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자연신학의 근거?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에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고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I
위에서 인용된 짤막한 선언 뒤에는 우리 인류가 살아온 시간으로는 다 잴 수 없을 영원에 대한 신학적 통찰이 숨겨 있다. 우리의 삶의 근원이 우리와 다른 것으로부터, 우리가 다 다를 수 없는 영원으로부터 왔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이 주신 삶의 진리는 긍정 그 자체와 연관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긍정은 절대로 자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어두움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 이 긍정은 온갖 슬픔과 괴로움, 고통과 절망, 죽음과 같은 극단적 자기한계의 현실과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어야 할 삶의 기쁨 감사 찬양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그레고리(Gregory von Nyssa)는 형 바실레우스의 죽음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누이 Macrina를 만나 위로를 얻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런데 정작 그 누이마저 생명의 촛불을 모두 소진 한 채 이제 죽음의 언저리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죽은 자의 삶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죽음을 품고 사는 인간의 삶의 근거와 희망을 묻기 시작한다. 그의 경험은 곧 우리의 경험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존재하는 영원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이 짧은 삶 속에 영원한 그 무엇이 담겨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영원의 가치를 단지 이 삶의 유한성 속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아픔을 감내하여야 하는 그 현실 속에 영원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찬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누군가 삶이 유한하기에 삶 속에서 무한의 근거를 발견한다면 죽음은 그 무한으로 이르는 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은 수수께끼가 아니고 무엇인가? 죽음으로 둘러싸인 우리가 이 유한한 생명의 의미를 발견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인간들은 지금 여기 우리가 경험한 온갖 부정과 모든 어둠을 넘어서 단지 한 순간의 직관과 약속이란 형태아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원한 이상의 세계를 참된 것이라고 인정 할 수 있을 것인가? 혹시 이 모든 것이 철학의 괴변이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죽음이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맞서게 되는 삶의 애매모호성과 죽음을 통해서 얻은 삶의 의미의 비장함은 이 질문들이 종국에는 자연신학의 질문 곧 신의 질문과 만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한 사람의 영혼의 기원에 대한 중세시대의 논의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서구 신학의 역사 전체에 깊숙하게 자리잡은 영과 육의 이원론은 "죽음 앞의 삶"이란 극적인 긴장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영 육 이원론은 죽음이 인간의 삶의 무의미한 종국이 될 수 없다는 자연적 인간의 소박한 소망을 담아내는 도구가 된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죽음의 정의로 보는 서구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는 영혼 불멸과 연관되어 있으며 "영과 육의 분리"를 통한 첫째 죽음과 "하나님의 忘却"으로 표현된 둘째 죽음을 각기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 서구 역사에서 계시의 하나님의 이해보다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이념이 강조되었는가 하면 시간의 의미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역사성에 대한 통찰 대신 영원성의 이념이 더 강조되었다.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영혼의 자연적 삶의 근거로서 사유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죽음 앞에 서 있는 우리 인간들의 질문은 자연히 유한한 시간의 근거로서의 무한을 신과 연관시킬 준비가 되는 것이다.
삶과 그 한계를 묻는 자연신학은 자연신학 이후를 전제로 한다. 인간의 죽음과 악의 현존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에 내 던져진 것이다: 이러한 자연신학에 대한 통찰은 정통주의가 자연신학을 배치한 순서에서와 그 역할에서도 분명하게 알게 된다. 하지만 혹시 죽음을 통하여 삶의 근원을 본다는 것은 죽음에 대하여 사유 할 수 없다는 난점을 교묘히 이용하는 유한자의 무한의 자기긍정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죽음은 오히려 우리 인간들은 넘을 수 없는 한계, 곧 죽음너머의 타자에 대한 무한한 거리를 표현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 죽음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그 생명의 의미를 다시 획득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그를 통하여 자연신학 자신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는 결국 인간의 죽음과 함께 그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는 일이요 더 나아가 우리 인간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될 것이다.
