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와 웨슬리안은 이단인가?

정이철 목사


이신건 박사


장기영 박사

  

정이철

과연 웨슬리에게는 신학적 오류가 없었던 것일까?

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임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게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다는 성경적인 사실을 종교개혁자들은 다시 확인하였다.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의가 아닌,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낯설은 의’, 즉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칭의를 얻고 구원에 이르게 됨을 성경의 가르침을 종교개혁자들은 다시 선포하였다.

성경은 구원을 얻음에 있어 우리의 노력과 행위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나기 전에 이 진리를 훼손하는 이단이 등장했다. 갈라디아에 침투했던 이단은 그리스도를 믿음 외에 행위와 삶의 내용이 동시에 칭의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다. 얼핏 생각하면 그 신학이 더 옳게 느껴진다. 그리스도를 믿고,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행위의 열매도 애써서 만들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give and take', 또는 ‘상호주의’를 상식으로 여기는 우리 인간의 마음에 더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침투한 그 이단의 가르침을 저주받을 '다른 복음'이라고 판정하였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그리고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개’라고도 하였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빌 3:2)

그리고 삶의 열매, 즉 믿음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져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오직 그리스도를 믿게하심으로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성경이 가장 중시하는 진리이고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여기에 대해 딴 소리를 하는 사람은 신학자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니고 신자도 아니다.

그러면 존 웨슬리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웨슬리가 한 번이라도 그리스도를 믿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 결코 죄인의 그 무슨 행위로도 발생하지 못하는 죄인에게는 '낯설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칭의와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 적이 있었을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음으로 인해 칭의와 구원이 완성되었고, 더 이상의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웨슬리가 강력하게 가르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지금까지 나는 그런 말 못들었다. 

웨슬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더불어 인간의 지속적인 믿음의 행위와 삶의 열매가 영원한 칭의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혹시 이 내용은 와전된 것일까? 웨슬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영원한 칭의와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는데, 우리가 웨슬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웨슬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삶의 변화, 즉 믿음의 선한 열매를 칭의 유지와 구원 지속의 조건으로 가르친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주장과 이론은 갈라디아에 침투한 그 저주스러운 이단과 무엇이, 어떤 점에서 다를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큰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금 감리교가 정통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있다고 할지라도,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고, 맞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것이다. 말은 바르게 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웨슬리가 가르친 ‘완전성화’에 대해서 변명과 해석이 구구한데, 죄에 대한 유혹이 사라진다나 ...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는 완전성화라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그의 비성경적인 ‘완전성화’ 개념이 결국 홋날의 거짓 방언과 거짓 성령세례 운동을 발생하게 만드는 처음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대체 완전성화라는 개념을 성경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요즘 감리교 목사님들이 자신들의 신학의 울타리가 된 웨슬리의 사상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가 조금 바른 말을 하면 일단 분개하고 보는 태도를 보이므로 안타깝다. 나는 웨슬리의 그런 부분과 다르게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감리교 목사님들을 존경한다. 요즘 많은 감리교 목사님들이 웨슬리가 가르친 내용과는 다르게 말을 한다. 감리교 안에 웨슬리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던데, 그것은 웨슬리에게 처음부터 통일된 성경해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웨슬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리교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감리교회 안에 훌륭한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많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나는 다만 웨슬리의 성경 이해의 어떤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 뿐이다. 과연 웨슬리에게는 신학적 오류가 없었던 것일까?  

누가 나에게 잘 알아듣게 설명해 주면 좋겠다. 

2017년 9월 5일 (출처: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942)

 

정이철

서울신대 장기영 교수 논문에 웨슬리의 신학적 오류 내포

웨슬리의 행위구원론 논쟁을 접으려고 하는데, 누가 어떤 분의 글을 꼭 보라고 알려주었다. 무슨 글인가 보니, 장기영이라는 분이 링크를 걸어준 글이었다. 장기영이라는 분이 나에게 자신의 글을 꼭 읽어달라고 당부하는 글을 남겨둔 것을 보았으므로 이미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장기영 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았더니, 서울신학대학 웨슬리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고, 평택대학교와 서울신학대학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명망있는 교수님이라고 한다.

