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靈巖) 김응조(金應祚) 목사의 생애와 사상

 

김성영 목사(성결대학 신학부 교수)

 

서언

우리 성결 대학교를 설립하신 고 영암 김응조 목사는 한국 보수교단과 신학계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로서 96년의 생애(1896.1.26-1991.4.17)를 통하여 큰 발자취를 남기셨다. 개화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각자요 일제 치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운동가이자 문서선교사이며 순회부흥사로 한국교회사에 하나의 큰 획을 그으신 분이다. 해방 이후 민족의 혼란기에는 재림의 신앙으로 겨레의 영혼을 일깨운 목회자요 부흥사로, 한국교회가 자유주의 사조에 물들어 감에 따라 정통적 보수신학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한국인 신학자 초유로 신구약 66권을 완전 주석한 <성서대강해>를 집필하는 한편 고 홍대실 권사님의 협력속에 보수신학의 도장인 성결대학교를 설립하시는 등 일생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바친 신앙의 거인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암의 제자된 우리들이 세월과 함께 영암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점차 망각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점에서 예성 90주년 및 개교 35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를 통해 우리의 대 스승이자 성결대학교의 설립자인 영암 김응조 목사님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신학사상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발표자는 영암의 생애 및 신앙에 대해서는 개관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소개해 드리고, 영암의 신학사상과 그 특징에 대하여 자세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영암의 생애와 신앙

한 신학자의 학문체계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통한 체험적인 신앙과 삶의 조화가 두드러진 영암의 경우, 그의 신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그의 생애 조명은 더 없이 중요한 일이다. 영암이 남긴 자서전「은총 90년」은 단순한 삶의 연대기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신학관이 형성된 과정을 의식하고 쓴 신학적 고백이라는 점에서 영암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고 있다. 이에 필자는 먼저 그의 생애를 요약 소개함 으로써 영암 신앙과 신학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영암 김응조 목사는 구한말 개화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한국교회 초기 신앙인이다.

(1896년 1월 23일 출생, 1909년 3월 입신)

영암 김응조 목사는 1896년 양력 1월 23일(음 12월 3일) 경북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 383번지에서 출생했다. 영암이 태어난 해는 갑오경장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고종 33년이 되는데 이 때는 근세조선 말기로서 오랜 쇄국정책으로부터 개화기를 맞이하던 시기이며, 국제적으로는 일본의 대륙침략 정책에 따라 나라가 일대 시련을 겪던 때이다. 영암은 자신의 성격을 "옛 날 칼빈이 출생지 비카델 사람들은 자리의 영향을 받아서 의지가 강하고 … 정의감이 굳센 것처럼 칼빈의 성격이 향도의 영향을 받아서 동일한 기질을 소유한 것처럼 필 자도 향도의 영향을 받아서 어느 정도 칼빈의 성격과 비슷한 점도 없지 않다고 자인 하는 바이다"라고 술회하였다.

영암이 태어난 때의 우리 나라 종교적 분위기는 대원군의 반기독교정책으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살해를 당하였고 민비와 대원군 사이에는 정권 쟁탈전이 반복되던 때 였다. 대원군 정권이 물러나자 종교의 자유가 있게 되어 외국으로부터 선교사가 속 속 내한하여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다. 영암이 스스로 지적한 것처럼 영암은 민족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점에 태어났으니 민족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 하겠다. 영암이 처음으로 기독교에 입신하게 된 것은 13세 되던 해이다. 그는 7세 무렵에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3세 되던 해, 오랫동안 출타해 있던 서 당 훈장의 아들인 최봉희(崔鳳熙)씨로부터 처음으로 "예수교"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이 때가 1909년 3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인 융희(隆熙) 3년이며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이등박문이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의 실권을 장악할 때였다. 이 땅에 기 독교 복음이 들어온 지 25년 되는 해로서 영암의 신앙은 한국교회 초기신앙이라 할 것이다. 이때 영암의 선친 김원섭씨는 온 가족과 함께 입신(入信)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구한말의 뿌리깊은 유교의 전통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침략자 일본에게는 적 대적 위치에 있던 서양 기독교를 온 가족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2.영암 김응조 목사는 체험적이자 실천적 신앙의 소유자이다.

