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수 교수와의 대담
(2000년 5월)
질문: 몰트만 교수님, 지금부터 드리는 질문은 잡지사로부터 요청받은 질문들임을 말씀드립니다. 시간관계상 질문에 대해 짧게 그러나 핵심적인 것만을 대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수님은 루터와 캘빈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캘빈 연구가로서 명성을 날리시기도 했는데 캘빈의 신학이 교수님의 신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습니까? 몰트만: 스코틀란드 신학자인 토렌스는 일전에 캘빈의 신학을 "부활의 신학"이라고 명한적이 있습니다. 캘빈은 부활의 신학을 강조한 신학자로서 특히 부활 후의 새로운 삶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저의 희망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부활의 신학은 캘빈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의 경우는 흔히 십자가의 신학으로 알려져 있는데 저의 희망의 신학은 그러한 측면도 담고 있습니다. 질문: 교수님은 1975년에 "성령의 능력 아래있는 교회"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곳에서 특별히 성령과 교회의 관계를 다루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교회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몰트만: 교회가 성도들의 공동체인 한에서 교회란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볼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은 교회의 그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선교와 봉사를 통해서 성령의 사역은 교회밖에까지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에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한다는 의미이지요. 질문: 교수님은 삼위일체론에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러한 삼위일체론에서 소위 삼신론적인 경향을 읽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몰트만: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정통교회가 주장하는 삼위일체론이었습니다. 세분의 하나님이 서로의 연합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것, 이것이 삼위일체적 하나됨입니다. 이들은 서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서로에 대한 관계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이해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납득되지 않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교수님은 이러한 삼위일체론이 신학과 교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까? 몰트만: 교회 안에서의 연합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형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말함에 있어서 서구 신학에서는 주로 주체에 대한 강조를 많이 했는데 반해 상대적으로 상호 관계는 등한시해왔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체와 관계는 어느 한쪽으로만 강조되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현대 교회 안에서 만연되고 있는 개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연합이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질문: 교수님은 이번 강연과 또한 책 속에서 성령을 생명의 영, 창조의 영으로서 이해해왔습니다. 일반적인 생명의 현상을, 예컨대 정치나 문화 그리고 여러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명운동을 성령의 사역으로 생각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혹시 영의 구별을 위한 기준이 있다면 무엇으로 보십니까? 몰트만: 캘빈은 성령의 일반적 사역과 특별한 사역을 구분했습니다. 일반적인 사역이란 모든 생명체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역이란 교회 안에서 구원을 주는 성령의 사역을 말합니다. 주의 영을 다른 영과 구별하는 기준은 지금까지는 계속해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축귀현상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질문: 교수님은 강연과 책 속에서 늘 만유의 회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기독교 안에서는 타종교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몰트만: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성서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는 언약입니다. 이러한 언약은 불의를 행하는 자나 불의를 당하는 모든 자에게 해당됩니다.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에 해당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창조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위 만유 회복설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표현 가운데 나타나는 보편주의란 뷔텐베르크적인 경건주의적 전통에서 생각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러한 배경에서 신학을 했기 때문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혹시 마지막에는 사탄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언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몰트만: 만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구원은 변형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것으로부터 선한 것을 만들어내실 것이라는 말이지요. 저는 마지막 심판의 첫 번째 과정은 이 변형의 과정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분명하게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이런 구원 보편주의에 대한 근거가 인본주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근거는 예수 십자가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의 구원적인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나의 결정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내 개인적으로 볼 때 몇몇의 인간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저의 입장을 구원보편주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질문: 교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란 책을 쓰셨는데 한국에서 "길"을 도교에서 혹은 유교에서의 "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타 종교안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길"은 진정 그러한 의미에서의 "도"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까? 