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인 힘과 기존 세력

(8:22-9:6절)





누가의 구조 속에 있는 단일 사상 단락인 이 부분은 분명히 누가적인 시기를 말하며 시작한다: "어느 날"(참. 막4:35; 마8:23절) 9:6절까지, 누가가 하루라는 작품 틀 안에 이 모든 것들이 연이어 나오도록 배치한 의도는 분명하다. 이러한 시간적인 경계 내에서 자료들은 여러 가지 연결장치를 통해서 함께 다 뤄야 한다.

(1) 4개 기적 이야기(8:22-25; 8:26-39; 8:40-42, 49-56; 8:43-48절)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며, 이어서 나오는 삽화(pericope), 9:1-6절에서 예수는 열 둘에게 능력과 권위를 준다.

(2) 4개 기적 이야기는 그를 환영하지 않은 그 곳(8:37절)을 예수가 떠났다는 것으로 9:1-6절과 더 잘 연결된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영접하지 않는 도시를 떠나라고 말한다(9:5절).

(3) 4개 기적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중요 단어는 다음과 같다.

(a) 8:22-25절, 26-39절에서는 "호수"(8:22, 33)와 "배"(8:22, 37)이다.

(b) 8:25, 35, 37, 47(?), 50절에서 "무서워 한다"는 것이다.

(c) 8:36, 48, 50절에서는 "구원/구원받음"이 키워드이다.

(d) 8:42, 43절에서는 "12년", 8:48, 49절에서는 "딸", 8:48, 50절은 "신앙"이 핵심어이다.

8:22절에서 말하는 때와 많은 연결 장치들의 실마리들인 8:22-9:6절을 하나의 단락으로 여길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저자가 강조하는 점은 무엇인가?

예수가 제자들을 사역하도록 보내기 전에 자신의 능력을 그들에게 부여하는 예수의 은사에 저자는 주 목한다. 마태와 마가의 배역을 비교함으로써 누가의 자료 구성은 다음과 같은 의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1) 막4:35-5:43절에는 4개 기적들(풍랑, 악마치유, 혈루 여인, 야이로의 딸의 일으킴.) 다음에 나사렛에 서의 예수 배척이 나온다(6:1-6절). 이런 배열은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기적이 꼭 필요한 것은 아 님을 말한다.

(2) 비록 마태 8장, 9장에서 발견되는 10개의 기적 이야기 군(collection) 안에 이 4개 기적 이야기가 속 해 있다고 하더라도, 마태의 4개 기적 이야기(마8:23-27절/풍랑, 8:28-34절/두 악마, 9:18-19, 23-26절 /야이로의 딸의 일으킴, 9:20-22/혈루증 여인)는 흩어져 있다. 그리고 마가와 누가와 같은 순서로 이 4 개 기적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마태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구성된 형식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한다. 복음서의 중심 내용이 자료 면에서 5개 형식(cycle)으로 나뉘어진다: (a) 마태 3-7장 (b) 마태 8-10장 (c) 마태 11-13장 (d) 마태 14-18장 (e) 마태 19-25장. 각각의 형식(cycle)은 예 수가 행한 것과 이어서 예수가 말한 것으로 이루어지며, 각 형식(cycle)을 연결하는 동사나 주제를 담 고 있는 연결어(thematic link)를 가진다. 이런 전체적인 구도와 관련해서 볼 때, 8-10장은 두 개의 형 식(cycle)으로 구성된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의 말씀인데, "더러운 영을 제어하고, 쫓아내고, 모든 질 병과 연약한 것들을 치유하도록 예수가 열둘에게 권위"(1절)를 주었다고 말하면서로 시작한다(파송자를 위한 가르침). 마10:8절에서 열둘에게 사명을 준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이 가르침은 이야기 단락(8장-9장) 다음에 나온다. 이 이야기 단락에 서 예수는 10개 기적을 행하는데, 이 중에는 문둥이를 깨끗케 하는 것(8:2-4절), 모든 병자를 치유하는 것(8:16절),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8:24-34절),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9:18-19절, 23-25절)이 있다. 또한 예수가 천국 복음을 선포했듯이(9:35절), 제자들에게도 이것을 선포할 책임이(10:7절) 주어진다. 저 자는 이러한 복음서 자료 배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줄 권위가 예수에게 있었음을 그의 기적을 통해 보여준다. 예수가 자신이 행했던 의를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한 첫 번째 형식에서처럼(마3-7장) 두 번째 형식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갖고 있는 권위를 파송자들에게 준다.