1) 일찍이 중생(重生, Regeneration)의 은혜를 체험, 구원의 확신을 가짐(1911 년 4월 15일)

14세가 되기까지 7년간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선친의 남다른 교육열에 힘입어 신학문을 공부하게 된다. 동네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가난한 살림에 논을 팔아 아들을 경산(慶山)에 있는 계동학교(啓東學校)로 유학 보낸 아버지의 결단은 그 당시로 보아 일찍이 기독교 신앙으로 말미암은 개화의식과 전진사상에 의한 것이다.

영암의 신학문 수업은 그에게 신앙의 성숙과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그 때 그의 신앙은 지극히 단순하여 어느 날 주일학교에서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는 "나는 공부해서 모세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모세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결심은 영암에게 일평생 영향을 미쳐 생전에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새끼 모세"라는 표현을 즐겨 할 정도였다. 2년간의 계동학교 유학시절은 그에게 있어 처음으로 기도에 눈 뜬 시대이기도 하다.

영암은 후일 그때를 회상하여 "나의 벧엘 경험"(창 28:10-19)이라 표현, 집을 떠나 빈들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야곱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였다. 영암은 이렇듯 기도의 사람으로 무장한 가운데 1911년 15세 되던 해 4월 15일 세례를 받았다. 그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은 "피득 목사"라고 영암이 기억하는 유태계 선교사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암은 수세(受洗)의 순간에 중생(重生)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영암은 계동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영해읍 보통학교 4학년 졸업반에 편입하여 1년간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다음 대구에 있는 미션계통의 계성중학교에 입학 하여 계속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때가 1913년, 영암의 나이 18세 되던 해였다. 학비 를 조달하기 위하여 땅파기, 지게 지고 농사하기, 벽돌 운반하기, 기계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학업 성적이 평균 90점에 미치지 못하면 밥을 먹지 않겠다는 의지로 열심히 공부하여 모범생이 되었다. 영암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 그 원동력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과 부모의 은혜와 자신의 건강에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투철한 신앙 일념으로 공부하던 영암에게도 한 때 세상 명예에 대한 유혹과 욕심이 있었다. 평소 존경하던 분 중에 어느 교회 장로로서 변호사가 있었는데 영암은 그분에게 영향을 받아 법률을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그의 표현대로 "모세가 변하여 변호사기 되었다." 영암은 계성중학교에서 4년간 공부하고 21세에 서울로 올라와 법률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만다. 후일 그의 간증대로 사상의 위기요 세상영달에 대한 유혹이었다. 다시 모교로 돌아와 교원 양성을 위한 사범과 마치고 당시 소학교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했다.

2) 일찍이 목회자로서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신학교에 입학함(1917년)

학교를 사임한 영암은 성우로 올라와서 해외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그때가 1917 년, 21세 무렵이다. 그 방편으로 그는 선교사들과 접촉하고 교제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외국으로 갈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은 선교사를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장로교, 감리교 할 것 없이" 찾아 다녔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때까지는 사실 영암은 특별한 교단의식이 없었던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선교사를 만날 목적으로 벚꽃이 만발한 어느 동산을 찾아갔다. 그때가 1916년 4월 15일, 그 동산이 바로 아현동에 위치한 서울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였다. 그것에서 영암은 주의 종으로 공부하기 위한 회심의 결단을 하게 되었다. 즉시 신학교 입학을 희망했으나 입학 연령이 1살 미달이었다. 당시 서울 신학교는 학칙상 만 22세에 이른 사람을 받아주었던 것이다. 애석한 일이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인내와 연단의 기간으로 알고 고향에 내려가 1년을 기도로 준비하고 1917년 서울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잠시 일본 동지사대학(同志 社大學) 유학을 권유받고 고민하기도 했으나 결심한 대로 신학을 택한 것이다.

입학한 후 일본 동양선교회 대표 C. 카우만의 초청으로 영암은 7인의 신학생들과 함께 1년간 일본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 때의 영적 체험은 후일 영암의 신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 일본 동양선교회는 전국민을 상대로 호별 전도라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한국 신학생 가운데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는 학생을 선발했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암이 청소년기에 일본어를 특별히 공부한 것도 하나님께서 이 때를 위하여 예비시킨 일이었다. 영암을 미신으로 가득한 일본 사람들의 배타심과 일본 정부가 정책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다.

3) 당시 영적 불모지였던 일본 전도여행 중에 재림(再臨, Second coming of Christ)의 환상과 성결(聖潔, Sanctification)의 은혜를 체험함(1917년 9월 13일).