몰트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타종교 안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길"은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에서 지칭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로서 말씀하셨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제자로서 그 길을 따라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도로서 이해되고 있는 것이 다소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에서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의미에서는 결코 아닙니다. 질문: 사실 몇몇분들은 교수님의 이러한 표현이 혹시 교수님이 종교적인 다원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갖고 있습니다. 몰트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전혀 그런 것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와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질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구원을 말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적인 종교요, 이슬람은 순종의 종교이고 불교는 다른 성격의 종교입니다. 질문: 이러한 질문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가 갖고 있는 몇몇의 질문들은 제기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몰트만: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종교간의 대화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과거보다 더욱 기독교인들로 만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하이델베르크 대학 선교학 교수인 테오준더마이어의 말에 따르면 독일의 학생들이 이슬람 권 학생과의 대화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듣고 자신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은 더욱 기독교적인 질문에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종교간의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가 와해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간의 대화에 기꺼이 임할 자세가 필요합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종교간의 대화에 부합한 철저한 신앙인이 먼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종교간의 대화를 지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상대주의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우리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교수님의 개방적인 신학적 태도를 볼 때는 혹시 종교적 다원주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질문: 몰트만 교수님,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오해들이 있거든요.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만 결코 종교적 다원주의적 경향을 갖지 않으신 거죠? 몰트만: 다른 종교에서는 도대체 구원에 대해서 결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종교간의 대화에는 간접적인 것도 있고 직접적인 것도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나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간접적인 대화가 있는데 이것은 매우 결실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우선적으로 "신"개념을 부정하고 있어서 직접적인 대화란 가능하지 않습니다. 저는 간접적인 대화를 지지합니다. 질문: 교수님은 "희망의 신학"을 쓰면서 억압받는 자들, 불의를 당하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진정으로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몰트만: 잘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질문: 맞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을 가능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시작으로 인해서 오히려 더 많은 핍박을 받아서 절망하고 정치적으로 낙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과 관련해서 질문된 것입니다. 몰트만: 교부들은 우리들의 죄에 대해서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의 절망에 대해 대항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절망을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운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을 바로 희망의 신학은 강조했습니다. 질문: 교수님은 두 개의 종말론을 쓰셨습니다. 약 30년간의 간격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어떠한 발전이나 변화가 있었습니까? 몰트만: 1964년은 "희망의 신학"이었고 1997년에는 성취된 소망의 신학이었다. 이 책 속에서는 세가지 점에 있어서 새롭게 얻은 지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현대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환경문제와 나의 아내를 통해서 얻은 여성신학적 관점입니다. 이 두 가지가 중심적인 것이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령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질문: 교수님은 사회적 책임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고 또 이러한 사회적 책임은 어떻게 교회 안에서 실현된다고 보십니까? 몰트만: 우리의 경우 설교는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설교에서 사회문제를 언급하고 사회의 불의를 지적하고 진리를 선포해야만 하고 정부의 거짓을 폭로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이 그렇게 했고 교회투쟁의 역사 속에서 마르틴 니이묄러 목사등이 그러한 일을 감행했었습니다. 그 이외에 교회에 속한 정치, 경제 사회적인 전문가들은 그들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과제를 바로 인식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서 황사현상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물론 병의 치료를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한 현상의 원인을 근절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외에도 사회에 봉사하는 의미에서 유치원이나 병원, 양로원등등 사회 도처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 곳에서 교회는 바른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질문: 몰트만 교수님, 제 생각으로는 마지막 질문일 것 같습니다만...교수님은 지금까지 8번이나 방문하셨습니다. 이런 방문들을 통해서 한국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고 또 교회에 대해서 많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위기에 처해있다고들 말합니다. 정체현상을 비롯한 사회적 지도계층들의 타락을 가리킵니다. 