람이라면, 자기의 아들까지 잃은 마당에 또다시 포도원을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 수 있을까(막 12:9; 마 21:40-41; 눅 20:15-16)?

앞선 글에서 우리는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마가, 마태, 누가, 그리고 도마복음에서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리고 각 복음서 저자들의 문제의식과 신학적 편향에 따라, 비유의 형태와 내용이 변이하는 과정을 거꾸로 재연하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예수에 대한 우리의 갈증과 그 분을 뵈옵고자 하는 우리의 열정이야말로, 그를 향한 지성적/신앙적 여정을 감행하게 하였다. 예수의 말씀이야말로 수많은 전승의 층위들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세월의 더께를 벗겨내며 땅 속 깊이 묻히인 예수를 향하여 전승의 층위들을 하나씩하나씩 떠들어 내려가도록 한 것이다.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예수께서는 본래 어떤 모양으로 말씀하셨을까? 앞선 연구(5월호)를 토대로 재구성하면, 예수님의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그 골격을 드러낸다:

(1) 한 부자 지주가 있었는데, 그는 포도원을 소작농부들에게 맡겼다.

(2)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자 주인은 한 종을 보내 도지(소작료)를 받아오라 하였다. 그러나 소작농들은 종을 잡아 두들기고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3) 주인은 또다시 종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도 때려 보냈다.

(4) 그때 주인은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겠지”라고 말하면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5) 그러나 그들은 “이 자가 상속자니 그를 죽이자. 그러면 포도원은 우리의 것이 되리라”라 말하며 이내 그를 잡아 죽였다.

진정 예수 비유의 본모습이 이러했다면, 그렇다 하여도, 예수의 비유가 늘 그러한 것처럼 물음은 끝이 없다. 자기의 종들이 그렇게 참혹하게 당하는 데도 주인은 계속하여 종을 보낼 수 있는가? 자기의 종들을 그렇게 난폭하게 대한 포도원으로 도무지 어떤 아비가 자기의 아들을 보내겠는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을 상속하리라 계산하는 소작농들은 또 어디에 있는가?

아버지의 무능이 아들을 죽였다!

(1) 한 부자 지주는 어느 날, 필경은 가난했을 자들을 모아 그들에게 포도원 농장을 위탁하였다. 그들에게 살 길을 주며 자신은 적정한 도지를 취하자는 일종의 계약이었다. 이는, 그가 권력과 명망을 갖추었음을 단적으로 지시한다. 1세기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이나 특히 당시 유대 문화는, ‘명예와 수치’(honor and shame)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던 사회였다. 본래부터 체면을 극도로 중시하던 우리네 이상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주인의 명예(체면)란 그의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힘에 달려 있는 법이다.

(2) 그러나 여기 종을 대하는 농부들의 처사는 분명히 극단적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유독 도마에서만, 농부들이 그 종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 변호한다(5월호 49쪽). 여하튼, 농부들이 주인의 종을 능욕함으로써 주인을 욕보였다. 주인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주인을 배반한 것이다. 주인의 반응은 무엇일까? 비유를 듣는 예수의 청중은 이제 주인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주목한다. 여느 주인 같으면 농부들을 향한 적절한 보복으로써만이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방법을 택했어야 한다. 농부들이 종을 때려 거반 죽게 함으로써 기존의 계약을 파기했다면 주인은 재차 삼차 계약을 확인하며 단도리를 쳤어야 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다시 종을 보냈다. 그 두번째 종은 또다시 잔혹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여기서 비유를 듣는 예수의 청중이 주목하는 것은 한 가지다: 주인의 판단과 인내심은 과연 정당한가? 하지만 예의 농부들은 주인의 종을 또다시 두들겼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주인의 행위가 적절치 않았음이 드러난 것이다. 주인이 완전히 오판한 것이다! 적어도 청중이 보기엔 농부들이 또다시 주인을 욕보인 것이다. 주인은 오판하였고 따라서 욕보임당했다. 그의 명예는 이중으로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그가 어리석은 바보였음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아니, 남들에게는 그가 정신나간 친구로 보였을 것이다.