영암에게 있어 일본 전도여행이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그가 이방지역에서 재림의 환상과 성결의 체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영암은 자신의 재림에 대한 환상을 1917년 9월 13일 체험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흰 구름을 타고 수많은 천사들의 나팔소리 중에 오시는 예수님을 환상 중에 본 것이다. 그와 함께 "요한1서 3장 3절" 말씀을 받았는데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도 깨끗하게 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성결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튿날 밤에는 골방에 들어가 혼자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가 낱낱이 드러나 눈물로 회개하게 되었다. 부지중에 "주여,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통회의 연속이었다. 이윽고 "내가 너를 깨끗케 하노라" 하는 주님의 음성과 함께 마음이 유리같이 맑아지면서 기쁨이 충만했다고 한다. 이처럼 영암은 일본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던 중 재림의 확신과 성결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4) 일제에 항거, 학생대표로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자 선각자임(1919년 3월 5일 가담, 1년 6개월 옥고).

1년간의 일본 전도를 마치고 1918년 4월 귀국하여 공부하던 중 1919년 3울 기미독립 운동에 영암은 학생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3월 1일 애국지사 33인은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국에서 온 국민이 일제히 독립의 함성을 외쳤다. 영암은 이날 연희전문, 배재전문, 이화전문, 감신, 서울신대생 200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고 3월 5일에는 선언문을 휴대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그곳에서 체포당했다. 이 사건으로 영암은 4년 구형에 2년 실형 언도를 받고,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수감 기간 동안 그는 성경 읽기와 전도에 힘써 마태복음부터 에베소서까지 암송했다고 한다. 후일 그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옥중에서 배운 성경이 더 많다고 증언했다. 영암은 3년 동안의 신학교 과정 가운데 1년을 일본전도로, 1년 6개월을 독립을 외치다 치른 옥고로 보내었으니 강의실에서 공부한 기간은 불과 1년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1920년 10월 1일 25세의 나이로 영암은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영암의 신학사상이 말씀의 바탕 위에 체험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것도 이처럼 신학과정을 실천 신학적 차원에서 보낸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영암은 1977년 독립운동가로서의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고, 1987년에는 교육 공로자로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받았다.

5) 바쁜 목회사역 중 얻은 여러 지병을 신유(神癒, Divine Healing)의 은혜로 고침 받음(1930년 9월 10일)

영암은 민족의 암흑기에 25세의 나이로 전도자가 되어 그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하기 시작한다. 25세에 전도자로 인생을 새 출발한 영암은 존 웨슬리가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쳤듯이 "조선은 나의 교구다"라는 붉은 글자를 한국지도 위에 그려놓고 민족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서원하였다.

그후 영암은 첫 임지인 철원교회를 비롯하여 공주교회, 안성교회, 서울 아현교회 등에서 목회하였다. 특히 아현교회는 당시 성결교단 안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교회였으므로 안수 받지 않은 전도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목회지였다. 영암은 삭발을 하고 사역에 임하여 큰 부흥을 일으켰다. 영암이 목사 안수를 받은 해는 1926년 4월, 전도사 시무 5년 만이었으며 영암의 나이 30세 되던 해이다. 안수와 함께 영 암은 전국 5개 지방 가운데 제일 큰 지역인 북부지방 감리목사로 파송받아 5년 동안 한반도 북부지방 교회를 순회 감독하며 사역하였다.

그러던 중 영암은 34세 무렵부터 건강을 해쳐 급기야는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남쪽 따뜻한 지방인 목포교회로 임지를 옮겨 요양하면서 목회를 계속하였다. 몸은 점점 쇠약하여 신경쇠약, 소화불량, 피풍, 신경통, 치질, 폐렴 등 여섯 가지 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때의 고통과 절망감을 영암은 "빨리 죽는 것이 축복이요 하루 더 사는 것이 저주라고 생각했다" 표현했다. 이런 가운데 영암은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영암은 마지막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기 위해 백일 작정으로 유달산 반석 위에서 매일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기도하기 시작했다. 1930년 9월 10일, 기도 후 노곤하여 잠시 잠이 든 순간 앉아있던 바위가 갈라지는 환상을 체험하게 되었다. 갈라진 바위틈에서 백옥 같은 생수가 터져 나오더니 자신을 둥둥 띄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순간 자신의 몸이 보여졌는데 몸이 유리알처럼 맑아 있었다고 한다. 깨어보니 기이한 환상이었다. 이것이 영암 김응조 목사의 생애에 있어 유명한 신유의 은사 체험이자 심령의 변화체험으로 기록된다. 그때부터 자신의 아호를 "영암(靈巖)"(고전10:4)이라 하게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한 생애에 크나큰 전환점이 된 셈이다.

