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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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사고에 있어서 종말사상은 일반적으로 자연스런 현상이다. 종말에 대한 생각은 기독교 신학에서만 말하는 특유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또는 민족적으로 누구나 종국을 예측할 수 있다.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미래적인 생활에 들어가는 것일까?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초자연적인 세력에 의하여 종말이 올 것인가? 등등의 물음은 일반적인 생각에서나 기독교적인 사고에서나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다. '플라톤'같은 철인은 개인의 영혼 불멸을 강조하고 인간이 죽은 후에도 영적 생명은 영원히 존재하리라고 믿었다. 범신론은 개인의 종말뿐 아니라 세계의 종말도 존재한다고 믿었다. '스토아' 사람들은 연속적인 세계(World cycles)를 생각했고, 불교에서는 모든 사물의 끊임없는 출현과 소멸의 세계적 연대(World's ages)를 말했다. 요는 어떤 형태이든 간에 사후에 생명이 존속하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 사람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갖는 종말신앙이다. 고로 '애디슨'(J. T. Addison)은 "인간의 영혼이 사후에 존속한다는 신앙은 갖고 있지 않다는 어떤 기록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인 종말사상은 막연한 것이어서 그리 신빙할 것이 못 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어떤 계시에 의한 것도 아니고 또는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종말론과는 달리 초자연적인 계시에 확실한 기초를 두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종말사상을 신학적 용어로 말세론 또는 내세론이라 부른다. 기독교의 종말론(Eschatology)은 무조건 장차 있을 어떤 사실에 기대하는 교리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종말의 때를 메시야가 오실 때로 보고 그것은 세상 말일까지도 포함한 것으로 믿었다. 고로 기독교의 종말의 개념은 현재의 메시야적 기대와 미래의 메시야적 왕국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말론의 연구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중심으로 한 시대의 종말, 즉 영광의 내세에 집중된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 교회 전 역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 개의 일반적인 해석이 있다. 하나는 미래에 있을 종말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로 현재적 국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미래적 개념을 강조했다. 초대 교부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완성될 미래의 가장 복된 나라라고 믿었다. 오랜 교회 역사를 통해서 종말론의 미래성과 현재성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알베르트 쉬바이처' 같은 사람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의 교훈 가운데서 종말적인 성격을 모두 삭제해버리려는 노력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면서 종말적인 강조야말로 '예수'의 설교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예수'의 교훈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한 미래, 즉 인간역사의 종국에 가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에 의하여 출현될 것이라고 그는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자유주의 신학의 거성인 '알베르트 리츌'은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들이 사랑의 동기에서 상호간에 공통된 활동을 위해서 만든 단체라고 주장함으로써 실제로 신약성서의 기본적인 교훈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분리시키고 말았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적 차원을 무시하고 현재적 성격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요소를 추방하고 완전히 상징적인 영역의 것으로 취급하여 '예수'가 교훈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통치권, 나아가서는 사회의 변혁을 가져오는 힘이라고 해석했다. 하나님의 힘이 인간의 생활과 사상 모든 영역에 침투되어 그것을 갱신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온다고 주장한다. 또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 'C. H. 도드' 같은 이는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예수'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다고 주장했다. 즉 미래는 이미 인간의 경험 속에 들어와 있다. 절대가 역사 안에, 영원히 시간 속에 들어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여러 학자들의 견해는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온다고 명백히 가르치신 '예수' 교훈을 일방적으로만 해석한 것이라고 하겠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개의 견해를 조화시킴으로 건전한 하나님 나라 개념을 세우려고 노력한 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면 '에밀 부르너'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 나라는 교회에서 시작됐으나 그 완성은 미래에 속한다고 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것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국면은 완전히 무시하고 미래적인 성격만을 강조하는 일부 보수적인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시켜서 이해하려고 했다.