교수님이 아시고 있는 한국과 관련해서 어떻게 이러한 위기가 극복될 수 있겠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몰트만: 미리 말씀드리자면 나는 결코 성령은 아닙니다. 이곳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한국의 위기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요.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방문할 때 마다 특이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교회의 성도들은 오랜 기도생활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의 모 교회에서는 설교보다 더 긴 대표기도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질문: 사실 교회의 위기는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몰트만: 물론입니다. 세계 안에는 여러 가지 상이한 교회의 형태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적인 세계에 있었던 교회가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에서도 위기는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세계밖에, 예컨대 아프리카나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 나타나는 교회들이 갖는 위기도 있습니다. 각 나라마다 위기의 형태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 교회가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성이라는 것은 일상생활, 문화 등에서 나타나는 일치된 문화의 형태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이었습니다. 한국에는 짧은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 나름대로의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불교가 전통적인 문화를 형성했던 일본은 지금 불교후의 시대를 운운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럽에서는 그 역사가 오래됨으로 인해서 위기가 생겨나고 그 가운데서 새로이 태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질문: 십자가와 주의 이름이라는 말은 동일합니까? 몰트만: 기독교 역사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골고다 언덕위에 우뚝선 십자가입니다. 다른 하나는 콘스탄틴 황제의 꿈 속에서 나타났던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상징이었는데 이것이 진정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출애굽적인 의미를 갖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십자가가 참된 의미에서의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복음적인 의미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질문: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몰트만: 제가 먼저 질문하고 싶은데요,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호흡과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을 드리는 것은 성령의 본래적인 의미는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호흡이 없다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질문: 지금 말씀하신 맥락에서 드리고 싶은 질문은 교수님의 신학에서 성령과 문화적 현상과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달리 표현한다면 기독교 이외의 문화현상이 난무하고 있는 중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유할 수 있겠습니까? 몰트만: 다소 반복되고 있습니다만... 질문이 있습니다. 수많은 파편들, 예컨대 기독교, 이슬람, 불교등이 난무해있는 상황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무엇을 통해서 당신이 찾으시는 그것이 기독교임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질문: 그러나 몰트만 교수님, 당신의 말씀에 따르면 상당히 복음적입니다만, 제 질문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교수님의 신학을 다원주의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특히 교수님께서 성령의 포괄적인 역사를 말씀하시는 가운데 그러한 인상을 받은 것은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만... 몰트만: 도대체 어디서 제가 그런 의미의 글을 썼습니까? 질문: 물론 저 역시 그런 글을 정확하게 읽은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 반복됩니다만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몰트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서구 신학자들, 특히 종교다원주의적인 경향을 갖는 사람들 가운데 저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결코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질문: 교수님의 제자인 미하엘 벨커 역시 영적인 다원주의를 말하고 있는데 혹시 그것과 관련해서 더욱 의심되는 것은 아닌지요? 몰트만: 그가 말한 것은 성령은사의 다양성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종교적 다원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더 이상의 오해가 없기 위해서 질문드립니다만, 교수님은 성령의 역사가 다른 종교에도 이루어진다고 결코 믿지 않는 것이죠? 몰트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계를 보존하고 이끄는 의미에서 성령의 역사가 다른 종교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적인 의미에서 성령의 역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생명과 같은 개념입니다. 질문: 교수님의 신앙적인 삶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예컨대 성경 읽기와 묵상방식등 몰트만: 아침과 저녁에 기도합니다. 성경은 선별적으로 읽고 있구요. 묵상은 주로 걸으면서 합니다. 질문: 지금은 어떠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몰트만: 은퇴한 이후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전혀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은퇴 후에는 학교가 아닌 개인적인 측면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강연을 하고 글을 쓰고 등등 질문: 또 다른 관심이 있는데요, 교수님은 2차세계 대전에서 큰 체험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간단하게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몰트만: 이미 책 속에서 쓴 것입니다만... 그리고 이번 방문 가운데 있었던 설교 때 언급했습니다만.... 원래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되고자 했지만 전쟁을 통한 체험을 통해서 성경을 읽게 되었고 그 가운데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찾는 노력의 한 일환이었죠. 질문: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란 무엇입니까? 몰트만: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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