영육간에 엄청난 은혜를 체험한 후 영암은 새로운 능력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1931년 호남지방 감리목사, 1936년 중부지방 감리목사로 활동하면서 1937년에는 서대문 독립문교회 당회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가 신학교 졸업과 함께 외쳤던 "조선은 나의 교구다"라는 구호 그대로 영암은 우리 나라 전 지역의 교회들을 위해 일하게 된 셈이다.


3.영암 김응조 목사는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지켰다.

그러나 영암에게는 1937년을 전후하여 매우 어려운 시험을 겪게 된다. 1937년 4월 18일 일본 천장절행사가 배재학당에서 있었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목회자들을 일경들이 강제로 남산 신궁으로 끌고 갔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영암은 그 날 어떤 선교사 부인이 뒷문 가시철문을 열고 나가는 틈에 같이 빠져나와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형사들이 매일 찾아와 참배를 강요하였고 또한 교단 일부에서는 참배가 국가의식일 뿐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해서 영암은 적잖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영암은 "나는 이것은 약자의 변명이라고 적극 반대했다. 나는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인왕산 송림 속에서 매일 아침기도로 하나님께 물었으나 역시 응답이 없다. 나는 생각하기를 교회의 책임자로 있으면 면치 못할 터이니 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결국 영암은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공직을 사임, 독립전도의 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민경배 교수는 「한국기독교회사」에서 영암을 비롯한 당시 교계 지도자 수명의 이름을 신사참배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최근 영암의 생애와 사상을 쓴 한숭홍 교수도 사료의 재확인 없이 민경배 교수의 저서 내용을 재인용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경배 교수 역시 자신이 확인한 사료에 의해 신사참배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1966년 임종국 씨의 「친일문학론」에 실린 내용을 비판이나 확인 없이 재인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임종국의 주장은 정확한가? 이것은 영암의 신사참배 진위를 기고한 반론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즉 정상운 교수가 확보한 당시 사료에 의하면 위에서 언급한 천장절행사 참가자 명단에는 김응조 목사가 들어 있으나, 임종국씨가 무책임하게 주장하고 그것을 민경배, 한숭홍 등이 확인 없이 재인용한 문제의 1938년 4월 25일의 신사참배 결의 선언문에는 김응조목사의 이름이 빠져 있음 을 밝혀낸 것이다. 이와 아울러 필자가 영암과 평생을 신앙의 동지로 살아온 성결교 원로 김정호 목사(93세)에게 확인한 결과도 "한 마디로 영암은 신사참배하지 않았다. 영암이 그런 분이었다면 내가 신앙의 선배로 존경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답변이 었다.


4.영암 김응조 목사는 문서선교의 개척자로, 일제 암흑기에 민족의 비전을 제시한 초교파 부흥사로 공헌하였다.

공직을 떠난 영암의 생활은 피폐해 질 수밖에 없어 집에서는 학생 하숙을 치면서 자비량 전도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때의 전도계획으로 시작된 것이 초교파적인 전국 순회부흥회와 문서전도지인 「생명지광」(生命之光) 발행이었다. 영암의 사역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문서선교인데 이 「생명지광」의 반포가 사실상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배달 3천부 정도 발행하여 국내는 물론 만주와 일본에까지 독자를 확보해 나갔다. 그 주된 내용은 설교와 성경강해, 신학사상, 전기, 신앙간증, 설교법, 예화 등이었다. 한 달에 세 곳 이상 집회를 인도하면서 기차 안에서, 혹은 집회 후 여가를 이용하거나 밤을 새면서 집필하고 발송을 하는 등 영암의 초인적인 열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잡지는 1943년 폐간 될 때까지 6년 이상 발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3년 12월에는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되었으며 영암은 계속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가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

문서선교와 함께 시작한 전국 순회부흥회는 가는 곳마다 부흥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으니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회까지 사임한 신세였으나 오히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영암은 전국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유명한 목회자가 되어갔던 것이다. 영암이 평소 "나는 교파에 속하였으나 교파주의자는 아니다" 라고 말한 것도 이때 교파를 초월하여 순회부흥전도자로 활동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1945년 영암의 나이 50세에 이르러 조국은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영암으로 하여금 광복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실 여호와 이레의 준비를 하신 듯, 영암은 해방을 앞두고 부흥회 등 일체의 사역을 중단하고 1년 가까이 은둔 생활 을 하게 된다. 해방과 더불어 영암은 다시 부흥운동에 나섰다.

