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리스도는 다시 사셨다.
(83-89)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우리는 제자들에게서 두 가지의 대조적인 모습과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삶의 의미와 의욕과 희망을 잃고 신음하는 모습이요, 둘째는 이와 대조적이다. 초인간적인 확신을 갖고 거리를 활보하는 용기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엄청난 번화가 한 시간 후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 놀라운 변화는 단 한 가지 사건에 기인한다. 그것은 인간 그리스도가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인류 역사상 십자가에 달렸다가 무덤에 묻힌 사실 이상으로 완전한 비극과 실패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건은 모든 것의 종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인류에게 하나의 희망을 약속해 주는 사건이었다. '존 마스필드'의 희곡 '예수의 심문'에 보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책임을 맡은 '롱기우스'라고 하는 로마의 백부장은 그의 책임 수행을 끝내고 '발라도'에게 돌아와서 그 결과를 보고했다. 그 때 '빌라도'의 아내 '프로쿨라'는 이 백부장에게 그 적수가 최후에 어떻게 죽었는가를 물어보았다. 또 그 여인은 "당신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시오" 하고 물었다. '롱기우스'는 "아닙니다.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그 여인이 "그러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죠?" 하고 물으니까, '롱기우스'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는 로마사람이나 유대사람이나 그의 진리를 막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희곡에 표현된 두 사람의 문답은 '갈보리'의 사건이 일체의 종결이 아님을 입증해준다. 이 사건은 끝장이 아니었다. 이 사건이야말로 새로운 삶에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무덤을 깨치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신 것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증명할 수 있을까? 부활의 증거는 확실하다. 성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열 두 번이나 친히 나타나셨음을 기록했다. 세 번은 복음서와 관계없는 기사로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셨고,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밧모' 섬에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미래에 있을 세계상을 계시하셨다. 아홉 번은 복음서에 기록되었다. '막달라 마리아' 등 부녀들에게, '시몬 베드로'에게, '엠마오'로 가는 두 청년에게,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주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갈릴리' 호반에 있는 제자들에게, 산 위에서 열 한 명의 제자들에게, 형제 '야고보'에게, 그리고 최후 승천하실 때 부활의 주는 나타나셨다. 위의 모든 증언은 모두 독특한 의의와 가치를 지닌 명백한 역사적 사실들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위에 말한 문서 상의 증언 뿐 아니라 그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였다. 십자가의 사건이 있은 지 50일 후에 예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용감하게 전했다. 실망과 낙담 속에서 신음하던 그들이 이렇게 생명과 환희에 넘치는 사람으로 변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생긴 성격의 변화였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 한 가지 사실이 그처럼 열 한 제자의 생애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의 체험적인 확증으로만 알려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모든 사실이 한층 더 견고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부활신앙이 그리스도 교회의 탄생을 초래했다는 것은 한층 더 역사적 사실이다. 교회가 복음으로 전 세계를 정복하려고 출발할 때, 교회의 중심 메시지의 내용은 지나간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름으로 서 있는 그리스도 교회는 벌써 오래 전에 이 땅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 것이다.
