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웨슬리와 마틴 루터의 성화관


주최: 루터대학교 부설 루터연구소 / 주관 : 한국루터학회
일시와 장소 : 2017년 9월 22일, 중앙루터교회


John Trinkline

장기영

이신건

  

장기영 박사의 발제 요약과 논찬

2017년 정기루터강좌의 논평 요청을 받은 후 강좌의 주제가 “요한 웨슬레와 마르틴 루터의 성화론 비교”인 것과, 발제자가 박사학위논문에서 루터 신학의 입장에서 웨슬리 성결론을 평가한 사실을 알고는 이 강좌에 관심이 생겼다. 논평자 역시 루터와 웨슬리 신학 비교를 박사과정의 연구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논평자는 큰 관심을 가지고 발제원고를 세심하게 읽었고, 또 발제자의 박사학위논문도 일부 읽어보았다. 그러나 논평자가 받은 느낌은 매우 실망스러웠다는 것이다. 루터와 웨슬리 간 어떤 대화를 시도하고 있을까? 어떤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논문을 읽었는데, 기대와 달리 논문의 내용은 웨슬리를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 없는 행위구원론자로 몰아 그의 신학을 비판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발제자는 루터의 제자인 웨슬리를 루터의 대적자로 만들어버렸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논문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점검해보기로 하자. 시간과 지면 제한으로 모든 주제를 다루기보다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웨슬리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

발제자는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 낭독을 듣는 가운데 일어났음을 언급한 것 외에는, 그가 영국 국교회주의나 영국 신비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을 주로 다룬다.

☞ 발제자는 웨슬리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그에게 종교개혁 신학의 실체를 전해준 사람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지나쳐버린다. 웨슬리에 영향 끼친 사람들을 소개함에 있어 발제자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점은 세 가지이다. (1) 웨슬리가 가계를 통해 전달받은 청교도 신학, 루터란 경건주의자(모라비아교도)를 통해 전수받은 루터 신학, 영국국교회 신학 속 종교개혁적 유산 등 웨슬리가 영향받은 종교개혁적 신학의 실체를 거의 소개하지 않는다. (2) 루터나 칼빈, 루터란 경건주의나 청교도주의의 가르침에 존재하는 종교개혁적 요소라 하더라도, 발제자가 나중에 웨슬리에 대해 비난하게 될 주제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지나친다. (3) 웨슬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한 발제자의 선별적 소개는 웨슬리를 개신교적 인물이 아닌 가톨릭적 인물로 제시하려는 논문의 전반적 방향과 궤를 같이 한다.

인간의 전적 타락

발제자는, 루터는 인간의 전적타락을 가르쳤으나 웨슬리는 선행은총을 통해 완화된 전적타락 교리를 가르쳤다는 주장으로 두 신학자를 구분한다.

☞ 웨슬리의 선행은총 개념이 전적타락 교리를 완화시켰다는 발제자의 주장은 옳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는 말씀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구원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선행은총)의 혜택을 크게 다섯 가지로 설명했다. (1)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제한된 지식, (2) 도덕법에 대한 이해, (3) 양심의 기능, (4)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어느 정도의 의지의 자유, (5) 그리고 이 모든 혜택에 기초해 인간의 불의를 제지하고 악함을 억제하는 효과이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께서 타락 후 인간에게 이러한 혜택을 베푸심을 부인했는가? 그렇지 않다. 웨슬리가 말한 선행은총의 혜택 중 (4) 인간의 의지의 자유의 회복을 제외한 다른 요소는 루터 자신이 이미 가르친 것들이다. 따라서 루터는 인간의 전적타락을 가르쳤는데 웨슬리는 부정했다는 식의 구분은 잘못된 것이다.

발제자의 오해는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에 붙은 “전적”이라는 용어에서 발생한다. 루터에게서든 웨슬리에게서든 “전적”이라는 용어는 타락의 “범위”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타락의 “정도”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전적 타락이란 모든 사람이 악하고, 한 사람 속에도 죄에 오염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의미이지, 모든 사람이 더 악할 수 없을 만큼 악하고, 한 사람 속 모든 기능도 최악으로 부패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타락 이후에도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보편적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시고, 그 은혜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어느 정도 완화한다고 가르친 점에서는 루터와 웨슬리가 차이가 없다.

인간의 본성

발제자는 루터가 타락 전이든 후든, 저주 아래의 상태든 구원 받은 상태든 인간 본성을 하나의 통합적 실체로 제시한 데 비해,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본성을 세 가지(정치적, 자연적, 도덕적)로 구분한 후 타락이 인간본성에 끼친 영향을 제한적으로 설명했다(정치적, 자연적 형상은 부분적 훼손, 도덕적 형상은 상실)고 주장한다.