해방과 함께 닫혔던 교회들이 속속 문을 열었고 따라서 영적 부흥이 절실했던 터였다. 성결교단도 재림사상으로 말미암아 강제 해체된 상태에서 다시 재건의 출발을 하게 되었다. 해방과 함께 서울 동대문 감리교회에서 영암이 인도한 부흥회는 1945년 광복 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집회로 알려지고 있다.

1945년 9월 10일에는 성결교회 재건총회가 열렸다. 그러나 광복 후 1950년 한국동란까지 근 5년간의 영암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영암 자신도 자세하게 기록해 놓지 않았다. 다만 「은총 90년」 약력난을 보면 "1945년 9. 10∼1950년 6. 24 : 조국해방 과 동시에 초교파적 부흥운동으로 장(長)·감(監)·성(聖)·침(浸) 4교파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영암은 조국 해방기로부터 조국 전쟁기까지 민족적인 최대의 영적 혼란기를 교파를 초월하여 오직 민족복음화 운동에 전념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동란의 와중에서, 특히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간 영암은 그곳에서도 집회를 계속했는데 특히 이때에 행한 그의 재림론 강의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954년 펴낸 그의 「말세와 예수의 재림」은 아마도 동란 중 부산 피난시절에 행한 강론을 묶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위 책의 "序論"에 보면 말미에 "1954년 3월 1일 한양성(漢陽城)에 돌아와서, 저자식(著者識)"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부산 피난 시에 열린 총회는 무엇보다 성결교의 상징인 「活泉」속간호부터 영암은 이명직(李明 稙)·문복호(文 浩)·황성택(黃聖澤)·이천영(李泉泳) 등이 함께 집필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문을 닫은 지 1년만인 1951년 서울신학교가 총회의 결의에 따라 다시 문을 열었고 1952년 영암 김응조 목사는 교수로 임명되었다. 영암은 신학교 교수직 등 교단 내외의 크고 작은 일에 적극 앞장섰으며 1956년에는 성결교회 제 11대 총회장 으로 피선되는 등 교단과 신학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5.영암 김응조 목사는 교회와 신학계의 세속화를 거부, 성경적 복음주의 보수신학의 도장인 성결교신학교를 설립한 신학자이자 교육자이다(1962).


영암은 1957년 회갑을 기념하여 7개월간 미국을 순방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한편, 미국 기독교 지도자들과 대화하고 신학계의 동향을 살필 기회를 가졌다. 그 결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교회와 신학계가 급격히 세속화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영암은 한국교회와 신학계도 머지않아 서구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될 것으로 판단, 귀국하는 즉시 보수적 관점의 성경주석을 쓰게 된다.

이와 아울러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보수교단의 상징처럼 되어 있던 성결교단마저 1961년 WCC 가입문제로 양분되자 뜻있는 교단 지도자들과 전국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사조를 배격,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교단 분열 후 영암은 성결교회 본래의 성서주의 보수신앙을 고수하고 복음적 사명을 완수할 교회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1961년 12월 30일 성결교신학교 재단 이사회를 구성하고 1962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영암의 사저에서 성결교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개교 이래 1980년까지 초대 교장을 역임하시고 30여년 이상을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는 영암의 대표작 <성서대강해> 신약 상권(1961년 2월)과 하권(1962년 2월)이 나올 무렵이었으니 영암은 한국교회와 신학계의 보수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주석집필과 한편으로는 보수신학의 도장인 신학교 설립을 동시에 추구하는 등 초인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영암은 예성교단의 지도자일 뿐 아니라 자유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교회를 지켜온 초교파적 지도자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6.영암 김응조 목사는 생애를 통하여 43권의 신학관계 저서를 남긴 대저술가이다(1937년∼1988년).