내가 감리교 목사님들에게 부탁한 것은 웨슬리가 단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모든 종파의 목사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고 있으나 구원 이후에 대해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작은 '그리스도를 믿음'이나 그 이후에는 인간의 신앙적 행위, 즉 철저한 회개와 성화를 이야기한다. 회개화 성화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정착시킨다는 것이 행위구원론이다. 달리말하여 행위구원론은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결단하여 그리스도를 믿으니 하나님이 구원을 주셨고, 또한 그 이후부터 인간이 회개와 성화의 발전으로 구원 안에 머무르기에 합당하게 살므로 하나님이 구원을 유지하여 주신다는 '신인협력구원'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니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되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법적으로 사하여 지고, 영원하고 완전한 칭의와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성경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만 신자의 구원이 영원히 완성되었다고 본다. 구원 이후의 인간의 아름다은 신앙의 행위는 구원정착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은 신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라고 보아야 성경적이다. 결코 구원 이후의 신자의 신앙적 행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가르치면 기독교가 아니다. 종교개혁의 핵심도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자에게 덧입혀 주심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가 이미 완전하고 영원한 칭의과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교회가 아니고 신자가 기독교가 되지 못한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그리스도를 믿음에 회개와 신앙의 선행이 추가되어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영구하게 지속되고 완전해진다고 가르친 이단에게 미혹된 갈라디아 교회에게 바울은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여 행위로 마치겠느냐? 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믿음과 행위를 구원유지의 근거로 가르친 그 이단을 향하여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고 떨어진 자들이라고 판결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웨슬리는 행위구원론자였다. 웨슬리는 믿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구원이 유지된다고 가르친 행위구원론자였다고 온 세상이 알고 있다. 장기영 교수가 웨슬리를 많이 연구했다고 하니, 혹시 믿음 + 사람의 행위(회개, 성화)가 구원을 유지하는 근거라는 행위구원 사상을 자기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웨슬리를 많이 연구하면 분명히 그 웨슬리 행위구원론의 핵심을 지지하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기영 교수의 학위 논문을 보니 초반에는 웨슬리의 사상이 상당히 성경적인 것 같았다. 그의 논문에 이런 내용이 나왔다.

“웨슬리는 ‘믿음에 의한 칭의’(1746)라는 설교에서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칭의란 무엇입니까? … 그것은 실제로 올바르고 의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화입니다 … 칭의에 대한 성경적인 명백한 견해는 사면, 즉 죄 용서입니다.’ 이처럼 웨슬리는 루터, 칼빈과 함께 성화가 칭의의 조건이라는 로마 카톨릭의 칭의론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성화는 칭의의 뿌리가 아니라 칭의의 열매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장기영 교수의 이 내용에 의하면 웨슬리는 실제로 올바른 존재가 되지 않았어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쳤고, 인간이 실제로 의롭게 변화되는 성화를 칭으로 근거로 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정말 그렇다면 웨슬리는 매우 성경적인 신앙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훌륭한 지도자였음이 분명하다.

“웨슬리의 칭의론은 이처럼 루터와 칼빈의 칭의론을 수용하고 맥을 같이 한다. 구원과 선행에서 죄인의 무능 및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 그리고 칭의의 결과로서의 성화와 선행을 가르친다. 이제부터는, 루터와 칼빈의 가르침과는 맥락을 달리하는 웨슬리의 칭의론의 특징을 살펴보자.”

장기영 교수는 웨슬리가 매우 성령적인 칭의론 구원론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서서히 웨슬리의 우려스러운 사상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믿고 칭의받을 때 오직 그때가지의 과거의 죄만 용서

장기영 교수는 루터나 칼빈의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에게 전가되고, 신자들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 신학은 그리스도의 피로 신자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고 보지만, 웨슬리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고 설명하였다. 바로 이 부분이 매우 위험한 내용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도 그 사람의 이후의 행위, 즉 회개와 선행으로 이루어가는 성화이 계속 유지되어야 처음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은 구원이 유지되고 영구하게 정착된다는 행위구원론의 핵심내용이다. 강기영 교수는 웨슬리가 신자가 구원받을 때 그때를 기준으로 과거의 죄만 용서받았다고 이해하고 가르쳤다고 설명했다.   