☞ 발제자가 주장한 대로 루터가 웨슬리처럼 인간 본성을 명시적으로 세 범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루터 역시 타락으로 인간은 원의(原義)를 상실했고(도덕적 형상), 이성은 여전히 활동하나 오류와 기만에 취약하게 되었고 의지는 바르게 기능하지 못하며(자연적 형상), 생태적 질서와 환경이 악영향을 받았다(정치적 형상)고 설명하는데, 웨슬리의 설명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인간을 통합적으로 설명했느냐, 세분화해 설명했느냐로 루터와 웨슬리를 구분하기는 힘들다.

성화에서의 진전 가능성

발제자는, 루터가 죄는 인간 본성 깊은 곳에 내재하기에 죄인은 개선이나 교정이 불가능하고, 희망은 오직 옛 자아 전체가 죽음에 처하는 것(그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짐)뿐이라고 가르쳤다고 설명한다. 이에 비해 웨슬리는 죄를 죄의 책임, 죄의 능력, 죄의 뿌리로 구분해 칭의, 중생, 완전성화로 각각 해결된다고 주장함으로 성화에서의 진전 가능성을 위한 논리적 토대와 신자가 노력해야 할 근거를 마련했다고 설명한다.

☞ 발제자는 신자는 동시에 전적인 죄인이자 전적인 의인이라는 루터의 가르침과, 성화에서의 진전을 가르친 웨슬리의 차이점을 바르게 지적했다. 하지만 루터 역시 웨슬리처럼 신앙의 성장에 따른 성화에서의 진전을 가르쳤기에, 루터의 성화론을 설명할 때는 (1)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한 성화와 (2) 신자의 실제적 변화로서의 성화 사이를 구분해서 다루어야 한다.

성화의 정도에 차이(단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두 독일 경건주의운동 그룹 사이에서 벌어진 Buβkampf 논쟁이 유명하다. 아우구스 헤르만 프랑케는 성경의 패턴을 따라 신자를 자녀와 청년과 아비의 세 부류(요일2:12-14)로 나누어 성화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음을 가르쳤다. 프랑케가 가르친 죄인의 회심 과정의 첫 번째는 Buβkampf(회개의 노력)이며, 그 다음은 Durchbruch(구원에 의한 획기적 변화)이다. 이에 비해 니콜라우스 루디비히 폰 친첸도르프는 사람을 죽은 자와 각성한 자 두 부류로 나눈 후, 각성 이후 성화에서의 성장 가능성을 부인했다. 친첸도르프는 자신의 회심이 Buβkampf 경험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Buβkampf 강조로 사람의 주의를 율법이나 죄책 같이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되고, 회심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속죄 교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가 성화의 비결이라는 친첸도르프의 주장은 루터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한 성화의 교리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루터에게서 신자는 동시에 전적인 죄인이자 전적인 의인이라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한 성화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다. 이 관점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가 나뉘어질 수 없기에, 칭의든 성화든 그리스도의 의 전체가 전가됨으로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프랑케의 주장처럼 루터는 신앙에는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며, 이로 인해 신자가 죄를 이기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음을 인정했다. Buβkampf 패턴 안에서 일어난 루터 자신의 경험 역시 Buβkampf가 없는 회심에 대한 친첸도르프의 주장과 달랐다. 이처럼 루터가 신자의 실제적 변화로서의 성화를 언급할 때는 그 입장이 웨슬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발제자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한 성화는 지지하지만 성화에서의 진전 가능성에는 반대하는 입장에서 루터를 옹호하고 웨슬리에 반대했으나, 발제자의 주장과 달리, 루터는 신자 자신의 실제적 변화로서의 성화에 관해, 신앙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그로 인해 성화의 진전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 웨슬리에게 동의했을 것이다.

발제자는 “적절한 의미의 죄”(율법에 대한 고의적 위반)와 “부적절한 의미의 죄”(고의성 없이 무지와 실수 등 연약성에 의한 위반)를 구분한 뒤 죄를 전자와 관련시키면서도, 후자 역시 그리스도의 속죄를 필요로 한다는 웨슬리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죄가 아니라면 왜 속죄가 필요한가?”라는 이유에서이다.
☞ 발제자가 지적한 대로, 고의성 유무에 따라 웨슬리가 “적절한 의미의 죄”와 “부적절한 의미의 죄” 개념을 구분한 것은 사실이다. 웨슬리는 둘 사이를 구분한 후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충만한 사람도 고의성 없이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잘못까지 죄라고 부르고 싶으면 부르십시오. 나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습니다 … 그러나 그것을 죄로 부르지 않으려는 사람이라도, 결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중보자 없이 하나님의 무한한 공의 앞에 설 수 있는 상태인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자신이 최악으로 무지하거나 최고로 오만하고 외람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라고 부르려는 사람은, 자신이 죄로 불러야 마땅한 죄와 그렇지 않은 결함을 혼동하고 있지 않은지 경계해야 합니다 ... 만일 모든 것을 차별 없이 죄라고 부른다면 어떻게 전자와 후자를 구별하겠습니까?"