1953년 서울을 수복하여 영암은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신학교 재건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1956년 4월 제 11회 총회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회고컨대 입신한지 48년, 헌신한지 40년, 봉역한지 37년이다. …공부하거든 모세 되게 해달라고 한 기도가 성취되어 헌신 40년으로 모세와 같이 임무를 마쳤다 …하나님을 위하여는 과거 40년은 물론이요 앞으로도 마지막 호흡까지 갚을 각오를 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니 모 두가 하나님의 은총이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1957년에는 회갑 기념사절로 7개월 간 미국을 순방 60여 지방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미국에서 귀국한 영암은 서구 기독교의 세속화와 신학의 위기를 목격한 결과가 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무엇인가 새롭게 각성하여 "무엇보다 한국에 필요하고 급선무는 보수적 성서해석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착수하게 된 것이 한국교회사에 한 획을 그은 「성서대강해」작업이다. 이 책은 당시로부터 교계의 대호평을 받아 증판을 거듭, 한국신학계에 3대 주석서의 하나가 되었다. 그후 1962년 2월까지 영암은 구약 전 3권, 신약 전 3권을 완성하여 초고 「신구약대강해」를 집대성하는 위업을 쌓았다. 누군가 마틴 루터에게 있어 종교개혁 못지 않게 그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문서사역이 더 큰 업적이라 했듯이 영암이 90평생 그리스도를 위해 수많은 일을 했으나 한국을 성경 위에 세우고자한 이른바 "성서한국"의 비전을 안고 "성서적 보수신학"의 교범으로 완성해 낸 「성서대강해」저술 작업이야말로 영암의 생애에 가장 큰 공헌으로 기록되고 있다. 영암은 후일 이 초고를 개작해서 1973년 전 12권 원고 약 5만매의「성서대강해」를 증보, 하나님과 한국교회 앞에 바쳤다. 현재 우리 학교에서는 이 「성서대강해」를 오고 오는 세대에 길이 전수하여 한국교회의 강단을 말씀으로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낡은 활자와 한문·고어체 문장을 현대문으로 고치는 개정작업을 1992년부터 진행, 현재 14권의 개정판을 출판하고 있으며, 오는 1998년도 상반기 중에는 완성할 예정이다.

이처럼 초인적인 정력으로 남달리 많은 일을 한 영암은 <성서대강해>를 전후하여 쉴 사이 없이 집필을 계속, 생애를 통하여 41권의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저서를 연대 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실천신학 목회학」(1973),「부인설교집」(1939),「말세와 예수재림」(1954),「성서아동설교집」(1937),「사막의 생수」(1954),「부흥의 불꽃」(1954),「다니엘서 강의」(1953),「설교예제 500문제」(1955),「기독전」(1956), 「바울전」(1956),「성서절기설교」(1959),「하늘의 만나」(1967),「하나님의 장막」 (1967),「기독교 2천년사」(1968),「황야의 과객」(1968),「성서난해구 해석」(1968), 「신구약성서답안」(1968),「구약성서대강해-상」(1959),「구약성서대강해-중」(1960), 「구약성서대강해-하」(1960),「신약성서대강해-상」(1961),「신약성서대강해-중」(19 61),「신약성서대강해-하」(1962),「성서적 정통신학」(1969),「구약역사철학」(1970), 「모범설교예제」(1973),「하늘의 메시지」(1971),「나는 기도해서 얻었다.」(1971), 「성서대강해-1」(1980),「성서대강해-2」(1981),「성서대강해-3」(1981),「성서대강 해-4」(1981),「성서대강해-5」(1981),「성서대강해-6」(1981),「성서대강해-7」(1981) ,「성서대강해-8」(1981),「성서대강해-9」(1981),「성서대강해-10」(1981),「성서대강해-11」(1981),「성서대강해-12」(1981),「사중복음-교리」(1985),「생수를 주리라-설교」(1988).