“루터, 칼빈과 달리 웨슬리는 칭의에서 용서받은 죄를 ‘과거의 죄’로 제한하면서, 동시에 ‘죄를 자백’함으로 회개할 것(요일 1:9)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마 3:8, 눅 3:8)을 강조했다.”

이것이 웨슬리를 많이 연구한 사람이 가르쳐주는 웨슬리 사상의 진면목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셨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주시어 ‘법적인 의인’이 되게하심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다.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되어 이미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진 구원백성이 된 것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 대신 웨슬리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하고 믿고 구원받을 때, 그 순간을 기준으로 과거의 죄만 용서되었다고 가르친 심각한 거짓 선생이었다. 

그런 식이면 그리스도가 2,000년 전에 죽으셨으니 그 이전의 사람들의 죄만 용서되었고, 그 후에 태어난 사람의 죄는 용서되지 못했다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참으로 유치하고 어리석은 말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이 우리를 완전히 거룩하게 만든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법적으로 사하였다고 믿어야 성경의 기독교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죄를 짓고 회개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이미 거룩하게 하였으니 우리가 범하는 죄를 회개하여 주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며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올바른 가르침이다. 웨슬리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까지의 죄만 용서되었고 그 후의 죄는 용서되지 않았다고 가르치면, 그 후의 죄를 어떻게 회개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흔들리게 된다. 웨슬리가 가르친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행위구원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앞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고, 뒤에서는 구원받고 난 후에 범하는 모든 죄와 허물을 스스로 다 토하고 회개하여 지속적인 선행가 성화를 이루어가야 구원을 놓치지 않는다고 하니, 결코 성경의 구원사상이 아니다. 그런식의 비정상적 회개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디 이상한데 가서 그런 행위구원론, 율법주의 회개 사상을 접하였음이 드러난다.

웨슬리 역시 동일한 내용을 가르쳤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을 때까지의 죄만 그리스도의 피가 다 용서하였고, 그 후에 범하는 죄와 허물과 못된 행실을 신자 본인이 부지런히 회개하고 또한 선행으로 자신의 성화를 이루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아무 공로가 없음에도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받아 완전한 구원을 받고, 그리고 그때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실질적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 즉 성화가 일어난다는 성경의 가르침인데, 웨슬리는 그 이전의 많은 거대한 신학이단들의 영향을 받아서 이와 같은 이단사상에 자신의 신앙을 건축한 사람이었다.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강기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웨슬리는 회개의 열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회개는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죄로 인한 슬픔, 2)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겸손케 됨, 3) 죄를 미워함, 4) 죄의 고백, 5) 간절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함, 6) 하나님께 대한 사랑 7) 죄를 멈춤, 8) 확고한 목표로서 새로운 순종, 9)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소유를 되돌려 줌, 10) 우리에게 지은 이웃의 죄를 용서함, 11) 자선 행위 등입니다.’”

또한 장기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웨슬리가 믿고 구원받을 때 신자의 그때까지의 죄가 용서되었으므로 이후 회개하고 성화를 이루어가야 구원이 보장된다고 가르친 웨슬리의 신학이 옳다고 강변했다.

“웨슬리가 죄 용서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그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라고 말씀한다. 또 베드로도 베드로후서에서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9)라고 말씀한다.”

분명한 사실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이전까지의 죄만 사하여졌다는 주장은 지극히 자의적이고 위험스러운 성경해석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의적인 성경해석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변질되고, 그릇된 구원관을 전하는 이단이 출현한다. 

더 이상 무슨 말을 더 하고, 무슨 증거를 더 구할 필요가 있을까? 믿고 구원받아도 이후의 삶이 엉망이면 다시 구원을 잃고, 구원받은 사람도 다시 믿음이 떨어지고 죄에 빠지면 다시 구원을 잃는다는 감리교 목사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다. 장기영 교수 같이 웨슬리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분의 논문에서 그 내용이 그대로 드러났다.  

2017년 9월 9일 (출처: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947)

 

장기영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이단의 정의는 ... "칼빈 아니면 다 이단"인 듯합니다^^ 더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것 같고, 왜 그들이 이렇게 편협한 생각을 갖게 되는지, 극단적 칼빈주의의 논리와 웨슬리 이해에서의 오류를 분석하는 글로 답하겠습니다.