웨슬리는 엄격한 의미로는 인간의 비고의적 죄(unvoluntary sins)나 부지중에 지은 죄(unconscious sins)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 앞에 죄가 되며 그리스도의 속죄를 필요로 함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의적 죄와 비고의적 실수를 구분한 이유는, 성경도 둘 사이를 구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웨슬리는 성경이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 부르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한 노아(창6:9)나 하나님께서 친히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칭하신 욥(욥1:1,8)을 하나님의 성화시키시는 은혜를 입은 자로 설명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비고의적 실수와 인간의 연약성까지 초월해 아무런 실수와 흠결조차 없었기에 “순전”하고 “완전”한 자로 칭했는가? 웨슬리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먼저, 성경이 그들을 “완전한 자” 혹은 “순전한 자”로 부를 때, 그 완전함과 순결함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의적 위반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들이 하나님 절대적 기준에 전혀 저촉됨이 없이 어떤 부족함이나 실수도 없이 완벽하고 정확하게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하다, 순전하다고 평가하신 이유는, 그들이 “신실한 의도와 마음을 다하는 사랑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려는 근면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라는 설명한다. 그들도 무지와 실수와 연약성을 피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의 엄격한 기준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있었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에 기초해 그들을 판단하심으로 그들을 온전하고 순전한 자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만약 율법의 고의적 위반과 비고의적 실수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전적으로 동일시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성경이 “완전하다”, “순전하다”고 평가한 사람은 죄짓고 살면서도 완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게 되면 성경적 완전론은 상실되고, 성경이 완전하다고 표현한 사람도 죄를 피할 길이 없었다는, 성결에 대한 부정만 남게 된다. 실제로 완전성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인간은 실수와 연약성을 가졌는데 어떻게 완전할 수 있느냐’는 논리였고, 웨슬리는 이를 정확히 간파해 ‘성경은 실수와 연약성을 가진 사람에게도 완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며 완전성화를 옹호하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의 고의적 죄와 비고의적 실수의 구분은 완전성화론과도 연결된 중요한 구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인간의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모두 죄악시하시며, 인간의 연약성도 죄가 되므로 그 연약성을 초월해 온전해지라고 요구하시는가? 웨슬리는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보았다.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말씀하실 때의 “온전함” 역시 어떤 비고의적 실수와 인간적 연약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함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런 해석은 성경이 요구하는 완전보다 “완전의 기준을 훨씬 더 높여놓는” 중대한 오류이기 때문이다.

은혜

발제자는 루터에게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자애로운 성향 그 자체로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을 지칭하지 사람에게 주입되거나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목적, 다른 시간, 다른 분량으로 주시는 다양한 은혜를 가르쳤다고 설명한다(괄호 안 영어 표현에 유의).

(1) 선행은총: 웨슬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전적타락 상태를 완화시키셨기에 “이미 받은 선행은총과 협력하는 것이 그 이후의 은혜를 받도록 만든다”(cause you to receive)라는 표현으로 선행은총을 설명한다 --> (2) 죄를 깨닫게 하는 은혜: 회개로 인도함, “이 은혜와 협력하면 그 결과”(yields) --> (3) 칭의의 은혜: 초기적 칭의를 가져옴, “이 은혜와 협력하면 그 결과”(bring) --> (4) 성화의 은혜: “이 은혜와 협력하면 그 결과”(results in) --> (5) 완전성화: “이 은혜와 협력하면 하나님께서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rewards with) --> (6) 영화의 은혜(최종적 구원,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라고 설명한다.

☞ 발제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타자적인 것이냐,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느냐로 루터와 웨슬리를 구분하지만, 이러한 구분으로는 루터와 웨슬리를 구분하기 힘들다. 웨슬리 역시 은혜의 근본적인 개념을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가지시는 거룩한 사랑으로 설명한다. 그것이 인간에게 경험될 때 다양한 형태의 은혜로 경험됨을 말했을 뿐이다. 그런가 하면 루터 역시 은혜의 개념을 더 포괄적으로 사용할 때는,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율법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 의롭다 칭하시는 은혜,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시거나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은혜 등 다양한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점에서 루터는 은혜를 하나님의 자애로운 성향으로 여겼으나, 웨슬리는 인간이 소유하는 실체로 여겼다는 발제자의 주장은 지나친 단순화로 보인다.

☞ 발제자의 설명에서 논평자가 동의하기 힘든 또하나의 주장은, 웨슬리 구원론에서 은총의 연결고리를 설명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발제자는 cause, yield, bring, result in, reward with 등의 단어를 사용해 마치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 주심의 유무를 결정짓는 열쇠인 것처럼 설명하는데, 이는 웨슬리를 가톨릭적으로 해석하는 심각한 오류이다.