II
어거스틴은 자연신학을 참된 종교의 논리적 근거로 이해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추구하는 진리가 참된 종교의 내용이라면 그 내용은 이미 세상과 보편적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이 근원적 연관성이 알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 신이며 그렇기에 모든 진리의 근원 역시 오직 신이라는 일반적 신 인식이 기독교의 진리주장으로 변화되어 기독교의 보편성으로 이해 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신학의 이념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연신학은 가변적 세상에서 흔적처럼 남아 있는 진리의 보편성과 그것의 인식 가능성을 긍정한 것인 동시에 그 보편적 진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신학적 사유 속에는 이중적인 세계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향수가 있는가 하면 현실세계의 실존적 허무성의 경험도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존재의 반영으로 사유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그 존재로부터의 일탈로서 말하게 하는 이 세계의 이중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세계의 이중성을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지평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존재의 근거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필수적이다. 즉, 선의 이데아등 인간의 정신 속에서 발견 될 수 있는 최고의 범주들과 신의 존재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이 차이의 인식은 세계의 유한성을 그것의 형이상학적 특질로 보게 하던 중립적인 인식의 태도를 변화시켜 신학적 인식으로 안내하게 된다. 즉, 나의 정신 안에 있는 이념(idea)들은 신의 은총의 초대로, 그리고 우리의 유한성은 그 초대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응답의 관계로 변환시켜 이해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차이의 인식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형이상학적 신학의 내용과 한계가 분명하여진다. 어거스틴의 경우에는 성육한 로고스에 대한 설명에서 그 차이의 한계가 인식된다. 살아있는 로고스로서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분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이 세계의 존재들을 회복시키는 중심적 위치에 서 있다. 자연신학에 의하여 제기된 목표이지만 자연신학에 의하여서는 이해 될 수 없는 초자연적 신앙의 기적이 우리의 현실을 인도하는 실제적인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은총의 현재가 지금 우리의 삶의 주된 원동력이며 이제 존재의 근원에 대한 본질 형이상학적 인식은 이 은총의 반영일 뿐이다.
둘째로 신적 존재과 인간의 이데아사이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이 세계를 "영원 - 존재 - 존재의 퇴락성"의 세 질서의 관계로서 보게 한다. 더욱이 이 차이의 인식이 더 구체적으로 이해 될 수 있는 장소는 놀랍게도 죄와 죽음이라는 피조물에게서 일어나는 가변성과 허무성이다. 따라서 그 죽음의 설명은 존재의 형이상학적 이해만이 아니며 신학적 관심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내의 否定性은 실은 은총에 대결하는 실존적인 오류이며 하나의 불가능한 것의 현존이라는 의미에서 모순일 뿐이다. 허무와 죄, 그리고 죽음의 현상은 인간의 초이념적 실체에 대한 실존적인 체험의 한 형태인 것이다. 이 세계의 생명들이 생명인 한 선한 것이지만 그것이 죽음을 향하는 한 악과 혼합되어 있다. 이 생명의 허무함과 무상함은 사실 인간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비 존재로 형상 되며 인간이 이 비 존재와 허무를 지향하는 한 존재의 왜곡이 발생하고 이 왜곡이 바로 죄와 악이다. 그리고 이것이 죽음을 낳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악의 본질은 실존적-윤리적인 문제로 이해 될 수 있으며 이 윤리적 지평에서 죽음으로 구체화된 형이상학적 유한성은 인간성의 부패에 의한 죄책의 결과로서 이해된다. 악이 선의 결여라고 하지만 죽음이 단순히 무한성과 만나는 인간의 유한성의 표식이라고 치부 될 수 없으며 죽음이란 사태를 이해하는 개념들이 인간성의 한계개념으로 중립적으로 이해 될 수 없다. 그것은 실제적인 위협으로 우리를 파멸로 몰아 넣는 치명적인 敵이다. 유한성에 대한 일반적 인식으로서의 죽음이 단순히 유한성이 아닌 "하나님과의 유사성의 파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때만이 그래서 더 이상 죽음의 너머를 넘 볼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이 등장 하는 곳, "하나님의 침묵"속에서 이해 될 때만이 결국은 그 죽음의 극복이 이뤄지는 구속사역의 의미가 나타나며 이 세계의 근원에 대한 답변이 찾아지도록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한성을 넘어 이 무한성에 참여하게 되는 회복은 단지 유한과 무한사이의 연속의 여부를 묻는 사고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피상적인 관찰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플라톤주의에 남아있는 