2017년 9월 9일

 

이신건

칼빈주의자도 이단이다!

이중예정을 주장한 칼빈의 논리대로 말한다면, 믿음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특정한 인간을 구원하기로 예정했다면, 구원은 영원히 결정된 셈이다. 여기에 인간의 믿음이 추가되어야 할 필요가 왜 있단 말인가? 칼빈의 논리대로 말한다면, 인간의 믿음도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도 결국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이단이 되는 셈이다.

2017년 9월 9일

 

장기영

정이철 목사님께 드리는 글

정이철 목사님, 제가 임성모 교수님의 글에 대한 이견을 표하기 전에, 먼저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목사님은 며칠 전 2017년 9월 23일, “웨슬리, 감리교를 '이단'이라고 말한적이 결코 없...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쓰셨습니다. 먼저 목사님이 그 글에 붙인 제목부터 사실과 다른 것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목사님은 2017년 5월 28일 “웨슬리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요?”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타락 후에도 스스로 자신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당부분 온전한 상태라고 가르쳤습니다 …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음을 믿을 기회를 주었다는 면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나,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서 구원받는다고 하니, 결국 믿기로 결정한 그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 심지어 구원받은 자의 삶이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이르게 된다는 매우 비성경적인 것도 가르쳤습니다 … 웨슬리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롭다하심’(칭의)을 얻는 것과 그 이후의 ‘그리스도를 닮아감’(성화)에 대해서 매우 비성경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롭다하심에 대해서 바른 성경적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결국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믿음의 선행을 보이지 못하면 다시 구원을 잃고 지옥에 갈수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 이러한 점에서 웨슬리의 신앙은 종교개혁의 신앙의 핵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신앙을 매우 중시했던 청교도들로부터 배척받았고, 동시에 천주교 교황의 그늘에서도 절반정도 벗어난 ‘영국 국교회’의 신부로 일생을 살았으므로 천주교에서도 좋은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웨슬리는 천주교의 요소를 완전히 버리지 않는 영국성공회의 신부로 일평생을 살았으므로 그에게서 천주교 요소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 “

☞ 위의 인용구에서 목사님이 웨슬리의 주장이라고 적어놓은 말들은 결코 웨슬리가 주장한 적이 없는 내용입니다. 목사님은 웨슬리의 말임을 확인할 최소한의 출처조차 적어놓지 않고서 그것이 웨슬리의 주장인양 글을 쓰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학문적, 신앙적 성실성을 가지신 분이라면 출처도 없는 주장을 올린 것에 대해 사과하시고, 내가 쓴 글은 솔직히 웨슬리를 잘 모르고 쓴 글이었다. 웨슬리의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적은 글이었다고 사과하셔야 합니다.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는 판단, 이단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판단을, 웨슬리의 글을 읽어보지도 않은 분이, 카더라 통신에 의거해 한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꾼이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일으키신 형제 교단들을 정죄하는 일을, 그리도 쉽게, 아무런 확인조차 하지 않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위에서 인용한 글들, 목사님께서 직접 웨슬리의 글을 읽으며, 틀린 내용 하나하나를 원래의 주장과 대조하면서, 목사님께서 무엇을 알지 못하고 주장했는지를 하나하나 자백하시고 해명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로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말해야 함이 마땅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기본적인 성실성의 문제,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고 그분의 영광과 이름을 두려워하여 매우 절제하며 처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는 태도를 먼저 보이시기 바랍니다.

