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복음을 전파하지 마라!

구원론(속죄론) 논쟁

 


이신건 박사


장기영 박사

  (2018년 12월 17-18일)

 

이신건

어제 TV에서 강남 대형교회의 한 젊은 목사의 설교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예수의 탄생을 앞두고 그의 탄생 의미를 설명하려고 애쓴 것까지는 무척 좋았지만, 그의 두 가지 주장이 나로서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레위기의 제사 본문에 비추어 예수의 죽음을 상세히 설명했다. 비록 그는 다섯 가지 제사 전통에 따라서 예수의 죽음을 매우 포괄적으로 - 헌신(번제), 섬김(소제), 교제(화목제), 용서(속죄제), 관계회복(속건제) - 설명했지만, 그는 여전히 율법주의에 근거하여 예수의 죽음을 설명했다. 예수는 과연 구약의 율법제도, 즉 불완전한 희생제사를 완성하려고 죽었는가? 예수는 이미 지상 활동 중에 희생제사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았는가? 유대인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전통을 유지할 수 없어서 다른 속죄의 길을 열어놓았지만, 오직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 사제들은 일 년에 한번만이라도 이 전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예수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를 거부했고, 성전의 완전한 파괴까지 예언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구약의 희생제사의 완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이치가 맞지 않다. 내가 다른 지면을 통해 여러 번 말했지만, 고대의 모든 교부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죄악의 세력(사탄)에 대한 승리로 보았지, 범죄한 인간 대신에 형벌을 받는 속죄 제물로 보지 않았다. 이보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대속했다는 주장이다. 여러분은 예수가 여러분이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 미리 속죄했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앞으로도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미래의 죄까지 미리 용서를 받았으니, 주저 없이 죄를 짓고 살아도 좋다. 예수가 죄악과 대결한 것이 아니라 고작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만 죽었고 예수가 우리가 전혀 짓지 않은 미래의 죄까지 미리 속죄했다는 이런 억지 주장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온갖 죄악 속에서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며, 현실의 죄악과 전혀 대결하지 않고 허구적인 구원의 확신 속에서 느긋하게 살아가지 있지 않는가? 이런 구원론을 선포하는 교회에 미래가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는가? 나는 이런 구원론이야말로 교회를 가장 무력하게 만들고 멸망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한다. 성탄절이 점점 더 다가오니, 예수의 삶과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12월 7일)

 

장기영

저는 교수님께서 제기하신 두 가지의 문제 중 어떤 부분은 교수님의 의견에 크게 공감하고, 어떤 부분은 약간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1. 먼저, 교수님께서는 기존 개신교의 속죄론은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의 율법제도, 즉 희생제사를 완성”한 것으로 해석한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소견으로는, 개신교의 속죄론은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의 희생제사의 "완성"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만약 기존 속죄론이 예수님의 죽음을 그렇게 해석해왔다면 저 역시 찬성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개신교의 속죄론은 구약의 제사제도의 "완성"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구약의 제사제도의 "실체"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그 실체인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의 상징이자 그림자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

“[구약시대의]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 8:5).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히 9:9).

이런 구절들은 동물의 피는 사람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제도는, 사실상 앞으로 역사 속에서 성취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죄를 해결하게 될 것인지를 모형과 상징으로 보여줄 뿐이고, 속죄의 능력과 원천은 그런 상징과 모형에 있지 않고, 그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있다고 말씀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글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 자체를 거부하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고 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는 성전에서 드려지던 모형과 상징을, 예수님께서 실체로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그 의미를 성취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히브리서 9:22-28절을 보면 구약의 속죄제도와 그리스도의 죽음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9:22절은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으로 구약의 제사제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통 분모를 설명하되, 23절은 구약의 제사제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차이점을 구약은 “모형”, 그리스도는 “더 좋은 제물”로 표현하고, 24절은 구약의 제사제도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늘에서 …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 사역으로 표현하며, 25-26은 구약의 제사제도는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자주” 드려야 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셨다고 그 차이를 설명합니다.

구약의 제사제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지닌 분명한 공통분모는 사람은 죄인이어서 심판을 피할 수 없기에 피를 통해 죄를 사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음을, 이어지는 27-28절은 다시 한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라는 표현으로 분명히 말씀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구약의 제사제도가 폐지된 사실 그 자체는, 구약의 제사제도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시자,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식으로 죄를 사하실지에 관해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예시하던 구약의 제사제도가 그 소임을 다했기에 폐지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는 개신교의 속죄론이 구약의 희생제사를 미완성,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완성의 관계로 보기보다는, 구약의 제사제도는 모형과 상징,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체와 성취의 관계로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인의 속죄를 가져온다는 진리와, 십자가가 사탄에 대한 승리라는 진리는 양자택일 해야 할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양자 모두가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전자가 사라져버리고 후자만 남는 기독교는, 후자를 가능케 하는 요소이자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본질에 대한 풍성한 깨달음이 사라지고, 윤리만 남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족한 존재, 더 나아가 심판 받아야 존재임에도 사랑받고 용납 받는다고 하는 속죄론은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에 대한 이해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에 기초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경험하는 것이, 우리 역시 죄와 폭력에 죄와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그들의 잘못마저 감싸 안을 수 있는 비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저의 논문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출판될 책에 나올 내용의 일부를 옮겨보겠습니다.