케네스 콜린스에 따르면 웨슬리가 설명한 구원의 과정에는 (1) 율법에 대한 순종이 고려되지 않고 믿음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의 은혜를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율법 중지”(law pauses)의 순간이 있고, (2) 그 전후로 하나님께서 주실 더 큰 은혜를 기다리거나, 이미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가운데 신자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힘써야 하는 “율법 계속”(law continues)의 과정이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전자, 즉 율법 중지의 순간에 관해 웨슬리는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수동적으로 받는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은혜를 부어주실지의 여부와 주시는 은혜의 내용, 그 시기를 주권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설명한 루터의 강조점과 매우 유사하다.

웨슬리는 “율법 계속”의 과정을 설명할 때조차도, 인간의 의지적 노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범위를 넘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웨슬리의 선행은총 개념을 공로사상으로 변질시키지 않으려면 웨슬리에게 신인협력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매우 제한된 의미로,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범위 내에서라는 전제 하에 사용해야 한다. 동시에 웨슬리는 인간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은혜의 결과까지 완벽한 형태로 주어진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네 가지 밭 비유를 설명하면서 웨슬리는, 비록 하나님의 은혜 안에는 모든 충만함의 비결이 담겨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죄와 무지와 경박성으로 인해 은혜를 거부하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일부만 수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를 경계해 자신에게서 은혜의 방해물을 최대한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의 “씨앗이 동일”하고 씨뿌리는 자가 그리스도시라는 점이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의 상태가 동일하지 못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웨슬리의 응답은,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은혜의 수용 여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성령과 은혜를 “질식시키거나”, “저항하지” 말고, 은혜에 “순응하고”, “활용하고”, “향상시키라”는 것이 웨슬리의 강조점이다. 이처럼 웨슬리의 강조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있고, 인간의 책임에 대한 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지 말고 순응해야 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케네스 콜린스는 웨슬리의 선행은총을 카톨릭이나 동방 전통에서의 신인협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인간의 공로 없이 하나님의 활동만을 강조하는 개신교(바울) 입장”이라는 큰 틀에서 읽어야 한다고 정확히 말한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칭의

발제자는, 루터는 칭의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로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이중 전가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 데 비해, 웨슬리는 우리 죄의 전가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부인했다고 설명함으로 루터와 웨슬리의 차이를 말한다.

☞ 발제자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그렇지 않다. 이는 중기 웨슬리(1738-1765)와 후기 웨슬리(1765-1791) 사이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에 대해 어조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중기 웨슬리는 이중 전가 교리에 반대해 칼빈주의자 제임스 허비와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는데 그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대속의 자격을 얻으셨다. (2) 칭의는 본질상 죄 용서이므로, 전가된 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3) 전가된 의 때문에 하나님께서 신자의 죄를 보시지 않는다는 주장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된다. (4) 전가교리는 오직 믿음만 요구하는 은혜 언약과 완전한 의를 요구하는 행위 언약을 뒤섞어, 복음이 마치 행위 계약의 성취를 돕는 하나님의 도움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복음은 온전한 행위가 없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주장에서 로마서 4장 5-8절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이 구절에서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행함의 의을 전가 받아 그리스도처럼 온전한 행위를 한 것으로 인정받기에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전가된 온전한 행위”같은 것 없이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으며 ...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심”으로 구원 받은 자가 된다. 이처럼 웨슬리는 이중 전가가 아니라, 우리 죄의 전가만으로 죄 용서를 통한 칭의를 주장한다.

후기 웨슬리는 개신교 내 다른 전통과의 화해를 위해 칭의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설명하는데, 이 때에도 자신의 방식으로 전가를 가르쳤다. 이중 전가 교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 수동적 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를 구분한 데 비해, 웨슬리는 설교 “우리의 의가 되신 주”(1765)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의는 인위적으로 나눌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온전한 삶과 사역 모두가 신자를 의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의 것이 된다”고 설명했다. 웨슬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는, 신자가 자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한 삶과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 용납되었음을 의미한다.

웨슬리가 이중전가 교리를 반대한 것은, 그런 설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그 표현 자체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 역시 신자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할 필요성을 경시하는 율법무용론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신자라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받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 받았기 때문에 죄를 짓더라도 완전한 순종을 한 것으로 인정받는다면, 신자들은 분명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구원에는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왜곡된 신앙을 갖게 될 수 있다. 이에 반대해 웨슬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를 용서받음으로 죄인은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신자 스스로의 의무라고 가르쳤다.

성화

발제자는 루터에게 성화란 그리스도 안에서와 미래의 소망 안에서는 완전하지만, 현재 세상 속에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완전성화를 부인했으나, 웨슬리는 칭의 받고 중생한 신자에게 남아있는 죄의 뿌리는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 중 신자가 죄에 대하여 죽고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지는 완전성화의 은혜로 해결됨을 가르쳤다는 설명으로, 루터와 웨슬리를 대조한다.

☞ 루터가 완전성화론을 반대한 것은, 완전성화에 대한 주장을 이 세상에서 영화(glorification)의 가능성 주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는 웨슬리 당시에도 매우 빈번했기에 웨슬리는 설교 “완전에 대하여”에서 완전성화의 의미를 “부패하기 쉬운 몸 안에 살고 있는 동안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전”으로 제한했다.

