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소망과 영적 활력을 주는
재림의 복음
홍성국
신약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내가 속히 오리라...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는 약속과 소원은 초기 기독교 내에 팽배하였던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의 발로다. 그런데 기대했던 임박한 재림 없이 기독교역사의 흐름은 이러한 임박성에 근거한 재림 신앙의 약화를 초래하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초기 기독교 내에서도 재림의 더딤이 어떤 사람에게는 재림 자체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비쳐지기도 하였다(벧후 3:4).
이 같은 분위기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미국의 전도자 심프슨의“우리의 오시는 주님 그리스도,”다시 말하면 재림의 주님에 대한 강조와 함께 일어났다. 성결교회도 재림의 주님을 전도표제의 하나로 택하고 태어났다. 그러나한국 사회에 밀어 닥친 산업 자본주의의 혁명에 의한 세속화 현상은 재림과 함께 종말이 온다는 기독교 고유의 세계관을 이완시켰다고 본다. 지금 성결교회는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재림하는 주님에 대한 세계관을 분명히 함으로 신앙적 유산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재림과 관련된 신앙적 유산에 대하여 음미하고자 한다.그 일을 위하여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재림과 관련된 신앙적 유산에 대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단일 공동체가 아닌 여러 공동체로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공동체는 크게 바울 공동체와 비바울 공동체로 나눌 수 있다. 비바울 공동체는 베드로, 야고보, 히브리, 요한 공동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논의도 지면의 제한 때문에 아주 제한적으로 간략하게 수행될 것이다.
바울 공동체
먼저, 고린도전서 16:22에서 직접적으로“주께서 오신다”(재림을 지칭함)고 언급한다. 이 같은 재림에 대한 기대는 임박하였다고 말한다(7:26). 이때에는 환난이 임할 것이므로 결혼하지 않고 지내라고 바울은 권면한다. 그리고 결혼한 자들은 결혼하지 않은 자처럼 살라고 권면한다(7:29). 고린도 교인들은 이같이 재림이 임박하였기에 주를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여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고 있다(16:22). 그러한 사랑의 표현으로금욕적인 삶을 바울은 요청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재림 때까지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전하라고 명한다(11:26). 아울러 미래적 사건으로 성도들의 몸의 부활이 있음을 바울은 밝히고 있다(15장 전체에서).
빌립보교회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날 즉 재림의 사건(2:16)과 소망에 대하여(3:20) 언급하고 있다. 빌립보교회는 처음부터 바울의 사역에 동참한 교회였으나 사역의 방향에 있어서 지상적인 성숙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3장). 이에 바울은 재림의 사건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땅에 속한 것이 아닌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구원의 완성으로(3:20), 그리고 자신의 사역의 궁극적 목표를 빌립보교회의 사역과 연결시키고(2:16) 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전도의 처음부터 재림에 대한 강조를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살전5:1; 살후 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 재림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나는 재림에 대한 소망이 죽은 자들로 인해 상실된 듯하다(살전 4:13). 그리고 재림의 시기에 대한 불확실성(5:1)과 이미 재림은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살후 2:2). 또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로 인한 규모 없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 같다(5:14; 살후 3:11).
이러한 재림과 관련한 문제들에 대하여 바울은 편지 전체에 걸쳐서 정리하여 주고 있다. 재림의 시기는 언제라도 가능하다는 것(5:3)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 전 징후들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살후2:3-12). 또한 소망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재림 때에 산 자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차서에 대하여 언급함으로 소망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4:13-18). 그리고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와 구원함을 받을 자가 구별됨을 또한 밝히고 있다(살전 1:10).
이러한 가르침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다름 아닌 재림은 확실한 것이고 그때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지고(살후 2:2), 항상 낮에 있는 사람들처럼 준비하고 있어야 하며(5:6),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으로 재림을 준비하여야 할것과(5:23), 바로 그러한 삶이야말로 바울의 자랑거리임을 언급하고 있다(살전 2:19-20).