“아울렌은 대속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고전적인 승리 유형, 라틴적 법적 유형, 윤리적 유형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눈 후, 루터의 대속론은, 승리의 개념과 마귀를 속이는 요소, 상상적이고 극적인 묘사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고전적 승리 유형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루터가 그리스도의 승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로 보았다는 아울렌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아울렌은 라틴적 법적 유형의 대속론을 도덕주의로 오해해, 루터가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싸워 승리하셨음을 강조한 것은 그가 '라틴 기독교의 도덕주의에 대한 반대'를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한다.

하지만 라틴적 법적 유형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라틴 유형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적절한 사역인 은총의 사역을 돕는 하나님의 낯선 사역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미 전제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은혜로우신 하나님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음에도 죄인으로 죽으신 것은, 자기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용서를 베푸시면서도 죄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사랑과 단절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율법주의와 대조를 이루는 이상, 라틴 유형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오히려 율법주의와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승리라는 주제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전적 충족성(all-sufficiency)을 강하게 나타낸다.

따라서 알트하우스는, 루터에게는 승리 유형보다 라틴 유형이 보다 근본적인 것이라고 바르게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대적해 싸우셨던 세력은 그들의 힘과 권세를 오직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얻기 때문이다.” 사탄과 율법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상, 화해의 궁극적 대상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 자신이시다. 시긴스 역시 루터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상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심을 바르게 적시한다. 포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루터 신학에 내포된 서로 다른 속죄의 관점이 충돌하지 않는다고 제안한다. 첫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키셨고, 율법의 저주를 짊어져 형벌 받으셨다. 둘째, 그리스도는 동시에 율법과 죄와 죽음에 대해 승리하셨다. 형벌과 만족, 승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동일시 되므로, 그는 우리의 모범도 되신다."

 

3. 마지막으로, 저는 교수님께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대속했다는 주장”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신 것에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표현에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속하기 위해 단번에 드려진 속죄 제물이라는 것은 성경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지속적인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이 거짓된 믿음을 면죄부로 삼아 자기 스스로 모든 죄를 셀프 속죄하는 태도에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회개 없이 자신을 셀프 속죄하는 것을 지적해주신 것은 오늘의 종교개혁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내용은 웨슬리도 매우 심각하게 다루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제 책의 일부를 옮겨 보겠습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용서받는 신자의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하고, 동시에 '죄를 자백'함으로 회개할 것(요일 1:9)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마 3:8; 눅 3:8)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회개의 열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회개는 여러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죄로 인한 슬픔, (2)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겸손케 됨, (3) 죄를 미워함, (4) 죄의 고백, (5) 간절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함, (6) 하나님께 대한 사랑, (7) 죄를 멈춤, (8) 확고한 목표로서 새로운 순종, (9)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소유를 되돌려 줌, (10) 우리에게 지은 이웃의 죄를 용서함, (11) 자선 행위 등입니다.'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용서받는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성경적 용례를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라는 성경적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또 베드로 역시 회개와 구원의 열매를 언급한 후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9)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에 분명하게 표현된 '전에 지은 죄', '옛 죄'의 용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요일 1:9)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심은, 죄인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언약의 관계를 파괴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잘못된 태도와 행위를 기억하고 자백하며 뉘우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깊은 자각'(a deep sense of our past sins)과 '뉘우치는 마음'(a penitent heart)이나는 인격적인 요소가 없이 자동적으로 제거되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일 루터와 칼빈의 행복한 교환이나 이중 전가의 교리에서처럼, 내가 신앙을 갖는 순간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영원히 사라졌기에 이제 더 이상 '내게 아무 죄가 없다'라고 생각해, 주님 앞에 죄를 짓고도 구체적으로 자백하고 뉘우치며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는 말씀이 아니라,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는 말씀이 적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용서받는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하나님 용서하시는 은혜의 무한하심을 제한한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요일 1:9)하며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 용서를 베푸시기에"(as often as there is occasion) 용서의 횟수에는 한계가 없다. 웨슬리가 용서 받는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무한함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과거에 한번 믿은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면죄부와 같은 것이 아닌, 늘 현재적 관계의 온전함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의 온전함은, 범죄할 경우 철저한 자백과 회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함으로만 유지될 수 있다." (12월 7일)

 