(4) 주인에게도 이성이 있고 감정이 있진 않았을까? “그 자들은 평소 내게서 큰 은혜를 입지 않았는가? 그러고서도 두 번씩이나 나를 욕보였다면 그 자들은 배은망덕한 놈들이 아닌가? 나는 그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만 하지 않는가!” 이제는 이제는, 비록 늦었지만, 주인 편에서 그 패륜적 종들에게 피의 보복을 감행할 차례였다. 그러나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다. 이 얼빠진 친구는 그러면서도 “그들이 내 아들은 공경할 것”이라 중얼거렸다. 아들은 자기를 대신하는 자니, 이제는 그들이 그를 올바로 알아볼 것이고 자연 자신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그의 계산은 과연 적중할 것일까, 아니면 그가 또 바보짓을 하는 것일까? 독자 된 우리는 근심어린 눈으로 일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5) 하지만 주인은 얼마나 나이브하였는가? 그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살해한 것이다!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주인이 또다시 오판한 것이다. 이전에는 농부들이 도지의 지불만을 거부하였으나, 이제는 아들을 살해함으로써 포도원의 소유권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농부들의 폭력 너머로는 아버지의 잘못된 계산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아비의 무능함이 아들을 죽인 꼴이다. 지질이도 못난 사람! 경제로 말하면 그는 자기의 사업을 망쳐버리고 파산해버린 자였고, 가정으로 치면 친자 살해라는 윤리적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그의 완벽한 오판과 무모한 행동 그리고 기대와 인내가 일을 그르쳐버린 것이다. 비유는 결국 포도원 주인의 일그러진 얼굴로 비극의 막을 내린다. 그 쓸개 빠진 자는 허황된 기대와 무모한 기다림 끝에 자신의 명예도 포도원도 그리고 아들도 잃고서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멍청이 하나님의 모순된 나라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은 무엇일까? 만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또한 이 비유의 청중이 자신을 그 폭력적인 농부들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고려한다면, 이 비유는 청중에게 극도의 혼란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 비유는 포도원의 마지막 운명이 결정되지 않은 채 끝나버린다. 왜냐하면 포도원 주인도 농부들도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도원이 마침내 농부들의 손에서 놓이리라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기에는 농부들의 행위가 너무나 잔인무도하다. 농부들의 폭력은 점점 강도를 더해간다. 급기야는 아들을 살해한다. 그리고 쓸개 빠진 그 주인의 운명은 이내 아들의 운명처럼 될 것이다! 폭력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예수의 말씀 안에서 주인은 멍청이고, 소작농부들은 떼강도와 같으며, 종들과 아들은 두들겨 맞거나 살해당한다. 그래서 이 비유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30-35)와 유사하다: 구렁에 던져진 사람은 두들겨 맞았고 거반 죽게 되었다. 그에게 구원은 오직 그 가증스런 적을 통해서만 찾아올 것이다. 이 비유는 또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 16:1-8)와도 동일하다: 그 두 이야기 모두에서 청지기도 농부들도 악을 행하지만 그들은 벌받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그들의 악행으로 세상에서 번성한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예수께서 염두에 두신 것은 무엇이었을까? 알레고리를 배제한다면, 종들도 심지어는 아들도 이 비유에서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그들의 존재는 그만큼 도구적인 셈이다. 그렇다면 비유의 주요 등장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주인과 소작농들이다. 준거는 두 가지로 가능하다. 주인은 하나님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일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작농부들은 이스라엘이나 아니면 로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비유는 어떠한 동일시와 짝짓기도 허용치 않는다. 만일 포도원의 주인이 이스라엘이고 소작농부들이 로마라면, 그 나라는 회복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주인으로써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소작농으로써 로마를 지칭한다면, 이스라엘은 끝내 그들의 식민 통치를 면치 못할 것이다. 예수가 이것을 의도하였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이 주인이라면 어떠한가? 바로 그것이다. 그 쓸개 빠진 주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멍청이며, 급기야는 아들도 잃고 포도원도 강탈당한다! 여느 비유에서처럼, 예수의 가르침은 충격 속에 다가오고, 하나님의 나라는 극도의 혼란스러움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멍청함이 때로는 복음이어라!