………………………………………

다음으로 목사님은 2017년 9월 5일 “과연 웨슬리에게는 신학적 이단성이 없었던 것일까?”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 … 성경은 구원을 얻음에 있어 우리의 노력과 행위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나기 전에 이 진리를 훼손하는 이단이 등장했다. 갈라디아에 침투했던 이단은 그리스도를 믿음 외에 행위와 삶의 내용이 동시에 칭의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다 …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침투한 그 이단의 가르침을 저주받을 '다른 복음'이라고 판정하였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그리고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개’라고도 하였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빌 3:2). 그리고 삶의 열매, 즉 믿음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져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 그러면 존 웨슬리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웨슬리가 한 번이라도 그리스도를 믿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 결코 죄인의 그 무슨 행위로도 발생하지 못하는 죄인에게는 '낯설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칭의와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 적이 있었을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음으로 인해 칭의와 구원이 완성되었고, 더 이상의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웨슬리가 강력하게 가르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지금까지 나는 그런 말 못들었다. 웨슬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더불어 인간의 지속적인 믿음의 행위와 삶의 열매가 영원한 칭의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상식이다 … 웨슬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삶의 변화, 즉 믿음의 선한 열매를 칭의 유지와 구원 지속의 조건으로 가르친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주장과 이론은 갈라디아에 침투한 그 저주스러운 이단과 무엇이, 어떤 점에서 다를까? 아무리 생각해도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이단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 감리교가 정통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있다고 할지라도,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고, 맞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것이다. 말은 바르게 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웨슬리가 가르친 ‘완전성화’에 대해서 변명과 해석이 구구한데, 죄에 대한 유혹이 사라진다나 ...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는 완전성화라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그의 비성경적인 ‘완전성화’ 개념이 결국 홋날의 거짓 방언과 거짓 성령세례 운동을 발생하게 만드는 처음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대체 완전성화라는 개념을 성경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

☞ 목사님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는 바울의 저주와, 개들을 삼가라는 바울의 경계를 인용한 후, 웨슬리가 믿음과 더불어 행위와 삶의 열매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는 상식이라고 주장한 후, 그의 주장과 이론은 갈라디아서에 침투한 그 저주스러운 이단과 무엇이 어떤 점에서 다른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글을 한번도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분이, 웨슬리가 어디서 그런 주장을 했는지 전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어디서 지어낸 말들을 웨슬리의 말로 둔갑시킨단 말입니까? 목사님, 이단 판별을 스스로 확인도 하지 않고 하시는 분입니까? 이제까지의 이단 판별도 그런 방식으로 하셨습니까? 과거의 모든 발언까지도 이런 방식의 판단에 근거해 있는 것입니까?

☞ 웨슬리의 완전성화에 대해서도 “죄에 대한 유혹이 사라진다나” 웨슬리는 결코 그런 완전성화를 가르친 적 없습니다. 목사님이 적어도 목사로서의 신실성을 가진 분이라면 웨슬리의 설교 두 편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완전에 대하여”를 꼭 읽고, 목사님이 쓴 글 하나하나와 대조하면서 제가 웨슬리를 읽지 않고 오해했습니다 라는 글을 다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웨슬리의 글을 전혀 읽지도 않고 웨슬리가 하지도 않은 주장, 웨슬리가 반대한 내용을 마치 웨슬리가 주장한 것인양 둔갑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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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은 2017년 9월 7일, “서철원 박사, 웨슬리 신학을 이단으로 단정해도 무리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 그 글은 목사님께서 지우셨기에 굳이 더 이상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단지 목사님은 웨슬리를 읽어보지도 않은 분이 서철원 교수가 이단이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판별할 정도로, 스스로 웨슬리를 읽고 주의깊게 판단해야 할 당연한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오직 서철원 교수가 이단이라 하면 이단으로 믿는 분인가요? 스스로의 판단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스스로 읽기 귀찮으니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것을 근거 삼는 것인가요? 둘 중 어느 쪽이든 목사님께 책임이 없다고 말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문제가 크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실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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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은 위의 사건이 문제가 되자, 2017년 9월 15일에 “<바른믿음>이 서철원 박사님과 독자님들께 드리는 사과문”이라는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은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최근 <바른믿음>에 게시된 웨슬리의 구원론을 다루는 기사들에 관련하여 서철원 박사님과 독자님들에게 사과드립니다. 웨슬리 신학의 구원론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요청하여 서철원 박사님께서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신 내용을 공개적으로 기사화하여 서철원 박사님께서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서철원 박사님께 이 점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서철원 박사님의 웨슬리 신학에 대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입장이나 표현은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보내시는 편지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바른믿음>의 독자님들은 이 점을 널리 양해를 바랍니다. 그리고 논의를 개진하는 과정에서 웨슬리 신학의 의문점들을 “웨슬리의 신학적 이단성” 등으로 표현하여 많은 독자님들에게 심적인 부담과 아픔을 유발하였으니 표현을 고치라는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따라 “웨슬리의 신학적 오류” 등으로 표현을 수정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널리 양해를 바랍니다. 앞으로 <바른믿음>이 진정으로 올바르고 성경적인 복음변증의 길에 매진할 수 있도록 많은 조언과 격려를 바랍니다.”