이신건

1. 먼저 부족한 저의 글에 대한 장 박사님의 빠른 관심과 의견 표명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에 관해서도 적극적인 찬성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관심과 견해를 표명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이게 무슨 큰 문제라고 자꾸 떠드는가? 당신이 뭐라고 지껄이든,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 생각이 옳다.”라는 입장으로부터 당신의 견해를 반박할 자격과 실력이 내게는 없다.”라거나 당신은 완전히 이단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이야!”라는 입장까지 다양한 입장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러저런 점을 고려할 때, 장 박사님의 진지한 관심과 의견 표명에 기쁨과 감사를 느낍니다. 누가 옳고 그르든, 이를 통해 신학적 소통이 더 폭넓게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로의 차이점과 일치점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것도 우리의 사귐에 매우 유익한 기여를 할 것으로 봅니다. 이 공간의 특성을 고려하여 장 박사님의 견해에 대한 나의 견해를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 봅니다.

2. 먼저 장 박사님은 히브리서의 본문을 주요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상당히 늦게 기록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그의 신학에는 유대교적, 복고적 전통이 매우 강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 조류였던 헬레니즘의 이원론의 영향도 강하게 받고 있다고 봅니다. 이는 땅과 하늘, 모형과 실재 등의 대조 등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서 히브리서는 정경 가운데서 문제가 가장 많은 문서임이 분명합니다. 히브리서가 주는 신앙적, 신학적 유익은 매우 크지만, 결정적인 오류를 두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 22)라는 주장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구약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은 짐승 대신에 곡식도 희생 제물로 드릴 수 있었고, 초기 유대교에서 회개, 자선, 선행, 금식, 고난도 속죄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도 용서에 관해 말할 때마다 피흘림은커녕 그 어떤 인간의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통회나 탕감의 비유에서처럼 용서받은 인간의 상응한 용서 행동은 요구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 박사님은 히브리서를 근거로 구약의 희생 제사를 단지 예수의 희생적 죽음의 모형과 그림자 정도로, 혹은 예수의 속죄 행위에 대한 비유와 상징으로만 생각하시지만, 구약에서 희생 제사는 속죄의 실제()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단지 구약 시대의 희생 제사는 해마다 반복되므로 번거롭고 경제적 부담이 들어가는 대신에 예수는 단 한 번의 희생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속죄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히브리서 저자와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여하튼 구약의 희생 제도는 단지 실재의 모형과 그림자, 즉 효력이 없는 비실재적인 제도는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여하튼 예수는 사죄의 근거와 조건으로서 짐승이나 자신의 희생적 죽음(피흘림)을 요구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후대의 해석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파괴에 관한 예수의 예언도 자신의 희생적 속죄에 대한 예언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희생 제사와 성전 체제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새로운 구원 시대의 도래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장 박사님의 말대로 성전 파괴에 관한 예수의 발언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지시했다면, 그는 너희의 번거롭고 장사 속으로 치르지는 희생 제사를 걷어 치워라. 내가 단지 몇 시간 만에 은혜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써) 새로운 속죄의 길을 열어 놓겠다.”라고 말했어야 옳습니다. 여기서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까지 예언했다면, 이것은 희생 제사의 신학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희생 제물은 부활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속죄의 시간적 효용성은 신학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문제입니다만,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속죄는 과거의 범죄에 대한 용서일 뿐이지, 아직도 범하지 않은 미래의 범죄를 미리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범죄에 대한 속죄 행위라면, 그의 속죄는 오직 예수의 죽음 이전까지만 해당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예수의 죽음(?) “전에 지은 죄”(3:25)를 자주 말하곤 합니다. 문제는 예수의 죽음 이후에는 속죄가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웨슬리도 예수의 속죄를 받아들이는 현재의 인간을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나누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예수의 죽음 이후에는 그 어떤 인간도 속죄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속죄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위해 영원히 단번에이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속죄는 매우 비현실적, 관념적인 행위가 되고 맙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범죄를 어떻게 미리 속죄한다는 말입니까? 단 한번 일어난 속죄에 대한 믿음으로?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착각입니다. 전통적 속죄론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무관한 이런 억지 주장과 해석은 이제 걷어 치워야 합니다. 비록 이런 주장이 성서 곳곳에 드러나더라도, 이것은 가짜, 유사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서의 권위, 성서의 영감을 믿지 않느냐?”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성서라고 해서 모두 올바른 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대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서는 단지 지리적, 과학적으로만 틀린 주장을 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매우 이상하거나 충돌하거나 틀린 말도 자주 합니다. 히브리서가 틀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금 제가 지적했듯이, 성서는 오류가 많은 인간의 혼합 문서입니다. 그래서 성서 비평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도 성서(문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으로 왔지, 문자로 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축자영감설 혹은 성서문자주의종이교황숭배라고 비꼬았습니다.