예수 언어의 논리적 폭력성은 일종의 ‘신학적 뒤틀음’에 기초하고 있다. 본래 이 비유는 ‘주인과 종의 비유’ 또는 ‘회계의 비유’이다. 특히나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여느 비유에서처럼 이야기의 끝에서 주인이 농부들을 데려다가 계산(회계)해야 함이 옳다는 뜻이다. 그러나 비유는 이 모든 기획을 ‘뒤엎었다.’ 정작 테스트는 농부들이 주인을 향하여 던진다! 그리고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갖춘 포도원 농장주는 오직 바보로 나타나며 그는 어김없이 실패한다! 예수께서 꿈꾸시는 하나님 나라란 이런 것이다.

포도원의 경작에 대하여 무능한 아버지가 보인 실패는 비유를 비극으로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그 소작농부들은 과거 그들이 위탁받았던 포도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아들’에게로 상속될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분명 아니라고 답하신다. 이 비유는 또한 그 나라의 상속자가 선하다는 예측 가능성을 도전한다. 이 세상 나라의 잘나고 힘있는 자들이 상속자로서 끝내 승리하리라는 낙관적 전제를 여지없이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의 끝은, 하나님 나라를 예측가능한 묵시종말적 승리로부터 ‘비극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오히려 그 나라는 언필칭 ‘하나님께 저주받은 인생들’이 상속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불의한 자들’의 것이다!

이 점은 과연 예수의 가르침과 생(生) 안에서 성취되었다. 예수의 비유야말로 예수께서 써내려간 자서전인 셈이다. 그는, 당신의 ‘가르침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한 사회의 암적 존재들로 가득한 누룩과 곰팡이의 집단에 다름 아니라고 선언하였다!(막 4:30-32; 눅 13:18-20; 마 13:31-32; 도마 20. 2월호에 실린 누룩의 비유 해설을 보라.) 예수는 또한 당신의 ‘삶 안에서’ 본시 사회의 버림받은 자들과 밥상을 나누시며 유대를 가졌다(막 2:13-17)! 자기의 가르침을 완성하려 하나님의 나라를 오직 그 저주받은 자들에게 넘기신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하나님의 무능함’과 ‘악인의 폭력’은 또 어찌할 것인가? 이 비유는 분명 하나님을 무능한 ‘바보’ 아버지로 그리고 그의 나라를 ‘폭력의 대상’으로 부각시킨다. 그렇다. 아버지의 무능 너머로는 농부들의 폭력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수치스런 멍청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래서 폭력이 난무하고 모순으로 가득찬 나라란 말인가? 이 나라를 누군들 좋아하랴? 이 나라를 누군들 들라 하랴? 아, 폭력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하나님의 패배는 도무지 언제까지일까?

생각하자면,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폭력’은 하나님 나라의 한 결정적 요소였다. 그는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은 폭력으로 뚫리나니 폭력의 사람은 그것을 강탈한다”(마 11:12). 악인의 폭력을 부른 것은 얼빠진 주인의 허황된 기대와 무모한 기다림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의 기다림이란 아버지와 같아,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기다림이다. 암처럼 썩었고 누룩처럼 썩게 하는 나 같은 자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께로 돌아오길 기대하고 기다리신다. 참으로 멍청하게 기다리신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같아, 심지어는 아들 딸의 폭력 앞에 오직 아들 딸의 앞날을 위하여 패하고 또 패하는 희생적 사랑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어머니와 같아, 당신의 패배로써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그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시는 절대 사랑이다. 이렇게 그 나라의 하나님은 ‘당하시는’ 하나님이고 끝까지 패하는 하나님이다.

비유는 호소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니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 ” 큰 눈 속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가득 담은 하나님께선, 말할 듯 못할 듯 처연한 눈빛으로 내게로 다가온다, “나를 이겨서라도 니가 살 수만 있다면... ” 하나님의 무능함이 때로는 복음이다. 그 분의 패배가 우리 같은 패륜적 죄인들에겐 진정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