제한된 의미의 완전성화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타락의 영향으로 인간의 지적 능력이 매우 제한되자 사람은 더 이상 타락 전과 같은 방대한 지식과 올바른 판단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완전성화를 경험해 그 마음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지식의 한계에 매여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의 뜻을 100% 이해하지 못한다. 100% 이해하지 못하는 데 100%의 순종이 가능하겠는가? 그 외에도 인간의 감정은 타락으로 죽음의 선고가 내려진 불완전한 육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의 의지 역시 불완전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적, 감정적, 의지적 기능이 불완전한데, 부족하게 아는 하나님의 뜻조차도 온전히 성취할 수 있는가? 비록 그 마음의 의도가 순수하고 사랑으로 가득해져 온전한 순종을 원한다 하더라도, 순수한 의도와 바람이 완전한 실천(perfect performance)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점에서 웨슬리는 완전성화를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에 반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완전성화가 아닌 것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하나님께만 가능한 “절대적 완전”, 천사들같이 무결한 완전, “타락 전 아담과 같은 완전”, 다시 타락할 수 없고 모든 연약성에서도 자유로워지는 “영화(glorification) 단계의 완전”, 고의적 죄뿐만 아니라 비고의적 죄로부터도 벗어나는 “무죄적 완전”(sinless perfection), 육체적 본능이나 욕구가 사라지는 완전, 다시 유혹도 받지 않고 과오나 실수도 없는 완전, 다시 잃어버릴 수 없는 완전, 더 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식, 판단, 기억, 봉사 등 인간의 기능이 완벽해지는 완전 등이다. 웨슬리는 완전성화를 타락이 초래한 인간의 유한성과 연약성이라는 한계에 영향을 받는 제한적 완전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인간 이해에 있어 루터와 웨슬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공통점을 지닌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웨슬리는 성령의 정결케 하심과 능력부음으로, 비록 신자의 실천(performance)이 타락 전 아담같이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그 내면이 순수한 의도와 온전한 사랑으로 변화되었기에, 하나님의 율법의 엄격성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명령은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핑계로 하나님의 율법을 처음부터 성취불가능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 가능한 율법의 범위를 찾고자 노력한 것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가능케 하시는 신자의 거룩함의 범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은 채 무분별하게 ‘세상에서 우리가 거룩할 수 있느냐?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자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가능한 거룩함의 정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최종적 칭의와 성화

발제자는, 루터는 a. 한 종류의 칭의만을 가르쳤고, b. 칭의를 구원 자체로 여겼으며, c. 칭의 시 구원은 최종적이고 확실하므로 칭의 이후 성화의 여부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웨슬리는 a. 칭의를 초기적 칭의와 최종적 칭의 두 종류로 구분한 후 b. 초기적 칭의를 구원 자체로 여기기보다 성화를 위한 과정으로 여겼으며, c. 최종적 칭의를 위해 완전성화가 필요함을 가르쳤다고 주장한 후, 웨슬리의 성화론에 대해 다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1. 구원 자체인 칭의를 둘로 찢어 그 둘 사이에 인간의 노력에 의한 성화를 끼워넣음: 웨슬리는 초기적 칭의 후에 최종 칭의를 받으려면 많은 일을 해야한다고 가르치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단순성, 그 위로, 완전함을 불완전한 인간의 행위와 바꾸어버린다.

2. 오직 믿음이 아니라, 신자가 노력해 성화를 이루어야 구원 받는다는 행위구원론: “주를 뵙기”(히 12:14) 위해 완전성화가 필요하다면, 믿음으로의 구원(salvation by faith)은 부인된다. 웨슬리에 의하면 “이미 받은 빛에 따라 행하고”, “받은 은혜의 불꽃을 북돋움으로” 완전성화를 위해 노력할 책임이 신자에게 있으므로, 신자의 노력이 완전성화와 최종구원을 가져온다. 구원에 인간의 행위가 개입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만으로는 우리의 구원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기에,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한다.

☞ 발제자는 웨슬리의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1) 웨슬리는 칭의 받고 중생한사람을 이미 구원받은 자로 묘사한다. “신자 안에 있는 죄”라는 설교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심지어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고전 3:1-3)라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았음을 인정한다. 설교 “신자의 회개”에서는 칭의, 중생은 이미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온 것이며, 더이상 정죄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2) 웨슬리는 루터처럼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임을 주장하지, 신앙과 함께 행위를 주장하지 않는다. 웨슬리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조건인 신앙과, 그보다 부차적으로 필요한 회개 및 그 열매들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회개와 그 열매가 칭의 전에도 필요하지만, 둘 중 어떤 것도 신앙과 ‘같은 의미’(in the same sense) 또는 ‘같은 정도’(in the same degree)로 필요한 것은 아님을 인정합니다. 신앙과 ‘같은 정도’로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는, 사람이 믿는 순간 그는 (기독교적 의미 그대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죄가 제거되며, ‘그의 신앙이 의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신앙만이 의롭게 하지, 회개가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며, 외적 행위가 의롭게 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칭의에서 회개와 행위는 믿음과 같은 정도로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회개와 행위가 신앙과 ‘같은 의미’로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는, 그것이 신앙만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칭의와 관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칭의를 위해 직접적으로 필요하지만, 회개는 믿음을 자라게 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필요합니다. 회개의 열매는 회개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에서 더 간접적으로 필요합니다."