주님은 언제 오시느냐 하는 시기문제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스스로 세 그룹을 형성하였다. 첫째는 후천년설(後天年設)을 주장하는 그룹이다. 첫 번 그룹의 사람들은 초자연적 힘으로써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누룩같이 침투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세계를 변화시키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게 되어 황금시대가 이 땅에 실현된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그룹은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의 재림이 있고 그 후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 중에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 그룹은 천년왕국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영적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면 위에서 말한 여러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개념일까? 신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현세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이라고 생각된다. 고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친 해석은 잘못이다. 그 이유는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인 두 성격을 조화한 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본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존재와 활동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을 의미한다고 본다.

또 누가 복음 17:20-21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질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보이는 형태로 오지 않는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실로 너희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동시에 성서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인 차원에 대해서도 여러 곳에 언급하셨다. 산상수훈 8복 중의 6개는 모두 미래에 가서 얻어지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마태복음 7:2-23에서 예수님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분하여 설명하셨다. 또 최후만찬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새로운 포도주를 마실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6:29). 그밖에 바울의 서간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국면과 미래적 국면을 동시에 강조했다(롬 14:17, 골 1:13, 고전 6:9, 15:50, 갈 5:2, 엡 5:15 ).

 

그리스도의 재림

기독교의 종말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구약성서가 주의 날, 즉 메시야가 올 것을 대망하듯이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을 대망하는 기사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신약성서의 중심 교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일부 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갖는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약성서가 증언한대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구름 타고 오신다던 그리스도는 그 후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울여야할 관심은 언제 실현될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의 재림 또는 종말적인 구원에 대한 막연한 대망이 아니라 현실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다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인간역사는 현실에서 의의 진리가 온전히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의와 불의의 싸움은 언제나 계속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안에서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 역사의 피안(彼岸)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져오는 종말적 역사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의미는 깊다. 그리스도가 모든 죄인들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 세상에 수육(초림)하심 같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속죄 주로서 또는 인류의 심판자로서 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재림하실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만물의 부흥이며 우주의 개조(改造)이다. 또는 성도의 부활이요 정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최후의 심판이 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 고로 인류의 모든 희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걸려있다. 그러면 언제 그리스도는 재림할 것인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 24:36)고 예수는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명백하게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림의 시일을 계산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니며 재림의 신앙을 욕되게 할뿐이다. 예수는 다만 생각하지 않을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경고하셨을 뿐이다. 이런 뜻에서 재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그것이 의심이나 실망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주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서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 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증거 될 때 분명히 주님은 약속대로 재림하실 것이다.

 

미래의 생활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에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인간들일 것이다"고 말했다. 이 말은 물론 현세의 생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현실생활의 포기는 본래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교(異敎)에서 들어온 것이다. 현실생활의 개선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둘 다 신약성서의 일관된 목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 속에는 현실 생활의 충실과 초현세적인 차원이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현세의 조직적인 생활을 희생하고 내세의 생활만을 중요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꼭 같이 내세 생활의 중요한 의미를 희생시키고 현실 생활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서의 역사관은 끊임없는 회전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의 선(線)과 같은 것이다. 역사는 하나의 종국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현재의 역사과정은 최종이 아니다. 때는 얼마 남지 않았다(계 10:6). 그러면 내세의 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내세에 있을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을 고찰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부활이요, 둘째는 최후의 심판이요, 셋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의 최후상태 및 믿는 자가 들어갈 영광의 세계다. 이런 내세의 생활들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시작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죽음을 정복했다.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신자의 마음 속에 거하는 그의 영은 예수의 재림과 함께 있을 최후부활의 첫 이삭이다.

죽음과 재림 사이에 사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자의 최후의 상태는 아니다. 최후의 상태는 신도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의 부활의 모형이다. 그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부활시켜 그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양이 되게 하실 것이다(빌 3:21). 심판은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며 인간이 행한 하나 하나의 행동이 심문을 받을 것이며, 이 때 심판자는 그리스도다. 최후 심판에 의하여 인간의 운명은 영원히 결정된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며 영원히 하나님의 품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요 3:36).

성서는 역사의 해석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가르쳐준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영광의 세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