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삶의 신비성
(259-265)
"반짝 반짝 작은 별, 네가 무엇인지 내가 알고 싶다."라고 서양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어떤 아이가 "반짝 반짝 작은 별, 내가 무엇인지 난 알고 싶다."라고 잘못 불렀다. 이 어린이의 잘못 부른 노래는 과연 우리에게 오래 전달되어온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 '자아', '인간'은 영원한 신비로서 우리가 항상 알아보려는 문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어떤 날 골똘히 무엇을 생각하면서 걷다가 어떤 사람과 맞부딪쳤다. 그 사람은 골이 나서 말하기를, "당신은 도대체 누구길래 길도 보지 않고 다니시오."하고 대들었다. 이때 쇼펜하우어는 "내가 누군지 나도 알기를 원하오"하고 대답하였다. 시편의 기자도, "사람이 무엇이길래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시8:4) 하고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무엇이냐? 하는 주제는 옛날부터 인간에게 문제가 되어 왔으며, 오늘에 와서는 철학적 사고의 초점이 되었다.
역사상 오늘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큰 문제가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나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물음은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하는 결단을 촉구하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원과 행방 목적과 이상에 대하여 항상 궁극적인 물음을 갖는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이며,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나의 삶의 좌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삶의 방향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이런 신비를 풀기 위하여 많은 사상가들은 여러모로 인간을 정의해 보았다.
옛날 희랍의 철인들은 대 우주에 대조된 소우주가 인간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의하여 말하기를,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영혼설에 의하면 식물의 영혼은 자양분을 섭취하는 것이고, 동물의 영혼은 감각이고, 인간의 영혼은 이성이라고 하였다. 히브리적 인간관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절대적 격리에서 오는 인간의 경외, 무서움, 떨림이라고 보았다. 즉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근거하여 사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상은 신앙하는 인간, 즉 종교적 인간을 말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들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기 형상대로 창조했다. 이것은 기독교 인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표시하는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존엄성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대화하고 서로 응답하는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피조자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인간상은 하나님 중심이다. 인간이 만드는 문화, 인간이 창조하는 예술, 인간이 창조하는 경제와 정치, 인간의 지상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고 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의 인간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가치인 존엄성을 범죄로 인하여 잃어 버렸다. 이런 인간이 존엄성이 무시된 상태를 종교적인 면에서 소외라고 한다. 그러면 이런 인간 소외를 초래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소외라는 말의 어원은 분리를 의미한다. 분리는 둘 이상의 관계자를 전제로 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소외 의식은 본래 인간이 하나님과 가졌던 원형적인 관계에서 떠나 암흑과 혼돈 가운데서 헤매고 있음을 말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격리되어 있다.
아우구스버그 신앙고백이 정의하는데 의하면 신에 대한 불신과 정욕이 죄라고 했다. 틸리히는 여기에 제3의 요소를 첨가하고 그것을 교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신과 정욕과 교만, 이 세 가지가 인간 소외의 표적이다. 이와 같은 틸리히의 정의는 사람이 소외 상태에 있으면서 대신(對神) 관계, 대인 관계에 있어서 가지는 능동적인 면에서 관찰한 것이다.
베르쟈에프는 소외된 인간은 현재 비인간화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비인간화는 자기를 신격화하는 방향과 인간을 동물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다. 그러나 소외 현상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종교적 요인만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사회로부터의 소외, 타인으로부터의 소외, 직업과 정치로부터의 소외, 가정으로부터의 소외 등등 여러 가지 요인을 초래하게 되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자연정복에의 역량을 증대시킨 인간 생활에 많은 편의를 제공하게 된 반면에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켜 놓기도 했다. 자연과의 지속적인 유대의 단절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켰고, 자연의 신비성 때문에 갖게 되었던 인간의 종교심은 걷잡을 수 없이 약화되고 말았다.