웨슬리는 설교 “성경적 구원의 길”(1765)에서 다시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임을 단언합니다. 그러나 신앙 전에 회개는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합니다. 만약 기회가 허락한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어떻습니까? 의심할 바 없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필요합니다.” 이처럼 웨슬리는 성경에서 신앙 이외의 것들에 대한 요구는,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는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으로서, 만약 시간과 상황이 허락됨에도 행치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불순종,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의 표현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믿음은 언제나 요구되는 것으로서, 다른 모든 것이 있어도 믿음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한다.

(3) 웨슬리에게서 초기적 칭의에서든 최종적 칭의에서든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 뿐이다. 단지 최종적 칭의에서 행위는 오직 그 행위자의 믿음이 참 믿음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서 요구될 뿐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씀하면서도, 심판은 행위에 따라 내려진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행위가 구원의 유일한 조건인 참 신앙을 입증하는 표식이 된다는 의미이다.

웨슬리가 초기적 칭의를 위해서는 오직 믿음만 필요하지만, 최종적 칭의에서는 성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초기적 칭의와 최종적 칭의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참임을 입증할 삶의 열매가 전혀 없다면, 그것은 그의 믿음이 거짓임을 드러낼 뿐이다. 이것은 루터 역시 동일하게 강조한 내용이다. 루터가 “옳은 일을 행하고 그 열매로 이를 나타내며 이웃에 대해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다. 그러나 이웃에게 옳은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가짜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단언했을 때, 그는 옳은 일을 행하고 그 열매를 나타내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한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앙을 입증하는 증거로 말한 것인가?
최종적 칭의에서 성화가 필요하다는 웨슬리의 가르침은, 발제자의 주장처럼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유일한 조건인 참 믿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성화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웨슬리의 최종 칭의 교리를 반대하지만, 최종 칭의 교리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의 교리이다. 만약 최종 칭의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미 칭의 받았는데 왜 주님은 불필요한 최후의 심판이라는 과정을 덧붙이시느냐고 주님께 항변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완전성화와 광신주의

발제자는 완전성화 때 죄가 깨끗이 씻겼다는 성령의 증거가 주어진다는 웨슬리의 주장을,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역보다 개인의 주관적 체험에서 확신의 근거를 찾는 광신주의로 비난한다. 발제자는 웨슬리에게 완전성화란 죄에 대해 죽었다는 느낌, 하나님과 사람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느낌이며, 웨슬리가 “성령의 증거”(Witness of the Spirit)라고 부른 것도 “우리 자신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위로와 확신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객관적이고 외적인 실체가 아닌 자신의 주관적이고 내적인 느낌에 두는 사람은, 불확실성을 벗어날 수 없고, 그리스도는 구원자시라는 영예를 빼앗긴다고 말한다.

☞ 발제자는 “성령의 증거”와 관련해 여러 면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1) “성령의 증거” 교리는 웨슬리가 만든 교리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교리이다. 로마서 8장 15-16절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한다.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심에 두고 있다. 성령의 증거가 사랑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부르는 토대이다.

(2) 성령의 증거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객관적이고 외적인 실체와 아무 관계가 없는 주관주의가 아니다.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는 영혼에 주어지는 내적 인상으로 …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으며, 내 죄는 깨끗이 씻겼고, 심지어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십니다” 라고 설명함으로, 성령의 증거를 그리스도의 객관적, 외적 실체와 분명히 연결시킨다. 이에 비해 웨슬리가 개인의 주관적 체험으로 설명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이다. 웨슬리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라는 말씀에서 “성령의 증거”와 “우리 영의 증거”를 구분했다. 그는 “우리 영의 증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사람은 성경적 표징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누군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아’ 거룩한 성품과 삶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14). 성경말씀은 이 사실을 분명히 확증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따라서 만약 자신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쉽게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의 증거”는 자신 속에 생긴 변화에 대한 자각으로서 그리스도인의 “확신의 주관적 측면”이라면, 성령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토대를 둔 “그리스도인의 확신의 객관적 토대”이다.

