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현존, 파송

(22:56b-24:53; 9:10-17)




한 가지를 제외하고 24장은 다른 복음서엔 없는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이 장은 예루살렘과 인근 지역에 서 일어난 다섯 가지 주요 사건으로 되어 있는데(두 개의 빈 무덤 이야기, 두 번의 현현, 예수의 별세 [exodus]), 이 모든 사건은 하루 동안 일어났다(안식 후 첫날 새벽에, 24:1; 그 날에, 24:13; 그 시로, 24:33; 그러므로 24:50). 마28:7, 10, 16-20; 막16:7절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철저한 관심 집중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비교. 24:47-49; 행1:4절). 예수의 제자들이 충성스럽고 경건한 유대인임(비교. 2:21 이하; 행3:1 이하; 5:12절)을 말해주는 서론, 결론 구절을 이 장은 하나로 묶고 있다(23:56b; 24:53절). 이 부활 장에 는 적어도 3 가지 반전이 나온다.

첫 번째 반전은 죽음을 극복한 예수의 승리이다. 초기 기독교의 예수 부활 이해와, 기독교인 삶의 원형 으로서의 누가의 예수 이해라는 맥락 안에서 볼 때만, 누가 기자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한 편,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 부활은 세 가지 다른 실재(reality)를 포함했다:

⑴ 죽음에 대한 예수의 승리;

⑵ 인간의 시공 차원에서 다른(하나님의) 차원으로 떠남;

⑶ 우주적 주님으로서의 새로운 역할

누가-행전에서 이 세 실재의 통일성은 깨어져서, 연대기적 시간선상의 세 가지 분리된 사건이 된다.

⑴ 예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예수 승리이다.

⑵ 승천은 예수의 하늘로 사라짐이다.

⑶ 고양(高揚)은 예수가 주님과 그리스도로 즉위하는 것이다. 누가가 통일성을 깨트리고, 개개의 사건으 로 나눈 이유는 아마도 분석을 위해서일 것이다: 나누어진 사건들을 하나 하나 기록하면서, 누가 기자 는 각 사건의 의미에 집중시킨다. 누가-행전에서 부활은 단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승리로 집중되었 다.

다른 한편, 예수는 기독교인의 원형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는 앞서 가면서, 뒤따르는 자들을 위해 길을 열어 주는 선구자이다. 그때 예수는 따르는 자들이 기대하는 모델적인 존재이다. 누가가 죽 음을 극복한 예수 승리의 성격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하였다고 한다면, 기독교인들의 희망이기도 한 죽 음을 극복한 승리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24장의 부활 전승을 살필 것이다.

첫 번째 빈 무덤 전승과 두 번째 현현 이야기는 부할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를 증언해 준다.

⑴ 눅24:1-11절에서 두 여인은 빈 무덤을 발견했는데(비교. 마28:1-10//막6:1-8), 몇 가지 특별한 강조점 이 있다.

첫째, 누가는 천사들의 말보다 여인들의 경험에 우선 순위를 준다. 누가는 여인들이 발견한 것(굴려진 돌)과 발견하지 못한 것(예수의 시체)을 대조시킨다. 시체가 없음을 확인하는 사람들은 바로 시체가 눕 혀 있던 것을 본 여인들이다(23:55). 엠마오 이야기에서 이 말이 반영되어 나온다(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두 천사의 말은 이미 경험한 사실을 해석해 주고 있을 뿐이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누가 고유 자료)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24:5b-6a)". 예수 죽음에 대한 승리의 속성이 어떠하든, 그것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누가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이 주장을 지지한다.

첫째, 예수의 시체가 없음을 말하면서 여자 증인들의 이름을 나열한다. 8:1-3절에 한 번 이름이 나온다. 이것은 예수의 초기 사역과 예루살렘 사건을 연결해 준다-같은 갈릴리인들이 23:49절에서는 십자가 처 형을, 23:33절에서는 장례를 지켜본다(비교. 행1:22; 10:37-41절). 이 여인들이 열 한 사도(헬라어 성경엔 사도가 없다.)와 다른 사람 모두에게 말했다(9; 비교. 24:33). 이 다른 사람들은 사도의 가장 기본적인 자격인, 항상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들을 말한다(행1:15-26)(J. Plevnik, The Eleven and Those with them according to Luke," C.B.Q. 40:205-11 [1978]): 갈릴리인들의 증언은 예수 시체가 무덤에서 없어 졌음을 보여 준다.