영암의 신학사상  

영암의 신학방법론

모든 학문은 주어진 명제를 논리적으로 진술하여 그것을 증명하는 과정을 밟는다. 그런데 이 명제를 증명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신학은 다른 학문 영역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칼 헨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말하거나 특정한 성격들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호오스로부터 공중으로 물을 뿌린 다음에 그 '떨어지 는 비'를 '하늘이 주시는 것'으로 환영하는 정원사의 어리석음과 같다"고 말한다. 아울러 신학은 계시에 관하여 탐구하는 학문이면서 인간이 이성으로 이해하고 수납할 수 있는 논리 체계를 갖는다. 진리로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논리체계를 통하여 인간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신학의 특징이자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공론화하는 작업이며, 지성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신학은 필히 주어진 명제를 증명함에 있어서 신학 고유 학문으로서의 정신과 방법을 가진다. 예컨대 버나드 램은 "삼위일체이신 한분 하나님이 존재하는데 그는 사랑이시며 전능하시며 거룩하시고 전지하신 분으로 자연과 역사 그리고 인간들 속에 그리고 신구약성서 속에 있는 말씀과 사건들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출발점과 방법론을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Propositional Revelation)에서 찾았다. 이처럼 한 학자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함에 있어서 자신의 정신적, 철학적 신념을 분명히 하고 자기 나름의 방법론적 특징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중요하다. 만일 어떤 학자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하여 아무리 풍부한 백과사전식의 지식을 나열했다 하더라도 거기에 자신의 정신과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독창적인 학설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정신은 신학의 중심과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신학의 중심을 추구한다는 것은 한 학자의 지적 노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신학에 있어서 정신은 신앙고백과 통하고 방법론은 이성적인 논리체계와 통한다. "방법"이 조직화된 규칙이나, 조직화 작업에 사용되는 과정 또는 원칙이라면, 신학에 있어서 "방법론"이란 신학적 주장이 객관적 학설이 될 수 있는 전제 조건에 대한 탐구와 관련되며, 보편적으로는 모든 신학자가 연구하는 과정에서 필히 거쳐야 하는 결정들의 배열의 방법에 관한 것이다.

칼 헨리는 신학은 이성적 훈련이므로 한 학자가 판단하기에 어느 인식방법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가를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신학적 방법의 분명한 진술은 신학의 성립 가능성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신학방법론은 단순한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며 신학의 개념과 대상, 과제와 표준 등을 취급하기 때문에 신학의 출발점이자 전반적 골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방법론은 서론이자 그 자체가 본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며, 신학의 주제를 일관성 있게 관통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 학자의 신학 작업 속에서 그가 사용한 신학방법론을 찾아낸다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이다. 어떤 학자는 서두에서 자신의 방법론을 밝혀두고 있기도 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그러한 언급없이 자신의 탐구과정 전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영암의 신학에서 그가 중점을 두고 있는 방법론, 좀 달리 표현해서 그가 택하고 있는 방법론은 무엇일까? 영암의 경우, 유감스럽게도 그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성서적 정통신학]이나 필생의 노작인 [성서대강해] 등 그의 주요 저서에서 직접, 간접으로 자신의 신학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정통적 성서신학]의 경우, 그 내용의 한 부분으로 "신학 연구의 방법론"을 다루고 있으나 그것은 자신의 방법론적 입장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신학 연구의 조건"과 "신학의 구분" 등 일반적 상식에 관한 것이다. 이런 실정 속에서 논자는 영암이 언급한 1) 신학연구의 가능성과 2) 신학의 자료 에 대하여 살펴본 후 영암신학의 방법론상 특징을 찾아보고자 한다.

 

1.영암이 이해한 신학연구의 가능성


흔히 영암 김응조 목사를 순수 국산 신학자로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에는 시대적으로 서구의 신학이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 활동한 사람이라는 점과 함께, 따라서 서구 신학에 관한 지식이 일천하다는 비판적 입장이 포함되어있는 듯하다. 아울러 영암만큼 철저히 성서 중심의 신학관으로 일관한 신학자도 드물다는 긍정적 평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제한된 신학 풍토 속에서 자신의 신학세계를 구축한 영암은 그러나 놀랍게도 신학 연구의 가능성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어 주목된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영암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자칫 소홀히 여기기 쉬운 인간의 이성(理性)이 신학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인간의 지식이란 신앙을 방해하는 걸림돌인가 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엄격한 신본주의자(神本主義者)인 영암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더욱 흥미있는 질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무시된 신학은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영암의 신학은 성립될 수 없거나 균형을 잃은 신학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가지고 그의 신학에 접근하는 우리에게 영암은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영암은 신학연구의 가능성을 논함에 있어 그 세 요소 중에 하나로 인간의 지력, 또는 이성적 이해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과학이나 학문을 연구하려면 반드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나니 ①연구할 목적물의 존재와 ②연구자의 목적물에 대한 이해성과 ③목적 물을 연구할 만한 방법 등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천문학을 연구한다고 가정하면 ①연구의 목적물인 일월성신이 있음과 ②사람에게 천문학을 연구할 만한 소질이 있어야 하고 ③천문대의 망원경 같은 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일이다. 이와 같이 신학 연구에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가능하나니 ①우주의 조물주되신 하나님의 존재와 ②무형하신 조물주를 인식하고 신앙할 수 있는 인간의 준비의 능력과 ③하나님의 계시하신 사실을 기록하여 놓은 성서가 그것이다.