비바울 공동체
먼저, 베드로 공동체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역시 베드로 공동체 내에도 재림의 약속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고 이성적으로 접근한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다(벧후 2:4-7). 베드로 역시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고 밝힌다(벧후 2:10). 베드로는 재림의 사건을 임박하긴 하였지만(벧전 4:7, 17) 미래적 사건으로 보고 있다(벧전 1:5, 7, 13; 4:13; 5:1, 4). 베드로에게 있어서 재림의 사상은 그 공동체가 당면한 고난과 직결되어 있다. 지금은 고난을 당하지만 재림시에 있을 영광에 참예하는(4:13; 5:1) 그리고 구원(1:5)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을 목자장의 나타나심(5:4)으로 표현하여 목자의 역할과 연계시키고 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재림이 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벧후 3:10;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지금의 삶은 거룩하며, 흠이 없고, 경각심을 가지고 근신하며 기도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4:7).
베드로에게 있어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재림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회의를 가진 사람들의“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앞으로 재림 시에 있을 하늘과 땅의 멸망과 새 창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벧후3:5-13). 이러한 대 변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그날을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이다. 이 같은 소망과 거룩한 삶은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요, 선행과 사랑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 공동체에도 역시 주의 재림은 임박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약 5:8). 여기에서 재림이 언급된 것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특히 심판자가 가까이 와 있다(5:9)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도들간에 싸움과 원망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야고보 공동체에 나타난 차별주의 세속주의는 성도들 사이에 원망과 불평 그리고 싸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참 종교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심판주의 재림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히브리 공동체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하게 초림시의 제사장적 사역과 구분되어 제시되고 있다. 첫 번째 오심은“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사역을 위한 것이고, 두 번째 오심은 죄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히 10:26, 27). 이 공동체는 신앙 후의 고난 그리고 예수님의 구속사건에 대한 회의로 인해 신앙을 포기하려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10:39). 이들은 하나님의 신원과 영원한 도성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제사장적 사역의 완전성을 굳건히 믿는 가운데 주님의 재림을 통한 인내, 보상, 그리고 소망이 필요하게 되었다.
요한 공동체의 세계관은 이중적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상과의 관계며 다른 하나는 시간의 종말론이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는 핍박과 미움과 고난이 있겠지만 그것은 영속적이 아니며 한시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요일 2:29)과 함께 종말의 사건을 맞게 될 것이다. 그때는 심판의 날이자(4:17) 영광의 날인 것이다(3:2). 신자들은 주의 재림과 함께 그가 거룩한 것처럼 자신들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헬라어 원문은‘깨끗함’대신‘거룩’으로 번역되어야 함). 그때에 신자들은 주님을 볼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같은 사건이 소망으로 화하며, 고난을 극복하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비록 성경 본문에 대한 논증의 방식은 취할 수 없었지만 이상에서 간략하게 재림 사상이 초기 기독 공동체들의 제반 삶의 자리와 밀접하게 제시되었음을 보았다. 공통적 특이점은 각기 공동체들이 구체적인 상황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신앙 후에 고난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소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가장 강력하게 제시된 사상이 주님의 재림의 사실성과 그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다.
그러한 소망이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구별된 삶의 상실과 또는 참 종교성의 실현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재림에 대한 소망과 함께 신자들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때는 그들의 모든 고난이 신원되며, 영광스럽게 되며, 이 세상의 죄와 악의 세력들이 심판받는 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날은 구원의 완성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완전한 변화가 실현되는 날임이 강조되고 있다. 특기할 사항은 재림 후에 어떻게 될 것에 대하여는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그 날은 갑자기 도적같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늘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바울만이 재림 전의 징후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재림의 복음을 전하는 성결교회는 실망하고, 고통을 당하며, 때로는 구별된 삶을 상실한, 또는 소망을 상실한 신자들에게 이 복음을 되찾아 전파함으로 진정한 소망과 영적 활력을 되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각심을 갖고 성결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재림의 복음을 전하는 성결교회는 실망하고, 고통을 당하며, 때로는 구별된 삶을 상실한, 또는 소망을 상실한 신자들에게 이복음을 되찾아 전파함으로 진정한 소망과 영적 활력을 되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활천 200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