둘째, 24:12절에는 다른 빈 무덤 이야기가 나온다. 최근의 연구 경향은 이 구절을 복음서에 꼭 필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J. E. Alsup, The Post-Resurrection Appearance Stories of Gospel Tradition [Stuttgart: Calver Verlag, 1975], p. 103): 12절의 상응절로 24절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누가의 스타 일이다. 그런데 만약 이 12절이 34절과 모순된다고 하면, 생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12절의 진정성이 인정받기에, 24:1-11절에 나오는 여인들의 증언을 지원하는 두 번째 증거의 역할을 한다(비교. 민35:30; 신17:6이하; 19:15; b. Sotah 2b; b. Sanhedrin 37b; b. Baba Bathra 31b; CD 9:16-10:3; 눅 23:1-16, 24:4; 2:25-38). 유대 상황에서는 남자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요세푸스(Antiquities, 4:8:15 § 219)는 "여자의 증언은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솔하고 무모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비교. Mishna, Rosh Hashana, 1:8). 이러한 유대적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두 번째 증거는 첫 번째 증 거를 지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세 번째, 24:12절은, 시체가 없어진 것에 대한 설명으로, 시체 도둑질에 관한 어떤 이론도 허용하질 않 는다: "베드로가....들여다보니....세마포만 보이는지라"(비교. 마28:11 이하; 요20:1 이하). 이 세 가지로, 누가복음은 무덤에 시체가 없었다는 전승을 지지한다; 이것은 예수가 죽음에 대해 승리하였음을 축하 하는 일종의 누가적인 방법이다.

⑵ 눅24:36-43절을 보면,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열 둘에게 나타난다; 이 역시 부활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성을 공고히 해준다(비교 요일1:1; 요20:24-29절). 예수가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영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두 가지 증거로 이 생각을 철회시킨다:

첫째,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 이 나는 있느니라"(39; 비교. 요일1:1-2절)라고 예수가 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 무슨 먹 을 것이 있느냐?" 누가는 덧붙인다.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 라"(41-43; 비교. 행1:4; 10:41절) 유대인의 정서에서 이런 행동은 중요하다: 천사들은 먹지 않는다(예. 토비트12:19; 요세푸스, Antiquities, 1:9:2§197, Philo, On Abraham, 118). 단지 인간만이 먹는다. 누가 복음에서 부활한 주는 부활 전의 주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는 살이요, 뼈요, 육체적 실재요, 진실로 인간이다. 부활한 주는 먹을 뿐만 아니라, 보여질 수도(심지어는 그의 손 발에 있는 상처들조차도), 다 른 사람이 만져볼 수도 있었다. 이 두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예수의 승리에 대해 같은 것을 말한다: 이 는 썩을 수밖에 없는 몸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변화된 것이다; 비록 불멸적 존 재요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지만, 천사처럼 순수한 영적 존재로 변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계속 뼈와 살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24:31); 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몸이 썩을 동안에 만 존재하는 정신의 일시적 잔영도 아니다(지상 생애의 희미한 잔영, 참조 삼상28:8 이하). 고전15장에 서 바울은 이미 이 견해들을 전제하고,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말한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35절) 누가의 대답은 바울과 매우 비슷하다. 다만 누가는 분석적인 대답을 하 고 있을 뿐이다. 부활한 예수를 기독교인의 존재 원형으로 말한다. 눅24장에서 저자는 죽음에 대한 예 수 승리의 성격을 본다: 그것은 그의 제자들이 바라는 승리이기도 하다(요일3:1).

누가24장의 두 번째 강조점은 적어도 누가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는 성찬식의 성격을 명확하게 설명하 는 곳에 나온다. 이 현현을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행전에 나오는 더 광범위한 식사 동기를 배경으로 그것을 파악해야만 한다. 예수는 자주 식사에 참여한다:

(1) 죄인들과 함께(5:29-32; 15:1-2; 19:5-7);

(2) 바리새인들과 함께(7:36-50; 11:37 이하, 14:1 이하);

(3) 제자들과 함께(22:19-20; 29:30; 24:41-43; 행1:4 - 문자적으로는 "누구와 함께 소금을 취한다"인데, 라틴어, 시리아어, 콥틱어 판본에서는 "함께 먹다"로 번역했다; 행10:41);

(4) 무리와 제자들과 함께(9:11-17) 지상의 예수 그리고 일으켜진 예수가 식사하는 장면 중에 3번에 걸 쳐 떡을 떼는 내용이 나온다(9:11-17; 22:19-20; 24:30).