듯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성서의 구속사를 철학적 언어의 도움을 받아 해명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자연신학의 가능근거는 세계의 존재전체가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게 되는 장이 되는 종말론적 희망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됨으로서 이제 저 자연신학의 목표가 비로소 완성되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이 형이상학적 언어의 세계가 감당 할 수 없는 신비의 출현이며 그 출현으로 인한 언어의 궁핍과 가난이 드러나게 되는 사건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은총뿐이며 이 은총의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는 것은 은총으로부터, 對-自然으로부터 임한 것이다. 소위 무에서는 무(ex nihilo nihil fit)만 가능하다고 하는 자연의 한계에 거슬려 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현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신학은 은총 하에서 가능한 이 세계의 재발견이다. 죽음이 갖는 무의 세력은 커다란 신비이지만 더 큰 신비인 하나님의 죽음 앞에서 생각되어야 할 사태이며 그래서 우리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시적 사실에서 알려지는 세계의 희망을 바라는 탄식의 구체적인 징표이다. 자연신학은 계시신학을 추구하며 그것이 없이는 벙어리 일 뿐이다. 그럼으로 자연신학은 하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내용를 얻은 것이다.
III
현대의 신학자중에서 칼 라너(Karl Rahner)의 공헌은 - 그의 의중과는 관계없이 - 신의 익명성을 우리들에게 친밀하게 만든 데에 있다.그 결과 익명성이야 말로 신 의식 가운데 가장 명료한 것이 되었고 누구나 전제하고 시작 할 수 있는 소여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라너의 익명성은 우리에게 현대적이며 또한 창조적인 자연신학의 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은 인간의 삶 자체가 초월에로의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는 초월 신학적 착상이 잘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대답 할 수 있는 선험적인 능력(potentia obeidentialis)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신적 넓이에로의 인간적인 참여가 사실이고 실존론적으로 확인 된 것이다. 라너에게는 신적 체험과 인간의 의미 체험의 단일성이 당연시되고 이 단일성은 이미 구체적으로 즉자적인 인간존재의 해명으로서 신학적 전제로서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구체적 근거는 인간의 죽음이다. 라너는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동시에 인간의 죽음을 성사 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라너에 의하면 인간의 죽음은 현실적이며 실존적이다. 죽음의 모습들은 다양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과정이다. 분명한 것은 죽음은 전적으로 현실적 삶의 마침인 것이다. 한가지 유의할 점은 삶의 마침으로서의 죽음이 우리의 삶이 가져온 의문 투성이의 실존의 체험이나 어리석음의 경험들의 최후의 말(Versteinerung seiner bisherigen Banalitaet und Fragwuerdigkeit)은 아니며 우리의 삶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와 평행 되게 영원성이란 시간의 지속이라든지 육과 분리된 영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영원성이란 자기자신을 시간 속에서 실현시킨 정신과 자유의 형태에서 찾아 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의미의 지평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 인간의 삶을 삶으로 특화 시키는 것, 즉 정신이며 그것도 "영원의 의미를 추구하는 정신"이다. 이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은 죽음을 육체적 비극만이 아니며 영원에 이르는 한 통로가 되도록 변화시킨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자기의 여정을 이해하고 있다. 인간전체는 이미 죽음에로 불러져 있는 자이며 죽음에서부터 자기 전체성을 통하여 실존적인 존재이해를 획득하는 것이다. 비록 죽음은 삶의 종말이지만 자유의 역사의 완성으로서 절대적 비밀이신 하나님에 직접 대면하는 사건이다. 삶의 마침으로서의 죽음은 부정성의 최고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삶의 궁극적 완성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죽음과 삶의 관계는 죽음의 한계에서만 삶이 가능하고 삶의 전체적 의미는 죽음 안에서만 이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 관계는 삶이 죽음을 넘어선 그 무엇으로의 목적 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인식론적으로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넘어선 그 이상의-무엇(das Mehr)과 연관되어 있을 때뿐이다. 인생이 가진 최고의 가능성으로서의 "신 앞에 섬"은 죽음을 통해 가능해 진다. 죽음이 갖는 의미는 경계로서 그 이상을 넘어 가고자 하는 인간의 최후의 가능성일수 있게 된다.