누가 배열은 마가와 마태와 비슷하다. 눅8:22-56절에 있는 4개 기적 이야기들이 막4:35-5:43절에 나온 다. 그런데 4개 기적 이야기 뒤에서는, 막6:1-6절과는 다르게 나사렛 배척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오 히려 마태 10장과 같이 누가는 기적 이야기 다음에 열둘을 파송하는 기사가 나온다: 눅9:1-2절은 말한 다. 예수가 열둘을 불러 모아서 그들에게 "모든 악마를 이기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주 어, 그들이 하나님 왕국을 선포하고 치유하도록 파송한다" 4개 기적에 대한 내용을 열 둘 파송에 앞서 서 배치한 것은 마태처럼 누가도 예수가 열 둘에게 이 능력과 권위를 주었다고 말하기에 앞서서 이미 예수가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의 갈릴리 사역이라는 입장으로 이 배열을 볼 때 흥미롭다. 눅4:31-5:11절을 보면, 4개 기적들 이후 에 베드로의 부름과 사명으로 절정을 이루는 내용이 나온다: 기적은 베드로로 하여금 스스로를 죄인이 라고 고백하도록 한다. 갈릴리 단락 끝 부분에서는 또 다른 4개의 기적 시리즈 이후에 열둘을 파 송하는 내용이 나온다: 사명에 앞서서 나오는 능력있는 행위들을 통해 자기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는 권위가 예수에게 있음을 본다.

누가-행전(Luke-Acts)의 성격을 이해한 독자는 눅8:22-56절에 나오는 기적들과 상응하는 내용을 사도 행전 이야기에서도 발견할 것이다.

(a) 눅8:40-42절과 행27장

(b) 눅8:26-39절과 행16:16절 이하

(c) 눅8:40-42절, 49-56절과 행9:36-43절

(d) 눅8:43-48절과 행5:15, 19:12절.

즉 눅8:22-9:6절은 사도(보냄받은 자들)들이 자기 사역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할 것 이라고 예시한다. 사도들의 능력은 자기 능력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이다(눅24:49; 행1:8; 3:12, 16; 4:7-12절): 예수 제자들은 자기 능력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예수가 선포하고 치유하라고 그들을 파송하기(9:2절) 전에 그는 열둘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능력과 권 세(눅9:1절)를 주었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해 보라. 이것은 또한 위로부터 능력을 받을 때까지(눅24:49절)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하고, 성령이 임한 후에 증거해야 한다(행1:8)는 사도행전 교회의 경험을 예시한 다: 예수는 사역을 맡을 자들을 준비시킨 후에야 사역을 맡긴다.

눅8:22-9:6절의 구조 속에 있는 기적 이야기중 하나인 눅8:26-39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이 단락 전체의 강조점을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군대(legion) 귀신에 들린 사람 에 대해서 말한다. 귀신축출 이야기에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눅8:26절에 있는 본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가 간 지역이 게라세네스(Gerasenes)인가, 가다레네스(Gadarenes) 혹은 게르게세네스 (Gergesenes)인가? "게라세네스(Gerasenes)(또 막5:1절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마태는 "가다레네스 (Gadarenes)"라고 읽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이렇게 읽을 때 문제되는 것은 게 라세네스(Gerasenes)가 거라사(Gerasa)(현대에는 제라쉬[Jerash]이라 부른다.)의 주민을 말한다는 것이 다. 거라사는 갈릴리 바다 최남단에서 30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지리적으로 이렇게 읽는 데에 문제점 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학적으로는 중요하다: 돼지 무리를 언급하는 것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거라사 는 갈릴리 영토였다(8:32절). 복음서 안에서만 언급되는 이곳은 예수가 유대 경계 지역을 너머 이방 땅 으로 여행을 한 곳이다: 그의 사역은 이방 지역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저자는 이방으로 나아가야 할 교 회의 미래 사역의 활동을 예시하고 있다. 구원은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다(참고. 눅2:32; 3:6; 4:25-27; 행26:18 주목. 눅9:1-6절은 사도들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자가 아니라 말한다.--막6:7-13절과는 비슷하나 마10:5절과는 다르다.). 그러나 누가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단순히 관심의 차원에서만 아니라 능력의 차원에서 예수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기적 이야기를 말한 이유이 다. 예수는 이방 사역에서도 사탄을 제어할 능력을 가진다. 더 나아가서 더러운 동물(8:32-33절) 안으로 들어간 더러운 영들(눅8:29)이 돼지 떼로 하여금 호수로 빠지게 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을 피하고 혹은 그의 사역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들을 쫓아낸 자는 또한 바다를 다 스린다(눅8:22-25절). 다시 예수의 보편적인 능력이 강조된다. 눅8:22-9:6절 이 단락에서 이것이 중요하 다. 예수의 능력은 자기가 "보내는 자들"에게 줄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명자들은 바다 (행27-28장)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이방 땅의 악마적인 능력(행16:16절 이하; 19:13절 이하)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예수의 능력은 보편적이다.