과거 2천년의 역사를 통과하면서 교회는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맹렬한 공격과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단 없이 꾸준히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게 한 원동력이 무엇인가? 그 힘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력이었다. 그런고로 사도행전의 증언은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행 2:24)고 했으며,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생명의 주"(행 3:15)라고 불렀다. 부활하신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살아 역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능력은 사망의 권세를 파괴할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이었다. 이 부활의 증언은 예수가 죽은 후 제자들의 선교의 주제였다. 그리고 이 부활의 증언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이 부활의 증언이 많은 청중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제자들 자신이 그 증언자였다는 점이고, 셋째는 그 증언의 내용이 예수는 현재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것은 초대교회의 선교 속에서 선포되었고, 그 증언자는 예수와 더불어 살아온 제자들이었고, 그리고 저들은 예수를 과거에 지나간 인물이 아니고 현재 살아 계신 분으로 증언한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점은 부활증언의 근본적인 성격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나 '바울'의 여러 서신들이 전하는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던가 살아서 나타나셨다던가 하는 이상한 사건을 현상적(現象的)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번 죽으신 예수가 부활하셔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부활에 있어서 어떤 신체적인 과정을 거쳤는지 또는 어떤 생물학적인 현상이 발생했는지 알 바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의 죽으심 후에도 제자들에 의해서 살아 계심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찾아 낸 생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제자들의 체험을 통해서 된 증언뿐만 아니라 예수는 그 제자들에게 선교의 지상명령을 내리시고(막 16:15 마 28:19-20) 제자들의 선두에 서서 그 선교활동을 인도하셨다는 점이다. '갈릴리'나 '유대'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전도하심같이 지금도 그리스도는 살아서 제자들의 선교활동을 인도하고 계시다. 예수의 선교활동은 그의 죽음으로서 중단된 것이 아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예수의 선교활동을 교회가 인계 받았거나 혹은 교회 지도자에게 이양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선교활동의 주체는 그리스도이다. 오늘의 세계교회를 영도하시는 참 주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깊은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해준다. 예수가 죽음에서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확증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동인 동시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결정적으로 확언하는 대 사건이다. 고로 사도 '바울'은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결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2-3)라고 말했다. 참으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를 믿는 자들은 그와의 친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영원히 생존하시며 그를 믿는 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다(마 18:20). 둘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본질은 십자가에 있고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義)이면서 우리의 죄, 하나님의 심판이면서 우리의 사망을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류에게 최대의 문제를 제기하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 항구적인 해답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십자가만으로 구속의 사업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영원히 죄 가운데 있으리라."(고전 15:17)고 했다. 그러므로 주의 부활은 구속의 십자가를 역사의 무덤에서 불러내어 영원한 십자가가 되게 한 것이다. 부활 때문에 십자가는 영원한 것이 되며 현재성을 갖고 우리에게 그 속죄력(贖罪力)을 준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과거의 주이시지만, 부활의 그리스도는 현재의 주이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주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현재의 주이신 부활의 그리스도를 동일시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부활을 이해할 수 없고, 부활 없이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분리할 수 없으며 동일선상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부활로 인하여 그리스도는 영원히 신음하는 죄인의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목표가 되는 것이다. 주의 부활은 십자가의 속죄력을 확실케 해준다. 그것은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살아났다"(롬 4:25).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사죄의 확실성을 믿게 되며 육과 죄를 극복하는 힘을 얻게 된다. 십자가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은 부활로 인하여 영원히 긍정되며, 또한 장차 있을 육체적 구속의 소망이 된다(롬 7:). 부활이 없이는 십자가도 구원도 있을 수가 없다(고전 15:17).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혁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근본이다. 셋째로, 부활의 의의는 미래적인 면에서 최후의 승리를 약속해 준다. 부활하신 예수의 세계정복은 우리의 목전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적은 아직도 근절되지 않고 도처에서 강하게 도전해 온다. 그러나 다시 사신 예수는 모든 원수를 그의 발 밑에 굴복시키고야 말 것이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불의와 허위와 증오로 가득 채워져 있으나, 결국에 가서는 생명이 사망을 이길 것이고 참이 거짓을 몰아내고야 말 것이다. 이 승리는 부활과 함께 영원히 약속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현재에 있어서의 승리뿐 아니라, 새로 전개될 미래의 승리를 약속하는 확실한 희망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부활의 약속의 성격은 장차 있을 죽은 사람의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전 15:12).
이 부활 속에서 우리는 약속 된 미래의 보증을 발견한다. 고로 부활의 신앙은 그들의 죄와 공포와 사망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는 높은 세계로 이끌어 올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자유 안에서 살게 한다. 이러한 소망 때문에 우리는 환란 중에서도 참으며 즐거워한다.
부활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생명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사실을 깨닫고 믿는 것은 우리도 장차 그와 함께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런고로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며 동시에 미래를 향한 소망의 기초가 된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현재의 삶에 있어서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미래에 있어서도 소망의 확실한 보장이 된다. 그리스도는 처음 익은 열매로 먼저 부활한 것이다. 그를 믿는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확신이며 우리의 소망이다.
위에서 필자는 부활의 의의와 그 증거를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신학적 이해나 설명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부활하신 주님의 최후의 분부와 위탁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부활하신 주는 부활을 믿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말씀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만왕의 왕 주님은 이 사실을 만방에 선포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이해할뿐 아니라 이 주님을 만방에 전하는 산 증인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