하지만 라너에게도 죽음은 "그 이상의 무엇을 향한 통로"라는 막연한 언어로만 규정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죽음이 이해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해야 하며 그와 더불어서 생각하여야 한다: 신앙적으로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여타 인간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완전한 존재 가능성이 열리는 것으로 라너는 이해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며 그를 통하여 비로소 인간이 자신의 영생과 하나님 바로 그 분을 하나의 희망의 대상으로 파악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 선 이성은 죽음 속에서 자기가 희망하고자 하는 것을 희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 편 예수의 죽음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여진 "대상과 사유의 직접성"은 그의 신학의 초월 인간학적인 측면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이제 예수의 죽음 속에서 동시에 다른 인간의 죽음후의 주체성도 적극적으로 긍정되고 있으며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자기완성의 가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죽음 후에 대면 할 수 있는 자기 밖의 더 이상의 무엇인 신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라너는 죽음의 순간 성취된 모든 인간 자아의 실존적 완성은 자유라는 인간의 본래성의 행위 안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죽을 수밖에 없고 또 죽음아래 존재하는 인생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규정 할 수 있는 영원의 흔적은 다름 아니라 위에서 지적한 바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범적으로 보여준 자유와 책임성의 영역이다. 이 영역(자유와 책임감)을 통하여 영원은 자기를 유한한 시간 속의 운동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복된 죽음 하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결과와 인간의 본래성의 일치가 이제 죽음이 간직하고 있는 삶의 신비와 하나님과의 직접성아래에서 통전적으로 열리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라너에게도 자연신학의 궁극적 가능성인 인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빛 아래서만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제기 할 수 있다. 죽음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선험-실존적 구조로서 자유의 성취라는 명제는 세상의 비밀이신 하나님이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선험적으로 역사에 자신을 드러내신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는 경계선은 인간의 죽음이 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죽음을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의 가능성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실존론적 구조 안에서 사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영원한 것에 대한 통로라고 이해한 라너는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신 인간의 삶을 각자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이므로 모든 인간은 이 최후의 결정적 사건을 최고의 자유의 완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너는 이 현실의 삶이 어떤 초월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예수의 죽음이 성취한 그 결과를 어떻게 내가 나의 죽음가운데서 직접 바랄 수 있게 되었는가? 그렇게 바랄 수 있는 죽음후의 내 자신은 누구인가? 그는 결론에 앞서 상황을 전제하는 선결의 오류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이미 모든 것이 죽음 안에서 결정 될 수 있었다면 우리는 현실의 삶의 미래를 바라 볼 수 있는 아무런 이유를 갖지 못할 것이다. 진정 넘어야 할 인간의 삶의 초월적 동기들이, 그들의 삶의 해방과 완성이 어떻게 그 삶의 마지막으로서의 죽음이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만일 죽음이 그 해방의 문이라면 오히려 희망과 해방 그리고 화해의 실현을 향해 노력하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수 있다(koennte). 현실적으로 우리는 죽음이 커다란 신비라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해석이 하나님의 죽음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일까?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죽음 속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분이다. 그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을 위한 해명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에 대한 또 하나의 낯선 죽음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죽음 속에서 우리는 죽음을 죽이는 그래서 삶에게 삶을 되찾아 주는 그런 낯선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죽음은 인간이 절대로 근접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며 그 길의 불가사의한 은총이 인간의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한다.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을 향한 타자적 사건으로서 그 타자성은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아무 것도 기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죽음은 그 앞에서 침묵한다.