이 이야기에서 생각해야 하는 두 번째 점은 예수의 보편적인 능력에 의해 나타난 반응의 유형들이다. 한편으로 치유하는 예수의 능력에 대해서 제자도(弟子道)로 반응한다. 이 주제는 이번 삽화에서 다시 접하게 될 것이다. 공관복음서 중에 누가만이 치유받은 자의 제자 모습(10:39; 7:38; 17:16절)에 주목한 다. 이 제자의 모습은 "예수의 발 밑에 앉아 있고(8:35절)", "예수와 함께(8:38절)" 있으려 하는 마음가 짐으로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의 능력이 신앙을 생기게 한다.

다른 면에 보면, 눅8:26-39절에는 예수 배척이라는 주제가 나온다(눅2:34-35; 4:28-29; 6:11절). 돼지 떼 가 빠져서 몰살되었을 때 돼지치는 사람들이 도시로 들어가 일어난 일들을 말한다. 사람들이 와서 그 사람이 온전해진 것을 볼 뿐만 아니라 돼지 떼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예수께 자기들을 떠나라고 요구 한다(눅8:37; 주목. 눅9:5절-열둘의 거절). 비록 경제적인 동기로 예수가 배척당한다는 주제가 마태나 마 가 이야기에서는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가-행전(Luke-Acts)의 보다 넓은 문맥에서 볼 때는, 저자의 의도가 이것임이 잘 드러난다.

사도행전에서 나온 두 이야기는 누가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종종 경제적인 동 기로 배척당한다.

(a) 행19:23절 이하에서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경제적인 동기를 가지고 호소함으로써 에베소에서 바울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켰다. 저자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배척당하는 것을 강조하려 애쓴다. 24절 은 우상을 만드는 기업은 "장인들로부터 일감을 모두 빼앗아 간다"; 25절에서 데메트리우스 (Demetrius)는 말했다. "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7절에서 데메트리 우스(Demetrius)는 "우리의 사업이 망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이 소동이 멈춘 이후에 바 울은 떠났다(행20:1).

(b) 눅8:26-39절과 가장 유사하게 상응하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행16:16절 이하이다. 여기서 바울은 점 을 쳐서 많은 이윤을 주인에게 준 "여종에게서 점치는 영을 쫓아냈다(행16:16)." 19절에서 저자는 "여종의 주인은 자신에게 올 이윤이 사라진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광장으로 끌 고 데려가 관원 앞에 세웠다." 그 결과 바울과 실라는 매 맞고(22절), 옥에 갇히고(23절), 결국 그 도시 를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다(39절). 떠나라는 요구의 말은 눅8:37절(행16:39절, hvrw,thsan--evxpelqei/n) 과 같다. 누가-사도행전 내의 다른 곳에서 예수와 그의 복음이 경제적인 동기로 인하여 배척을 당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되어질 것들에 대해 누가복음이 미리 예고하는 경향이 있다. 바 로 이러한 두 가지 누가 경향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저자가 눅8:26-39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음과 같은 내용으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기독교 파송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말한다. 이 어 려움은 이들이 사역으로 경제적인 기득권자들을 위협한 것 때문에 겪는 어려움인데. 이것은 예수가 이 미 경험한 것이다. 보편적인 능력 때문에 예수는 배척을 받았고, 이 배척은 예수가 그들에 대해서 위협 적인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받은 것이다. 예수는 종종 위협적인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경고가 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귀신 축출 이야기에서 생각해야할 세 번째 차원은 이야기의 결론과 연결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에게 이웃을 떠나라는 요청으로 귀신 축출 이야기(마8:28-34절)를 끝낸다. 치유받은 자에게 대화하면서 떠나라고 하는 예수의 요구가 막5:1-20절과 눅8:26-39절에 나온다. 예수가 배를 타려고 할 때, 자기와 함께 있기를 요청하는 남자에 대해서 막5:18절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를 떠나 라("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 가실 새")고 말한다. 분명히 누가에는 예수 출발 이후에 함께 있어 온 치 유 받은 자가 예수께 "함께 있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를 보내면서, 예수는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39절)"고 말했다. 이 결론으로부터 여러 가지 사항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저자는 "회심에 대한 전형(paradigm)"으로 이 이야기를 말한다: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 (I.M.Marshall, The Gospel of Luke, p. 341).

(2) 증언하는 자의 자리가 자기 고향이었다(39절).

(3) 이 사람이 사용한 전도 방법은 개인적인 증언이다; 그의 증언의 내용은 예수에 의해서 그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제자와 증거자의 두 유형의 차이를 두는 누가적인 구별을 알 때에만, 이것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다: "그와 함께(참고 8:1절)" 있었던 자들과 그리고 그와 있지 않았던 자들(8:38-39절).