이들 중 첫 번째 눅9:10-17절에서 이야기의 더 이른 요소가 반영되어 나온다. 1:53에서 엘리사벳과 그 의 태중에 있는 요한이 예수를 주로 알아보는 것을 듣고, 마리아는 노래한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 로 배불리셨다." 히브리어에서 이러한 표현은 예언자적 완전을 말하는 용어이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라고 6:21절에서 예수는 말한다. 9:10-17절에서 이 주제를 다시 말하면서, 예수를 배고픔을 채워주는 분으로 말한다. 그는 제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먹인다. 누가는 예수 를 배고픔을 만족시켜주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 이 점을 잘 살펴보면, 누가가 그 사건을 보는 입장을 알 수 있다. 마14:13//막6:31에서는 이 사건이 한적한 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누가에서는 빌립이 다스 리는 지역의 주요 도시인 벳세다에서 일어났다. 그곳은 헤롯이 통치하는 지역으로부터 요단강 반대편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다. 거라사 지역을 말하는 것처럼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어색하다. 왜냐하면 굶주리는 지역으로는 도시 지역보다 한적한 곳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벳세다 지명을 사용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은 "만족하는 곳" 이라는 뜻이다. 9:17절이 "모두가 만족하 였다"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뒤받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는 배고픔을 만족시켜주는 분이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는 떡을 떼는 곳이다(2:42, 46; 20:7; 27:33-36 /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배 장면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포도주 없이 단지 떡(예. Acts of John106-10; Acts of Thomas27. 49-50, 133), 혹은 떡과 소금(예. Pseudo-Clementines, Recong- nitions 4; Homilies 14:7)의 제의적 식사 전 통이 있었다. 이는 성찬식을 말하는 누가의 용어인 것 같다(P. H. Menoud, "The Acts of the Apostles and the Eucharist," in Jesus Christ and the Faith, trans. E. M. Paul [Pittsburgh: Pickwick Press, 1978], 84-106). 그렇다면 성찬식은 누가 공동체를 위해 지상 예수가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만찬을 떡 떼는 식사와 제의적으로 연결한 것이다. 제자들은 이를 통해 순교자 예수를 기념하면서 그의 명령에 복 종한다(22:19). 이러한 식사들은 분명히 메시야적 잔치를 연상시킨다(13:29; 14:15). 이 맥락에서 24:13-33절을 보면 그 식사를 통한 제의적인 행동이 반복될 때 부활이 경험된다. 지상 예수의 식사와 사도행전의 떡을 뗌을 이 이야기는 연결한다.

24:30절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는 "떡을 가지고 축사하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었다." 이 행동은 이전 식사를 떠오르게 한다(9:16; 22:19). 이전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16절), 지금 제자들의 눈이 열려 져 그들은 그를 알아본다(31a; 참. 히6:4에서 "밝아져서"는 회심의 의미이다; 막10:46-52; 요9장). 예수의 죽음으로 중단된 식탁교제는 여기에서, 부활한 예수로 인하여 다시 계속된다. 이후의 제자들은 그를 기 억하면서 이를 계속 행한다(22:19). 독자들로 하여금 성찬의 의미를 깨달게 하고자, 누가는 35절로 그 단락을 끝낸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 라" 더욱이 이 사건은 일으켜진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먹었던 몇 가지 예 중에 하나이다(행1:4; 10:41). 이 이야기는 지상 예수가 자기 제자들과 함께 했던 식사와 이후에 교회 성찬식을 연결할 뿐 아니라, 이 식사는 부활한 주가 함께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는 살아 있고, 떡을 떼는 곳에서 그를 알아 볼 수 있다.

요한복음서와 바울의 이해와 비교해 볼 때, 성찬에 대한 누가의 독특성은 잘 드러난다. 요한복음에서 성찬식은 성육신을 제의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마치 예수의 육체를 통하여 그가 살고 있는 동안에 그 랬던 것처럼, 성찬식을 거행하는 그 물질들(떡, 포도주)을 통해 사람들은 신적 세계와 접촉한다(참조. 요6장). 바울에게서 주의 만찬은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는 시간이다. 이는 이스라엘인들과 유대인들이 유월절 식사에서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참조. 고전11장). 누가는 그 만찬을 지상 예수와 함께 했던 식사의 확장으로 본다. 그래서 부활 후에 제자들은 식사하면서 주의 현존을 경험한다.

누가 24장의 세 번째 핵심은 부활한 주님의 선교 명령이다. 여기에 중요한 세 구성 요소가 있다.