IV
죽음을 이해하려면 자기를 부정하여야 한다. 그런데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죽음의 한계 속에 있으면서도 그 중 몇 몇 소수의 정신적 대가는 죽음을 이해 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보인다. 小我를 버리고 宇宙的 自我로, 우주적 緣起의 원리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런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생각하는 자아가 자신의 죽음을 주제로 삼으면서 그 한계를 알고자 하는 것은 죽음을 사변의 결과로 만드는 것이다. 엄청난 자기 수련의 결과로서 얻어진 죽음의 이해가 진정 그 깊은 의미에서는 단지 인간의 자기확인의 과정 중에 있는 모순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여지가 여기에 있다.
만일 이 죽음에 대한 진술이 참된 것이라면 해방의 경험을 전하게 될 것이다. 유한한 삶의 자기기만의 허위의식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죽음의 극복으로 경험된 해방은 다음의 필요조건을 채워야 할 것이다: 개체(Individiuum)로서의 인간이 갖고 있는 삶의 사회성의 의미를 죽음을 넘어 서 있는 善과의 관계에서 확증 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며(그것도 보편적인 경우가 아니라 그 한사람의 개체적인 관계에서), 이 죽음에 대한 언설은 죽음과 대칭하고 있는 일반적 삶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죽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만드는 삶의 근원에 대하여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자연신학이 삶의 의미를 주고 있는 듯이 보인 유한성의 범주에서(가능성의 제한이 가져온 실존적 효과) 본래적 사건으로 죽음으로서 파악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이해는 죽음을 삶의 과정으로 보고자 한다. 삶과 죽음은 대칭적이며 세계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개별적 죽음을 전체적인 보편적 인류의 삶의 한 구성적 계기로 생각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다시 죽음 그 자체의 극복이 문제시 된 것이다.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보려는 견해 속에는 삶과 죽음을 이중적인 대칭관계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삶 그 자체-죽음 그 자체:: 개별적 삶 - 개별적 죽음. 하지만 어거스틴과 라너에게 조차도 죽음의 삶의 한 과정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현상인 죽음을 삶의 사건으로 말하게 하는 원 근거였다. 즉 하나님-인간-죽음의 관계의 삼중성이 이미 그 사유의 한 복판에 사건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영과 육의 분리이건 아니면 영의 현실성의 실현으로 이해되던 간에 인간의 죽음이 인간의 삶의 연속된 과정가운데 있는 또 하나의 영원의 계기로 이해하고 싶은 그들에게도 참다운 생명의 허용은 예수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체적 역사 안에서만 인정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으로 이제 그들의 자연신학은 계시신학을 뒤따라서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다음의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 앞에 있는 하나님의 타자적 현실이다. 하나님의 현존이 인간적 죽음 한가운데 죽음의 형태로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 하나님의 현존에서 삶을 만나게 된다. 생명을 일으키는 구약의 루하흐는 그리스도와 연관이 없을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죽음을 나의 것으로 나의 이해가운데 가두어 둘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생들과의 차이를 나타내신 사건이다. 그 하나님의 현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타자적 현실로서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가장 구체적인 나의 이중적 현실(삶과 죽음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삼자적 임재"의 사건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용하신 절대적 존재의 사건이다. 예수의 삶의 시간이 영원과 연관된 인간의 시간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듯이 예수의 죽음이 보여준 죽음의 의미는 삶의 긍정으로서 삶의 절대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