☞ 목사님은 먼저 스스로 읽어보지도 않은 웨슬리를 이단적이라고 규정한 사실에 대해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음으로 목사님은 사과의 대상을 서철원 교수와 목사님이 만든 사이트 <바른 믿음>의 독자로 제한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사과하셔야 할 더 중요한 대상은 서철원 교수이기 전에, 목사님께서 근거도 없이, 출처도 밝히지 않고 근거없이 음해한 웨슬리안들이었어야 합니다.

공격은 웨슬리언들에게 가해놓고, 사과는 신학적으로 같은 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만 행하는 것이 과연 진실한 사과라고 볼 수 있을까요? 오직 같은 편을 향한 목사님의 글이 상대편 웨슬리안들에 대한 또한번의 확인사살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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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외의 글들 역시 모두 스크랩 해놓았지만, 모두 언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으로 며칠 전인 2017월 9월 23일에 쓰신 “웨슬리, 감리교를 '이단'이라고 말한적이 결코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 목사님은 이 글을 올리기 전, 과거 목사님께서 웨슬리를 비성경적, 이단적이라고 표현한 많은 표현들에 대해 먼저 웨슬리를 직접 읽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평가하신 후 진심을 담아 예전에 쓰셨던 글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한문장 한문장 인용하면서 밝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웨슬리, 감리교를 이단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죄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다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 목사님은 “웨슬리, 감리교를 '이단'이라고 말한적이 결코 없습니다”라는 글에서 조차도, 웨슬리에 대해 스스로 확인하지 않은 자신의 책임은 언급하지 않은 채, 이 사람 저 사람, 이 학자 저 학자의 말들을 대조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근거해 여전히 웨슬리의 잘못을 말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웨슬리에 대한 오해의 근원을, 웨슬리의 글을 읽지 않은 자신에게로 돌리지 않고, 자신이 정보의 출처로 삼았던 웨슬리안들이나 다른 외부인물들에게로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성실한 태도입니다. 목사님은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을 듣고 웨슬리를 판단하려 하기 전에, 먼저 목사님께서 웨슬리를 읽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웨슬리 연구자들에게 질문할 것은 질문하시고, 웨슬리를 먼저 바르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연후에 목사님 나름의 기준과 판단이 섰을 때, 다른 사람의 말들을 듣거나 대조하거나 중재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시간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독서와 판단의 과정 없이 다른 사람의 말과 소문에 의존해 웨슬리가 성경적이냐 아니냐, 이단적이냐 아니냐를 말씀하신다면, 목사님의 최소한의 성실성이 문제가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 목사님은 구원론에 있어서 웨슬리의 이단성을 주장한 것에 대해 스스로의 발언을 바로잡으려는 최소한의 노력과 과정도 없이, 논의의 주제를 옮겨 은사 문제에 대해 웨슬리안 학자들의 논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시려는 듯합니다. 순서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목사님께서 웨슬리를 비성경적, 이단적으로 규정하신 과거의 발언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2017년 9월 26일

 

이신건

“십자가”라는 스캔들?!

정이철 목사와 장기영 박사 간의 논쟁이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누가 먼저 논쟁의 불을 지폈고, 누가 이 불을 더 크게 퍼뜨리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핵심 논쟁은 구원이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지느냐(예정론, 결정론?), 아니면 행위가 구원의 표지나 조건이 되느냐(신인협동설, 행위구원론?)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이른바 유보적 칭의를 주장하고, 후자는 최종적 칭의를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논쟁의 핵심은 구원의 방법론인 듯이 보인다.
전자는 십자가의 구원이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미치며, 그래서 미래의 구원도 인간의 행위와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과거의 구원은 분명히 십자가 은혜와 믿음으로부터 주어지지만, 칭의를 받은 후에 신자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성화)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한번 구원(칭의)을 받은 신자는 행위의 공로에서 영원히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한번
구원(칭의)을 받은 신자는 칭의 후에도 행위의 표지나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가 십자가라는 걸림돌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듯이 보인다. 구원의 근거를 십자가의 효력(형벌대속)에서 찾다 보니, 두 사람이 모두 이런 논쟁에 휘말려든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감당한 형벌 대속의 효력이 십자가 사건 이전의 인간들이 범한 죄만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들의 - 아직 범하지도 않은 - 죄까지 어떻게 미칠 수 있는가? 더욱이 예수가 감당한 형벌대속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인간을 완전히 해방했다면, 인간은 이 사실을 왜 굳이 믿어야 하는가? 이런 더 심각한 문제 앞에서 두 사람의 주장은 매우 피상적이고 구태적인 듯이 보이지 않는가?
전통적인 형벌대속설로는 이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성서에 나타난 다른 이론을 통해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전에는 이런 요상한 논쟁은 계속 전개될 것이다. 십자가가 유대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드디어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바야흐로 구원론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이 요청되는 시점이라고 본다.