(3) 발제자는 성령의 증거를 신자의 느낌으로 축소시킨 결과, 신자의 확신의 근거를 성령의 증거에 두면 불확실성을 피할 수 없다는 이상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웨슬리의 설명은 발제자의 주장과 정반대이다. 웨슬리에게 “성령의 증거”와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 중 신자의 위로와 확신을 위해 근본적인 것은 전자이다. 콜린스는 그 이유를, “우리는 심각한 유혹으로 맹공격을 받거나 무거운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 영의 간접 증거를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성령의 직접 증거는 분명하게 빛난다. 성령의 직접 증거는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이나 잘못된 추론에 영향 받지 않는다 … 성령의 증거가 없다면 사람은 확신을 위해 증거나 추론, 스스로의 행위 같은 것을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고 설명한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누구든 성령의 직접 증거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사실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는 것” 과 같다고 말한다. 웨슬리의 성령의 증거 교리는 사실상 종교개혁적 구원관의 핵심으로서,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는 사상이다. 발제자가 종교개혁 은총관의 성령론적 표현인 웨슬리의 성령의 증거 교리를 인간의 주관주의로 비난한 것은, 웨슬리의 성령의 증거 교리를 완전히 거꾸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루터 역시 문자와 영의 개념을 통해, 문자로 쓰여진 율법이나 복음은 인간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성령의 영감에 의해 인간의 마음에 전달된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 됨을 가르쳤다. 루터가 가르친 “성령의 영감 또는 계시”와 웨슬리가 가르친 “성령의 증거”는 상당히 유사성을 가진 교리이다.

(4) 발제자는 웨슬리의 “성령의 증거” 교리를 완전성화의 체험과만 연결시키지만, 사실상 성령의 증거는 완전성화만이 아니라, 칭의 중생과도 관련된다. 웨슬리 당시에도 일부 사람들은 오직 완전성화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 성령의 증거를 갖는다고 오해했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많은 사람이 주장하듯) 누군가가 성령의 증거는 오직 가장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의 대답은 ‘사도는 그런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속한 것입니다’라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를 모든 신자의 특권, 즉 칭의받고 중생한 신자의 특권으로 말한다.

완전성화와 이웃사랑

발제자는 웨슬리가 성화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쳤다고 오해했기에, 구원의 방정식에 선행이 끼어들면 순수하게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없고, 이웃은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이기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론적 수단으로 전락한다고 주장한다.

☞ 웨슬리에게 완전성화의 은혜란, 인간의 노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자기중심성, 죄된 욕망과 뒤섞인 불순한 사랑을, 성령께서 순수한 사랑으로 바꾸시는 은혜이다.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게”(행 4:32) 된 사건은, 완전성화가 순수한 사랑의 비결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발제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진 순수한 사랑을, 인간의 공로 시스템 속에서의 선행의 노력과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성화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다. 이웃 사랑 역시 구원의 조건이 아닌 열매다. 웨슬리에게서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A)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B),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C) 사이의 관계는, A의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에 대해 원인적이고, B의 사랑은 A의 사랑에 대하여 응답적이며, C의 사랑은 A와 B의 사랑 모두에 대해 결과적이다.

시대 분석 및 총평

발제자는 루터 시대의 신학적 문제가 율법주의적 행위구원 문제였다면, 웨슬리 시대의 주된 문제는 율법무용론적 기독교였음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말로써, 당시의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웨슬리의 의도는 바람직했으나 그 방법으로 선택한 성화론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 논평자는 발제자의 시대 분석은 적절했으나, 그 분석을 루터와 웨슬리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로 연결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발제자가 논문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에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양면적 강조점으로,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요소와,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는 요소가 함께 있다. 발제자의 분석대로 루터 시대의 문제는 펠라기우스주의에 치우친 중세 가톨릭교회의 행위구원론이었고, 루터는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 어거스틴 신학을 토대로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와 강력한 신중심적 구원론을 제시했다. 중세 가톨릭은 그 두 요소 중에서 인간의 역할을 극대화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제거해버렸다면, 루터는 그 오류에 공격하기 위해 그와는 정반대의 요소인 하나님의 주권을 집중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해 루터는 종교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고,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믿음에 의해 가능하다는 성경의 진리를 교회 안에 회복시킬 수 있었다. 루터의 천재성은 의도적이고 전술적으로 성경 속에서 상대방의 극단과 정반대쪽 극단에 자신의 신학적 위치를 잡아 그 극단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위해 하나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성경의 양면성 중에서 최고로 하나님의 주권 쪽 우익에 있었던 것이지,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중앙에 위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세 가톨릭의 인간 중심적 극단성을 깨뜨린 루터의 무기는 신중심적 극단성이었으며, 그 점에서 루터 신학은 전술적으로 신중심적 요소의 극우 쪽에 치우쳐있었다.

웨슬리 시대 영국국교회 신학은 변화무쌍한 이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율법주의와 율법무용론이 혼재된 복잡한 상황이었다. 개신교인은 이신칭의 교리를 믿었으나 성화를 필요성을 경시했고, 가톨릭교도는 성화를 강조했으나 성화를 칭의의 조건으로 삼는 행위구원론에 빠져있었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를 모두 강조하되, 칭의가 성화를 일으킨다고 가르침으로 둘 사이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아래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어떻게 책임적인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지를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이로써 웨슬리는 한 때 은총과 책임의 스펙트럼 위에서 가톨릭쪽 극좌와는 반대쪽 극우에 위치했던 개신교를 성경적 균형이라는 중심적 위치로 이동시켰다.

