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교회갱신과 일치운동
예수께서는 지상생활을 마치기 전에 유언과도 같은 두 가지 명령을 남기셨다. “하나가 되라”는 일치의 명령과 “증인이 되라”는 선교의 명령이었다. 한국교회는 지난 110 년 동안에 두 번째 명령이신 증언의 책임은 비교적 성실하게 수행하였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자타가 공인할 만큼 경이적인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가 되라는 일치와 연합에는 실패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아픈 문제가 무엇인가 ? 그것은 불행하게도 분열이요, 분파주의다. 온 세계가 운명을 같이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역사적인 전환기에 있어서 하나의 세계를 바라는 의지는 인류의 공통된 이념이며, 세계의 특징이다. 그러나 사분오열된 한국교회는 개교회는 개교회대로 교단은 교단대로 연합기관은 연합기관대로 예외 없이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음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는 본래 “지체는 여럿이나 몸은 하나” (고린도전서 12:12) 라는 일치신학의 기초위에 세워진 교회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신앙 양심의 자유”를 원칙으로 하는 개신교는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신학과 교회제도와 교파의 다양성을 가지고 성장해 왔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교회의 일치에 앞서 많은 지체들의 기구적인 병존과 연합에 있다.
그러면 이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성장한 한국교회의 연합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
Ⅰ. 한국교회연합의 기본적인 과제는‘신학의 창조적 다원성’을 정착시키는 작업이다.
지난날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는 다양한 신학의 조류들이 창조적 대화의 장을 포기하고 양극으로 대립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다원성 안에는 창조적 다원성과 혼란을 야기하는 다원성이 있다. 한국신학의 현주소는 다분히 후자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근본주의 보수주의에서는 다원성 자체를 거부하고 획일적 입장을 고수하려고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자유주의적인 진보주의도 자기들이 주장하는 입장을 고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에서의 신학의 다원적 현상은 배타적 갈등구조를 갖게되었다.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포기해야만 대화할 수 있다는 배타적이고 정복적인 이런 갈등구조는 한국신학이 안고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배타적 획일주의를 보수주의나 진보주의 양쪽이공유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자기 교파의 교리를 절대화하고 성경과 동일시하고 교리에 잠재되어 있는 일반성을 간과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이 교파의 분열로 나타난 역사를 한국교회는 수없이 경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지체들의 전체적인 연합을 위하여 신학의 창조적 다원성의 정착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조적 다원성이란 우선 자기의 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심화시키는 다원성을 말한다. 보수주의는 보수주의 특성을 더욱 심화시켜 최선의 장점을 창조해가며 진보주의는 진보주의대로 예언자적 참여의 전통을 심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상대방의 독특한 신학적 노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부터 창조적 다원성은 시작된다. 창조적 다원성의 정착을 위해서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공통점을 확보해야한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예언자들은 진보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같이 야훼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촉구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출발점을 가졌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과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중심 메시지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있을 때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함께 비판을 가하여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진보주의가 지나치게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와 같이 윤리적 합리적 기독교로 변질시키거나 「포이에르바하 (Ludwig Andreaes Feuerbach1804.7.28-
1872.9.13)」와 같이 신학을 인간학으로 변질시킨다면 보수주의는 이점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보수주의가 지나치게 성경의 내용을 축소하여 한쪽만을 절대 화한다면 진보주의는 전체적인 시각에서 이를 비판해야 하며 역사의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강조해야 할 것이다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4.8. ~)」교수는 현대 신학의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정체성과 연관성을 어떻게 균형 있게 조화시키느냐하는 것이라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주장했다.