한편으로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한다. 어떤 제자(열 둘과 갈릴리 여인들)들은 요한의 세례에서 부터 예수가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예수와 함께" 있었다(행1:21-22절). 갈릴리에 증인들은 모였고 (눅5:1-11; 6:12-16; 8:1-3절), 이들은 예수와 더불어 모든 사역에 동참했다. 눅9:1-6절만은 예외이다. 하 지만 열 둘이 없는 동안에 누가는 예수의 행동과 말씀에 대해서 어떤 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갈릴리 증 인들은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라갔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모든 것을 보고 듣었다; 눅23:49절에 보 면, 바로 이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을 보았다; 눅23:55절에서는 예수의 시신 매장이 목격되었 다; 눅24:1-11절에는 바로 그 여인이 무덤에 갔지만 시신을 찾지 못했다; 눅24:33절 이하에서 예수는 열 하나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행1:11절에서 그 남자들이 예수의 승천을 본다. 주로 열둘을 말하는 이러한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들이다(행1:21-22절). 그렇다면 누가-행전에서 열둘은 예수 와 함께 있던 자들이며, 예수 사역 처음부터 승천까지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들이다. 이들은 복음의 역 사와 복음의 의미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진 갈릴리 사람인 목격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와 함 께 있었고, 모든 것들을 듣고 보았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누가에 의하면 이러한 목격자들이 교회 운명을 좌우한다. 예루살렘이 기독교 선교를 좌우한다는 사도행 전에서 나오는 신학적인 의도가 담긴 지리적인 배치에서도 잘 드러난다.

(a) 복음의 보편적인 선포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눅24:47; 행1:4, 8절).

(b) 사도시기에서는 교회가 새롭게 확장될 때마다 예루살렘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예. 행8:12, 14-15; 11:1-2, 18, 19-21, 22: 15:2, 12절 이하).

(c) 모든 바울의 사역은 예루살렘에게 보고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의 회심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 의해 인정받았다(행9:27절이하); 바나바의 주도하에 안디옥에서 바울의 사역이 행해졌다(행11:25절 이 하). 예루살렘이 공인한 교회가 바울에게 선교사명을 주었다(행13:1-3절); 바울의 선교 여행은 매번 예 루살렘에서 끝난다(행15:2; 18:22; 21:17절); 바울은 열둘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그들의 증언에 호소하였 다(행13:31절); 바울은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 예루살렘에게 물었고,(행15:2절) 예루살렘의 결정을 받아들 였으며,(행21:23-26절) 예루살렘 권위에 호소하였다(행16:5절). 요약하면, 예루살렘은 사도행전에서의 선 교 사업을 주관한다. 이 힘은 예루살렘의 존재와 긴밀하게 연결된 힘이다. 누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열둘이 거하는 곳이다(행1:4; 8:1b; 9:27; 11:1-2; 15:2, 4; 16:4절). 예루살렘의 힘은 곧 열둘의 힘이다. 또한 이 열 둘의 힘은 곧 예수 시대(gospel history)에 일어난 참된 사실들이라는 점에 근거한다. "그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것 때문이다. "그와 함께" 있었던 자들이 예수의 행위와 말씀 전승을 보증한다. 저자는 예수에 대한 참된 전승이 교회 생활을 이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면으로는, 누가는 열둘이 아닌 제자들과 목격자들을 말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이 바로 이런 사람을 대표한다. 누가의 구도 안에서 바울은 사도이며(행14:14절), 교회의 교사이다. 그러나 사도 서신 (Epistle of the Apostles 31)은 바울을 열둘에 종속된 사람이라 말한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부 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증언하는 자이다(행26:16절). 누가-행전의 전체 구조에서 보면, 바울은 악마로부터 구해진 게라세네 사람과 같다. 비록 바울이 육신으로는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다 하더라 도, 그는 자신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증언하는 자이다. 게라세네 사람은 자기 집으로 가서, 하 나님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행했는가를 선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가 이방인들에게 자기 가 경험한 하나님의 활동을 증거하였던 것은 하나의 정당한 선교 사역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에게 부 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열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어떤 의미로든 그의 사역을 거 절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참고. 눅9:49-50절). 앞에서 말한 두가지 유형은 모두 예수가 위임한 것 이다. 그래서 정당하다. 그렇지만 "예수와 함께"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을 이끌(control) 것이다.

종교적인 경험과 전승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신학적인 과제이다. 사도행전에 바울처럼 게라세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종교를 전하는 기독교 증인들을 상징한다. 이들에게 무언가가 일어났다: 이것은 예수로 부터 비롯한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이를 경험하도록 초청한다. 누가는 이것이야말로 참된 복음 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누가는 지상 예수의 사역을 전하고 있는 권위 있는 전승이 기준 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으로 사람들은 일어난 종교적인 경험에 대해서 기독교적인가의 여부를 판단한 다. "예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러한 전승의 원천이 되기도 하며, 이 전승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누가 사상에 의하면, 경험과 전승, 그리고 신학과 행동 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있을 수 없다. 이 둘은 서 로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