⑴ 그 명령은 24:46-48절에 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 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는 예수 부활 후에 그의 재판 이 다시 열려진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평결을 바꾸도록 사도들은 새로운 증거를 제시한다. 그 새로 운 증거는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그들은 알지 못해서 잘못된 선고를 내렸다(행3:17; 13:27). 그러나 하 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심으로써, 유대인들이 잘못을 범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했다(행2:36).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에게 마음을 바꾸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다(2:38; 3:19; 5:31).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제하여질 것이다(행3:22-23). 증인들은 그들의 번복할 것 을 촉구한다(Allission Trites, The New Testament Concept of Witnes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 129-30).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것이 모든 족속에게로 퍼져나갈 것이다(참조. 행1:8).

⑵ 이 선교명령은 2중의 권위를 갖고 있다.

하나는, 명령자가 권위 있는 말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활절 전에 예수가 고난 후의 부활을 예언했 다고, 이 장에서 두 번이나 말하고 있다. 6b-7절에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천사들이 말한다. 이는 9:22, 44에 나온 예언과 상관된다(참조. 17:25; 18:32-33).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비슷한 주제가 44절에도 나온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누가 22-24장의 일련의 사건은 예수 예언의 성취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누가 시대에는, 이교도이든 유대인이든, 예언이 성 취되면 그 예언자의 권위가 인정되었다. 예수의 말이 성취되었기에, 예수는 권위 있는 참 예언자이다. 이 참 예언자가 명령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46-47절은 단지 성경 예언의 성취로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모든 족속을 향한 선교 로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한다: 이 선교 명령은 모든 복음서에 다 나온다(이 점은 하나님이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 선교 명령의 입지를 강화한다). 예언 성취에 대한 이 이중 강조는 제자들이 세운 교회에 권위를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지상 명령인 마28:16-20은 역시 권위를 가지고 선교를 지시 한다. 그러나 그 권위는 다른 식으로 선교를 표현한다: "모든 권위가 나에게 주어졌다"라고 마태의 예 수가 말한다. 그는 부활과 고양을 통해서 전 우주를 다스린다. 그러나 누가-행전에서는 고양은 나중에 온다(행2:36). 그래서 부활한 그리스도가 예언의 성취라는 권위를 가지고 선교를 지시한다.

⑶ 예수는 따르는 자들에게 단순히 선교를 명할 뿐 아니라, 그 성취까지도 맡긴다. 예수는 증인들에게 두 가지를 준비하라고 한다.

하나는, 증인들은 "위로부터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한다(24:49; 참조. 행1:4-5; 1:8; 2:1 이하). 왜냐하면 신19:15에 근거해서 예수에 대한 증언이 유효하려면, 누가는 증인 둘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 두 증인은 사도들과 성령이다(참조. 행5:32-"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성령도 그러하니라"). 그리고 누가는 하나님이 구속사를 주도하시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에 대해서 사람들이 응답해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능력과 인도하심을 선물로 준다. 선교 지시를 받 아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예수는 첫 번째로 오순절 날에 성령을 선물로 준비한다. 복음 선교의 확 장은 능력받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누가의 기본적인 신학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기까지 예수는 자기 제자들을 떠나지 않는다. 눅 24:5-53절은 부활한 그날 밤에 일어난 예수가 떠나는 장면이다. 누가는 자주 초자연적 존재의 떠남을 묘사한다(1:38; 2:15; 9:33; 24:31; 행10:7; 12:10). 이것은 이방인(Euripides, Orestia, 1496; Virgil, Aeneid, 9:657)과 유대인(창17:22; 35:13; 삿6:21; 13:20; 토비트12:20절 이하; 마카비하3:34) 모두에게 나 타나는 공통 모티브이다. 누가는 이 전형적인 떠남 모티브를 예수 승천을 말하기 위해 사용한다: "저희 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51a)." "하늘로 올리우시니"의 삽입은 행1:2절에서 반복되고, 마가의 긴 결 구(16:19절이하)에 사용되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 아마도 누가는 더 긴 본문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수는 따르는 자들을 축복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았다: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51a)." 이 모습은 시락서50:19-20절에 나오는 대제사장 시몬의 축복과 비슷하다. 부활한 예수는 떠나기 전에 이런 제사장적 행동으로 자기 제자들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둔다(참조. 마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요17:9-19). 제사장 사가랴의 사역으로 복음이 시작된 것처럼, 자기 양떼를 위한 예수의 사역으로 복음은 끝난다(참조. 히2:17; 3:1; 6: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