발제자의 성경과 신학에 관한 이해는 16세기 루터가 가톨릭의 극좌를 무너뜨리려 의도적으로 선택한 신학적 극우의 한 지점에서 굳어져 화석화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곳을 개신교 신학 스펙트럼의 중심으로 여기면서 그보다 좌측에 위치한 웨슬리의 균형적 입장조차 극좌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지금도 여전히 가톨릭적 율법주의만을 기독교의 주적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행위에 대한 성경적 강조조차 율법주의로 공격하려는 것은 아닌가? 발제자는 루터의 화석이 아닌 살아있는 루터의 후예로서, 루터 신학이 있었기에 그것을 토대삼아 루터의 후예들이 이룬 개신교 신학을, 펠라기우스적, 로마 가톨릭적 극좌로의 회귀로 오해하지 말고, 성경적 균형의 회복과 개신교 신학의 발전으로 인정할 마음은 없는가?

 

이신건 박사의 견해

루터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함으로써 행위는 철저히 무시했는가? 루터가 지나치게 칭의와 믿음만을 강조하고 성화와 선행은 철저히 무시했는가? 이 점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수용된 루터-바울적 칭의 신앙은 인간의 협력과 활동을 무력하게 만들고, 세상과 역사와 창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완전히 무시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 결과로 오늘 한국 교회는 온갖 부패와 타락의 늪에 빠져 버리지 않았는가?
이런 상황에서 루터의 입장과 책임을 다시금 냉철히 분석하고 반성해야 할 루터교회 신학자가 다시금 루터를 팔아서 복음을 오용하는 태도(“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칭의”)에 나는 분개한다. 그는 불완전한 루터 신학의 포로, 잘못된 루터 해석의 포로, 잘못된 복음 이해의 포로가 된 불쌍한 신학자가 아닌가? 그에 대한 나의 반론을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써 본다.

클라인은 웨슬리가 “구원 자체인 칭의를 둘로 찢어 그 둘 사이에 인간의 노력에 의한 성화를 끼워 넣었다.”고 비판하지만, 내 생각에는 루터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칭의에 제한하고 칭의를 하나님의 죄 용서에 제한함으로써 구원을 아주 협소하게 이해하였고, 그래서 복음의 무력화와 그리스도인의 무능화를 초래하지 않았는지 의심하게 된다. “웨슬리의 구원론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만으로는 우리의 구원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고 말하는 클라인의 주장에서도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클라인도 구원을 칭의에 제한함으로써 복음의 능력과 범위를 현저히 축소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완성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십자가 이전의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물론이고 십자가 이후의 하나님의 구원 활동, 예컨대 부활과 성령 강림, 재림과 새 창조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2. 웨슬리는 칭의를 구원의 전부로 보지 않고 시작으로 보았다. 웨슬리에게서 칭의는 성화를 목표한다. 그러나 성화는 분명히 칭의 안에서 이미 시작한다. 이를 웨슬리는 초기의 성화라고 불렀고, 초기의 성화는 완전한 성화를 목표한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는 초기의 성화에서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보았다. 하지만 성화의 과정과 목표에서 볼 때, 칭의와 성화는 다르다고 웨슬리는 보았다.

웨슬리에 따르면 칭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이다. 하지만 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일이다. 칭의는 상대적인 변화를 포함하지만, 성화는 참된 변화를 포함한다. 칭의는 본질적으로 객관적인 변화이지만, 성화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변화이다. 칭의는 죄책으로부터 해방하지만, 성화는 죄의 세력과 죄의 뿌리로부터 해방한다.

3. 클라인은 “웨슬리 성화론의 심각한 문제는 구원에 인간의 행위가 개입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구원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하고 차단하는가? 분명히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 있지만, 칭의를 수용하는 믿음은 분명히 인간의 행위가 아닌가? 만약 극단적 칼빈주의자(hyper-calvinist)처럼 믿음도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구원은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의 행위가 되는 셈이며, 따라서 인간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 격하되는 셈이다. 따라서 구원론도 완전히 숙명론(예정론?!)으로 대체되는 셈이다. 만약 은혜를 수용하는 것도 오직 은혜의 활동이라면, 인간은 완전히 은총의 꼭두가시로 변하는 셈이다.

루터교회 신학자 틸리히의 말대로 “인간은 하나님에게 용납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납되었다는 사실을 용납해야 한다.” 역시 루터교회 신학자 푈만의 말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일어나지만, 구원은 인간이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전제한다.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예수가 말했듯이, 큰 용서를 받은 자가 작은 용서를 실천하지 않을 경우에는 용서는 철회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예수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가 단지 구원(사죄)의 결과나 열매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구원(사죄)의 전제가 되고 있다. 마지막 심판의 비유에서도 심판자는 오직 인간의 행위만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