2017년 9월 26일

 

장기영

교수님, 저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실과, 믿음을 통해 그 객관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효력이 적용된다고 하는 두 단계의 과정이 성경의 속죄에 대한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믿습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은총의 객관성만이 인간의 구원을 결정짓는 유일한 요소라면, 그것은 마치 이중예정론에서와도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수용과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 자동적인 구원의 교리가 될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죽음과 신앙을 통한 그 효력의 적용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보편 대속설(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피흘리셨음을 가르치는 교리)이 아니라, 보편 구원설(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악을 많이 행했든 덜 행했든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로 기울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전통적 형벌대속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 인간의 타락과 심판,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성령의 조명하심과 인도하심 및 변화시키심, 신자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 악의 활동과 그리스도의 승리 모두를 포괄하는 성경적 진리의 정수를 담고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혹시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더 나은 교리적 사고방법이 있으면 다음에 뵐 때 좀 더 자세히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수님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2017년 9월 26일

 

이신건

라틴적 유형(객관적 속죄론)과 자유주의 신학적 유형(주관적 감화설)이 아니라 고전적 유형(승리자 그리스도)이 훨씬 더 성서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전적 속죄론은 현대에 이르러 특히 아울렌이 다시 주장했으며, 그의 저서 "조직신학개론"(김관석 역, 대한기독교서회)과 "승리자 그리스도"(전경연 역, 복음주의신학총서)에 잘 설명되어 있다.

2017년 9월 26일

 

장기영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저도 속죄 이해에서 아울렌의 승리 유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족설과 감화설 역시 속죄론의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학위 논문 중 일부의 내용인데, 아래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가장 포괄적이고 부족함이 없는 속죄론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아울렌은 대속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을 고전적인 승리 유형, 라틴적인 법적 유형, 그리고 윤리적 유형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눈 후, 루터의 대속론은, 승리의 개념과 마귀를 속인다고 하는 요소, 그리고 상상적이고 극적인 묘사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고전적 승리 유형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렌이, 루터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에 대해 승리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고 관찰한 것은 적절하다. 하지만 아울렌은 라틴의 법적 유형의 대속론을 도덕주의로 오해하여, 루터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하여 승리하셨음을 강조한 것은 그가 “라틴 기독교의 도덕주의에 대한 반대”를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한다.

하지만, 라틴 유형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라틴 유형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적절한 사역인 은총의 사역을 돕는 하나님의 낯선 사역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창조해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사실이 바로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음에도 죄인으로 죽으신 것은, 자기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용서를 베푸시면서도, 죄와는 타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단절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율법주의와 대조를 이루는 이상, 라틴 유형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오히려 율법주의와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승리라는 주제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전적 충족성(all-sufficiency)을 강하게 옹호한다. 따라서 알트하우스는, 루터에게는 승리 유형보다 라틴 유형이 보다 근본적인 것이라고 바르게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대적하여 싸우셨던 세력들은 그들의 힘과 권세를 오직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얻기 때문이다.” 사탄과 율법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상, 화해의 궁극적 대상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 자신이시다. 시긴스 역시, 루터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상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심을 바르게 적시한다.

게르하르트 포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루터 신학에 내포된 서로 다른 속죄에 대한 관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제안한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키셨고,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셔서 형벌 받으셨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동시에 율법과 죄와 죽음에 대해 승리하셨다. 형벌과 만족, 승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동일시 되므로, 그는 우리의 모범도 되신다.

