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진리

 

 

 

오희천

 

 

너희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4절)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한삼서 3-4절)

 

요한은 여기서 진리를 행할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요한이 행할 것을 강조한 진리는 어떤 진리인가? 먼저 진리라는 개념부터 살펴보자. 특히 성서에서 사용된 진리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요한은 두 종류의 진리를 말한다.“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2절)와 「우리가 행해야 할 진리」(3-4절)가 그것이다.“우리 안에 계신 진리”와 「우리가 행해야 할 진리」는 서로 다른 진리에 관해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어떻게 서로 다른가? 먼저 진리라는 말의 뜻에서부터 시작하자.


진리(眞理)는 참(眞) 결(理)이다. 그리고 진리 즉「참 결」은 그 결이 무엇의「참 결」이냐에 따라 두 종류로 분류된다. (1) 그 결이 모든 존재하는 만물의 근원을 의미할 경우 우리는 그 진리를 형이상학적 진리 또는 존재론적 진리라고 부른다. 만물이 거기로부터 비롯된 바로 그 근원을 말한다. 요한은 그 근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 진리는 바로 성자이신 예수이다. 바울은 그 진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느니라.”(행 17:28) 그 진리는 성부이신 하나님이시다. 그 진리는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2절)이다. (2) 한편 그 결은 사람들(人) 사이의 관계맺음(倫)에 있어서「참 결」즉 참 길(道)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 결은 인륜지도(人倫之道)를 의미한다. 우리는 그 진리를 윤리적 진리라고 부를 수 있겠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그 길을 걸었으며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걸은 그 길이 곧 진리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며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이다. 그 진리는 예수이다. 요한이 행할 것을 강조하는 그 진리는 바로 이 진리이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강조하는 진리는「인륜지도」로서의 진리이다. 사람이 마땅히 따라서 행해야 할 그 진리이다.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했을 때 바로 그 길이 그것이다. 예수는 참 길이다. 그는 참 결이다. (결과 길은 어원적으로 동일해 보인다.) 그리고 그 길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길과 진리와 생명은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그 길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길이다. 그 길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다. 우리가 행해야 할 진리 즉 우리가 따라야 할 그 길은 무엇인가?


요한에 의하면 우리가 따라야할 그 진리는 사랑이다. 요한은 4절에서 진리를 행하는 것에 대한 그의 기쁨을 말한 후 바로 5절에서 “서로 사랑하자”고 말한다. 요한은 이런 전후관계를 통해 진리를 행하는 것은 곧 서로 사랑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진리를 행할 때 즉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사랑은 구원의 조건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 안에 거하시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 14)

 

톨스토이는『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에서 사람은 서로 더불어 사는 존재이며 사람 속에는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사랑에 기초한 더불어 살음」에 의해 비로소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요소는 사랑에 필수적인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적어도 우리가 행해야 할 사랑에 있어서는 말이다. 내게 넘치는 것을 나누어 주는 것과 내게 부족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랑의 두 요소이다. 넘치는 것을 나누어주는 것을 아가페라 하며, 부족한 것 즉 내게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에로스라 한다. 아가페의 원형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가페의 원형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셨으며 예수님은 그의 생명을 인류를 위해 주셨다. 아가페는「무조건적인 베풀음」이다.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생긴다.「인간이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넘치도록 많은 것이 있는가? 없다. 인간의 소유욕은 무한하다. 그에게는 넘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넘쳐서 나누어줄 수 있는가? 넘치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넘치도록 할 수 있는가? 그릇을 줄여야 한다. 욕망의 그릇을 줄이면 넘칠 수 있다. 그 넘치는 것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줄 수 있다. 인간이 소유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넘쳐서 줄 수는 없다.

 

사랑의 또 다른 요소는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며 더 나은 것을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다. 성인들의 행위를 본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를 닦는 것이다. 예수를 닮고자 하는 것이다.


   사랑은 넘치는 것을 나누어 주고 부족한 것을 받아 채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욕망의 그릇을 줄여 남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가? 줄 수 있다면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 즉 동정이다. 동정은 기쁜 일을 당한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며, 슬픔을 당한 사람과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동정은 사랑의 형식이다. 어떻게 동정할 수 있는가? 요한은 “서로 사랑하자”고 촉구한 후 바로 7절에서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는 이단에 관해 말한다. 그 이단은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악에 속하는 육체를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결합만을 추구한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을 심판할 수는 있지만 동정할 수는 없다. 요한은 그런 사람들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충고한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육체의 연약함을 철저히 자각할 때이다. 육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동정할 수 없다. 고통을 당하고 슬픔을 당하는 사람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육체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교통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이다. 팔을 뻗을 수 있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으며, 내 몸이 겪은 아픔을 통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미루어 이해할 수 있다. 성 프랜시스는 자기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기를 기도했으며, 그가 예수님의 흔적을 자기 몸에 체험했을 때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진리가 무엇이냐?” 진리에 대한 물음은 빌라도의 물음일 뿐만 아니라 빌라도 이전과 빌라도 이후의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관심사였다. 진리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 시대는 진리에 대해 묻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물음을 잊은 지 오래되었다. 우리는 빌라도만큼의 진지성을 가지고 있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빌라도만큼의 진지성만 가지고 있는가? 요한은 빌라도를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진리는 알 뿐만 아니라 행해야 한다(4절). 빌라도는 진리에 관해 물었고 그 진리를 알았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진리를 행하지 않았다. 진리는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진리는 참으로 아는 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빌라도는 진리를 참으로 알지 못했다.“진리를 행하라.”이 시간 우리는 진리에 대해 묻는다. 물을 뿐만 아니라 행해야 한다.


현대인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추구함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된다. 추구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그 고통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딤후 3:1-5) 여기서 보면 고통의 원인이“자기를 사랑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사랑에 기초하여 서로 더불어 살게 되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진리를 행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진리에서 떠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은 진리에서 떠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행함 즉 사랑함에서 떠나있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지만 오히려 고통이 더해질 뿐이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자기를 사랑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의 원리는 간단하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부족한 이웃을 채워주고 모범된 이웃을 본받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 인간은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우리 바깥에 있는 것과의 아름다운 조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들 사이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가 아닐 때 이런 조화는 깨어진다. ... 이 세상의 불행, 그리고 나 자신에게 있어서 불행은 사랑이 깨어졌을 때 왔다.”헤세는 계속해서 사랑의 비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헌신적인 자기희생, 연민, 사랑은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지만 소유와 권력에 대한 모든 집착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며 가난하게 한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한 가장 단순한 인생의 지혜이다. (...) 권력이나 소유나 지식이 아니라 사랑만이 행복의 근원이다. 자기희생과 사랑에서 비롯된 양보와 실천적인 동정과 자기억제는 자신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보다 풍요로워지는 길이며 전진하고 상승하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