복음적 사도적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교회의 사명을 정체성의 문제라고 한다면 현대인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해결하는 교회의 실천 (Praxis) 을 연관성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현대교회에서 정체성의 문제에만 일방적으로 집착하면 연관성이 약해지고 반면에 연관성의 문제에만 일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면 정체성이 약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보수주의는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반면에 진보주의는 연관성을 강조함으로써 각각 한국교회의 신학의 폭을 넓히며 연합운동에 기여할 수 있으며, 또한 한쪽으로 치우치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서로 견제하며 보완함으로 교회 연합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Ⅱ. 한국교회는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의 벽을 헐고 겸손한 자세로 서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는 각각 자기의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라(빌립보서2:4)” 이것이 하나 되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이 말씀은 물론 자기 일에 먼저 충성해야 하지만 남의 처지도 생각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기 집착에 지나치게 빠지면 그것은 하나 됨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자기의 주관적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어버리면 마치 굴속에서 저쪽 끝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서 하늘의 넓이를 재게 된다. 이것을 터널뷰 (Tunnel View) 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늘이 굴속에서 보는 구멍만큼 밖에 안 되는 작은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상대방을 이해하고 높여주는 그곳에는 싸움이나 경쟁의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고정관념은 자기만을 높이고 남을 낮추는 교만으로 통한다. 그리고 교만은 분열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고정관념이 밖으로 표현될 때는 어떤 특수의식으로 변모하여 “나는 너와 족보가 다르다”는 식으로 신분의 벽을 만들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죄인을 상종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신분과 자기들의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바리새인보다는 세리가 더 의인으로 보였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서로 연합할 수 있는 길은 개교회건 교단이건 이런 우월의식을 버리고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교회와 교단이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경쟁의식이 강해지고 남과의 비교의식이 생기며 그것이 승부욕으로 이어지면 자기 과장에 빠지게 된다. 이제 한국교회는 보다 냉정한 자세로 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의 건물을 더 크게 더 높게 올리는 것도, 교역자들을 양산해내는 것도,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것도 모두 중요하지만, 교회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총체적 접근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교회의 침체는 가속화 되어져가고 있고,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져 가고 있음에도 한국교회가 이렇다할 개혁의 기력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내 교회 내 교단만 계속 성장하게 된다는 고정관념은 당장의 논리로는 맞는 말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홍수가 나서 강둑이 무너져 강물이 넘쳐 들어오는데도 내 집 담벼락만 잘 보수하고 지킨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 한국교회가 부흥하면 모든 교회가 부흥하지만, 한국교회가 쇠퇴하면 모든 교회도 따라서 쇠퇴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자기주장만 옳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아니하면 한 국교회 역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서구교회와 같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Ⅲ.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시대적인 요청이다.
근년에 와서 한국교회 안에는 연합운동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그 관심이 커져가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최근에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주최한 “ NCC 는 어디로” “한기총은 어디로”라 는 제목의 심도 있는 토론회가 있었다. 이런 모임은 NCC 와 한기총 같은 큰 연합기관들이 하나가 되어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하나의 연합기관을 만들어 보려는 희망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연합기관의 통합이 당장에 온 교회가 하나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현실을 현실대로 인정 하면서 두개의 현실에서 하나의 미래를 창조해 보자는 시도이며, 지체가 아무리 많아도 ‘한 몸’에 붙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연합하여 궁극적인 일치에로 향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 안과 밖에서 보는 시각은 NCC 는 진보적인 연합기관이고 한기총은 보수적인 연합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연합기관을 진보와 보수의 대립기관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를 상호 대립하는 기능으로 보기 보다는 상호 보완하는 기능으로 생각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그 이유는 보수는 진보를 필요로 하고 진보는 보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수는 진보를 향해 문을 열어야 하고 진보는 보수를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타락한 세상, 어두운 세상에 대항할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 교회가 복수종교 사회에서 Majority를 숫자로 자랑하지만 사회의 범죄율이나 도덕적, 정신적, 타락 현상을 감소커녕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추세를 놓고 사회의 비판적 시각은 매우 따갑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의 무력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부패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부패의 세력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세력이 약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안으로는 한 목소리로 지난날의 많은 과오를 회개와 고백을 통한 교회 갱신에 힘써야 하고 밖으로는 힘을 모아 세속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힘의 역학 관계를 잘 안다. 그것은 조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다른 지체들이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연합하여 하나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은 연합은 그리스도의 명령이요, 시대의 요청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지금 통합과 조화에서 일치와 공동창조의 시대로 급하게 변해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감하게 과거 질서의 유산인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갈등구조에 종지부를 찍고 하루바삐 온 교회가 연합하여 교회의 새로운 미래상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