오늘날 노동자의 생산 과정에서의 소외, 즉 생산품으로부터의 소외 또는 타인으로부터 혹은 사회 집단으로부터의 소외 요인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급격한 사회변화 때문에 생기는 가치관의 혼란, 빈부의 현격한 차지,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 등은 세대 간의 대화를 단절시키고 사회 계층 간에 별개의 세계를 형성케 함으로 서로의 의사 소통이 안 되며, 어느 한쪽에 속하는 사람은 다른 쪽의 세계에 속하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회적 거리를 느끼게 되며, 서로 이방인시하는 고립감을 조성하게 되었다. 위에서 지적한 여러 가지 소외 요인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무기력해지고 공허해지고 불안과 초조감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절망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 그러면 어떻게 소외 현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신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칼·마르크스는 인간의 기본욕구는 빵을 얻으려는 데 있다고 보고, 인간은 누구나 빵 문제만 해결되면 이런 모든 소회 현상을 극복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대검찰관에 나오는 대중 속에, "내게 빵을 주시오. 그리고서는 당신 마음대로 나를 써먹으시오." 이와 같이 인간이 배가 고파서 문제이지 배만 부르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은 빵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동물이다. 고로 예수님도 인간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심으로 막스와 같은 사상을 배격했다. 시그몬드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파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쾌락을 지향하는 의지"라고 정의하고, 인간이 살려고 하는 강한 욕구만 있으면 현실에 있어서의 어떠한 소외 현상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 프로이트를 계승한 심층심리학의 창시자인 아들러는 "인간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정신면의 기본적 경향을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라고 보고, 인간이 남을 지배하며 살고 남에게 객관적인 인정을 받는 우위성을 지닌다면 능히 현실로부터의 모든 소외 의식은 제거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정신의학자인 빅터프랭클 박사는 인간의 기본적인 자세는 "의미를 지향하는 의지"라고 정의했다. 즉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는 충족감이요 사명감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보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에 대한 진실한 대답만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사회가, 나라가, 교회가, 그리고 인생 자체가 내게 무엇을 해 줄 것이냐보다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고 있는 가를 이해하는데 있다. 마치 존 에프 케네디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너의 국가가 내게 무엇을 하여 줄까 기대하지 말고 내가 나의 국가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것이 타당한 질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철인 칸트는 인간을 자연과 이성인으로 구분하고 자연인은 본능에 의해 살고 이성인은 당위, 즉 의무를 위해 산다고 했으며,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살기 좋은 과학 문명 시대에 왜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하며 불안을 느끼고 공포에 떨며 비관을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고통을 극복하지 못해서이다. 그러면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산다는 것은 평안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것이며, 살아 남는다는 것은 그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 박사가 유대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300만의 유대인과 함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그는 다른 죄수들에게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왜 자살을 않고 살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 때 어떤 죄수는 집에 두고 온 자녀들에 대한 애정을 차마 끊어 버릴 수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또 다른 죄수는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하신 여러 가지 재능을 다 쓰지 못하고 그대로 포기하는 것은 너무 아까워서 못 죽는다고 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나의 생애의 지난 날에 있었던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가지가지의 추억들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파산된 인생의 가냘픈 실오라기를 붙잡고라도 살려고 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나?"하는 분명한 삶의 의미를 갖고 사는 자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 속에서 찾는다. 먼저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정당한 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데서 의미는 찾아진다. 자신을 아끼라는 말은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 형성에 주력하고 삶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말이다.
과거 동양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관계를 상하의 신분, 질서의 윤리에 의해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무조건 복종하면서 살아왔다. 이런 도덕 체계 때문에 개인의 자유, 평등, 독립, 진보의 사상이 결여되었고, 자기 발전과 인격 형성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개인은 허무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니 무엇을 주고 그것을 바꾸겠는가" 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세상은 홀로 살 수 없다. 반드시 너와의 관계 속에서 찾는다. 사람을 인간이라고 부른다. 간자(間字)는 무엇무엇 사이라는 뜻이다. 고로 부자지간이니 형제지간이니 하는 이 사이가 바로 이어질 때, 인생은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 사이가 깨질 때, 인생은 온갖 비극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너와의 윤리적인 관계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 절대적이 못 된다. 고로 가장 높은 차원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서만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인생의 삶이란 먹고 입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남에 있다. 먹는 것만이 인생이라면, 동물과 무엇이 다를까? 동물은 죽음을 산다. 그러나 인생은 삶을 산다. 어떤 청년이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 문사(文士)를 찾아가 비문을 부탁했다. 그 때 이 문사는 고인의 생전의 업적을 물었다. 청년은 내 아버지는 세상에 와서 별로 좋은 일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나쁜 일도 하지 않았고 그저 평범하게 살다 갔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문사는 한참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한 끝에 간단하게 '먹다 죽다'라는 글 넉자를 써 주었다. 먹다 죽는 것이 인생이라면,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될 수 없다. 고로 아무리 돈이 많고 권세와 지식이 있어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참 인생이 아니다. 19세기의 실존철인 키엘케골은 인생을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하였다. 그는 먼저 심미적인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안과 허무로 끝났을 뿐이다. 그는 다시 도덕적인 양심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해 보았다. 즉 인생은 각자가 주어진 책임을 이행하고 완수함으로써만 참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였다. 그 이유는 인간이 양심적이면 양심적일수록 죄인됨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가장 높은 신앙의 차원 즉, 종교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써만 참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마주 설 때에만 인생은 신비에 쌓인 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새로운 삶의 차원이란 우리의 생활 기준을 항상 하나님 앞에 두는 태도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신비스러운 존재이다. 고로 자기 이상의 세계를 추구함이 없이는 무의미하다. 즉 절대자이신 조물주를 의존하고 살 때에만 삶의 신비를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