비록 고전적 속죄론도 신화적 색채로 얼룩져 있고, 그래서 현대적 재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의 거의 모든 교부들의 견해였고, 루터에게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안셀름과 칼뱅 등을 계승하는 개신교 신학자들 때문에 마치 라틴적 속죄론이 유일무이한 진리인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서적, 논리적, 신학적으로 문제투성입니다. 라틴적 속죄 유형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고 인간의 참여는 완전히 배제하는 이른바 구원파적 신앙, 싸구려 은혜를 낳았지만, 고전적 속죄 유형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참여, 구원의 과정적, 점진적 특징을 강조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적신앙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라틴적 속죄 유형이 한때는 큰 힘을 발휘했지만, 이제 이것은 더는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교리에 걸려 넘어지고 있으며, 이제는 매우 낡고 무력한 이론이 되었습니다. 아니 내 생각에 이것은 처음부터 가짜 속죄론이었습니다. 이제 더는 바울과 칼뱅, 웨슬리를 믿지 말고, 예수를 믿읍시다. 오직 예수만이 진리의 빛이고, 오직 예수만이 살아 있는 말씀이니, 오직 예수의 관점에서 모든 신학자들을 검증하여 취사선택합시다. 의도하지 않게 길어진 글을 읽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더 계속 논쟁하고 싶다면, 좁은 이곳에서 하지 말고 더 넓은 공간(팟 캐스트, 유투브 등)에서 공개적으로 해 봅시다. 나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나의 잘못된 주장을 언제든지 바로잡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12월 8일)

 

장기영

교수님의 설명해 주신 내용만으로 짐작해보면, 속죄론을 화두로 말씀하셨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속죄론만이 아니라 다른 주제들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교수님의 조직신학체계를 이해해야만 이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 좁은 공간에서는 정말 불가능한 듯합니다. 저의 다른 견해를 말씀드려도 언제나 무례한 도발로 불쾌해 하시지 않고, 응대해 주시고 받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

 

교수님, 이곳에서 다 논할 수 없는 문제인데 또다시 답을 달아 죄송합니다~ 교수님께서 올리신 글에 대한 저의 소견을 마지막으로 한 말씀 올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속죄에 관한 개신교의 전통적 교리에 관해 히브리서의 권위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배제한다면, 바울 서신에서도 충분히 전통적 권위를 끌어낼 수 있고, 바울도 믿을 수 없어 배제한다면 사도행전이나, 사복음서에서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 교부들 중에는 동방교부들이 승리로서의 속죄를 주장했지만, 교부시대 전체를 통틀어, 그리고 동방과 서방을 통틀어 형벌대속론이 주장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3. 저는 구원의 진리에 대한 사람의 이해가,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의 부분적 이해일 뿐이라면, 두 유형만이 아니라 아벨라르의 이해를 포함해 세 유형,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유형이 있어야 부분 부분이 모여 보다 나은 속죄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유형 모두가 너무나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어 하나를 배제할 경우 그와 관련된 많은 진리가 함께 배제를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번에 뵈면 좀 더 많은 말씀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2월 8일)

 

이신건

저도 짤막하게 대답할 게요.

1. 아전인수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사복음서에서는 라틴적 유형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2. 고대교부들의 문헌에도 라틴적 유형이 비교적 희박합니다. 그들이 이 유형을 사용할 때도 고전적 유형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더 강합니다.

3. 세 유형은 공존하기 어렵지만, 한 유형이 다른 유형을 어느 정도는 포괄할 수 있습니다. 고전적 유형이 이런 점에서 가장 탁월합니다. (12월 8일)

 

이신건 

만약 예수가 죄악의 극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이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만약 예수가 단지 죄책 해결만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면, 나는 더는 그를 믿고 따르고 싶지 않다. 만약 예수가 구조악 아래서 신음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범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인간의 양심만을 편하게 해주려고 했다면, 나는 그런 예수를 절대로 믿고 따르지 않겠다. 그처럼 비겁하고 무책임한 예수를 믿고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구조악의 극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을 감수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믿고 따르겠다. 예수가 선포하고 앞당겨 오려고 했던 하나님 나라의 혁명이 그처럼 물렁물렁하고 퇴보적인 것이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예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 예수 때문에 인류는 도리어 얼마나 더 불행해지고 비겁해지고 나약해졌겠는가?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가짜 예수를 믿고 있으며, 그래서 얼마나 무책임하고 비겁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성탄절을 앞두고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혁명을 위해 태어나고 살고 죽은 예수를 돌팔이 의사와 악덕 의사처럼 곡해하고 변조한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간악함 때문에 나는 오늘도 치를 뜬다. 비록 내가 예수처럼 그렇게 진실하고 치열하게는 살지 못하더라도, 무책임하고 비겁한 예수만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겠고, 그런 예수는 도저히 믿고 따르고 싶지 않다.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