2017년 9월 26일

 

이신건

나처럼 속히 답변을 해 줘서 고맙다. 루터에게는 고전적 유형과 라틴적 유형이 혼재하지만 라틴적 유형이 우세인 듯하다. 바울에게는 세 유형이 다 나오지만, 역시 라틴적 유형으로부터 출발하는 듯하다. 루터와 바울이 뭐라고 말하든, 나는 역사적 예수에서 근거를 찾기를 애쓴다. 예수의 삶과 선포로부터 볼 때, 난 단연코 고전적 유형이 압도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책 "예수의 정체와 의미"는 바로 이 점을 비교적 소상히 다루고 있다. 객관적 유형과 주관적 유형보다는 양자를 통합하거나 극복하는 종합적 유형인 고전적 유형이 예수의 삶과 선포에 더 가깝다고 나는 확신한다. 웨슬리가 양 극단을 배척하는 종합적인 신학자였다면, 그는 마땅히 고전적 유형을 대변했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는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자들의 충실한 후계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론을 올바로 종합하지 못한 시대의 아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바울, 루터, 칼뱅, 웨슬리만을 절대시하거나 신학의 교부로만 여기고 그 외의 신학자들은 외면하며, 더욱이 역사적 예수를 등한시해야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바르트와 몰트만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2017년 9월 26일

 

장기영

이렇게 지나치게 단순화 하면 안되겠지만, 그래도 승리 유형은 하나님과의 현재적 관계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라틴 유형은 과거의 잘못은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가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 같습니다. 인간사에서도 현재적 관계를 위해 과거사를 해결해야 하듯,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과거사의 은혜로운 해결을 말하는 것이 라틴 유형이라고 보면, 그것은 승리 유형을 돕고 그 배경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바울, 루터, 웨슬리를 피해서 신학을 논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스마트폰 계에서 애플이 선발주자가 되고 나니, 후발주자인 삼성과 안드로이드 계열에 계속해서 저작권 관련 고발을 하면서 우리 기술 베겼다고 소송을 걸었듯이, 만약 신학적 사고에서 저작권이 꼼꼼히 따진다면 바울, 루터, 웨슬리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도 신학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루터, 웨슬리에게 머물러선 안되지만, 그들 속에 있는 보석같은 통찰들은 후대의 신학적 사고에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르트와 몰트만은 잘 모르지만 그들에게서도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습니다.

2017년 9월 26일

 

이신건

라틴적 유형은 단지 과거의 잘못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죄책을 해결하는데 주안점을 둔다면, 고전적 유형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죄악을 해결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고 보면 좋겠지. 그리고 라틴적 유형은 인간의 참여를 최대한 줄이려는 경향이 있다면, (그래서 오직 믿음이냐, 행위도 중요하냐의 논쟁이 생겼지만) 고전적 유형은 인간의 참여를 최대한 강조하려고 하지. 단순히 말하면, 라틴적 유형은 예수의 구원 행위를 믿고 믿음의 열매나 표지로서 행동을 보이라고 말한다면, 고전적 유형은 예수의 선행적인 구원 행위에 동참하면서 예수와 함께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고전적 유형이 라틴적 유형보다 더 행동적, 능동적, 구조적이지. 라틴적 유형은 인간을 수동적, 소극적, 개인적으로 보는 단점이 있다고 본다. 좌우간 이 좁은 지면에서 자세히 논쟁할 수 없으니, 더 자세한 논의는 다른 곳에서 하기로 하자. 좌우간 종교개혁 500년만에 제대로 된 신학적 논쟁을 해 본다면 점은 감사할 일이다.

2017년 9월 26일

 

장기영

저도 죄책 해결 중심의 라틴 유형 이해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케네스 콜린스 교수도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의 관계성보다는 인간 중심적으로 천국티켓 확보냐 아니냐는 식으로 보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라틴 유형이 바르게 작용하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의 문제가 바르게 인식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복음 이전에 율법에 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 루터, 칼빈, 웨슬리라는 점에서, 현재의 라틴 유형 이해는 종교개혁자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전적 유형은 칭의보다 중생과 성화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교수님의 말씀에 동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둘 모두가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2017년 9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