여기서 영암은 신학 가능성의 세 요소로서 ①연구 대상으로서의 하나님, ②연 구 주체로서의 인간(또는 인간의 지력, 이성), ③성서로 표현된 연구 방법론을 들고 있다. 그는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1)신학 연구의 기초인 신의 존재, 2)신학 연구의 기초인 인간의 지력, 3)신학 연구의 근거인 계시(성서)로 나누어 설명 한다. 여기서 영암은 신학 연구의 방법론을 과학 연구의 실제를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법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과 세계 우주를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고 한다.). 다만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일이다(고한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극히 곤란한 일로써 불가능한 일이라고 부정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니 우리가 연구하는 과학이라 할지라도 신념 없이는 진보할 수 없음은 이는 신념은 현세에서 모든 지식 위에 뛰어난 때문이다.

과학이 논리나 경험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감각 기관을 통하여 얻어진 현상을 가정하고 추리하는 과학은 영암의 주장대로 종교적 신념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논리적 실증주의도 과학적 증명이나 논리를 의존하는 데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한계의 영역에서 요청되는 것은 신념이다. 칼 헨리는 논리적 실증주의의 발생과 붕괴를 논리적 실증 가능 한 영역이 갖는 그 한계성과 모순성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신학에 있어서는 오히려 실증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신념이 요청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회의론으로 이끈 데이비드 흄의 과학적 방법을 인정하면서도 논리적 실증주의에 희망과 신념을 기대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영암이 말하는 현세에서 모든 지식이란 인간이 감각기관으로 증명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물리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며 신념이란 감각기관이 아닌 "어떤 것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영암은 계속해서 신학연구의 기초인 인간의 지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무엇을 안다는 말 가운데는 다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므로 감각적 시청각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알 수 있나니 사람이 증오심, 공포심, 동정심, 희망, 사랑 등은 시청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형의 정신으로도 유형물 이상으로 감각할 수 있나니, 눈으로 보지 못하니 인식할 수 없다고 판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나 하나님을 정신으로 (2)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학을 연구할 가능한 지력을 소유하였나니라.

여기서 유형물 이상으로 감각할 수 있는 "무형의 정신"은 영암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상의 하나이다. 이것은 뒤에서 언급할 이른바 영암의 종교인식의 "직각설(直覺說)"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상으로 주목할 만하다. 인간에게 형성되어진 심리학적, 정신적인 무형의 상태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그의 진술은 철저히 성서적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인간 속에 있다고 말하며 이것은 인간 속에서 자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롬1:19, 20).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지혜와 계시의 정신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엡1:17). 특히 여기서 "계시의 정신"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정신적 힘, 즉 지력과 이성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무형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영암은 "신학 연구의 대상이 되는 신의 존재가 없으면 물론 신학의 연구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는 모든 신학의 연구의 대상이 신의 존재에서부터 기인된 까닭이다. 이러므로 무엇보다도 신학 연구에 필요한 것은 신의 존재를 믿고 인식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논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흔히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것을 "아래로부터 의 신학"이라 하여 인본주의적 자유신학으로 경계하는 일에 대한 영암의 입장은 어떠한가에 대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영암은 분명히 신학연구의 가능성으로서 인간의 이성적 작용을 중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영암은 결코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신 존재 인식에 도달하는 순서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분명하게 인간의 지력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한다. 그는 "신학 연구에 가능한 기초적 계시"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방면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①하나님의 계시는 외부로부터 사물을 통하여도 계시하시나 내부를 통하여도 계시하시나니 인간의 내심에 하나님이 직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되였다. 이것이 내부에서 오는 하나님의 무형의 계시이다. ②외부에서 오는 계시이니 하나님 이 창조하신 자연계를 통하여 혹은 성서에 나타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나니 이것은 외부에서 오는 계시이다. 이러므로 신학은 내외의 계시를 통하여 연구의 가능성을 소유하였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암의 신인식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가능한 이른 바 "위로부터의 신학적" 관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영암은 계시를 외부로부터 오는 계시와 내부에 부여된 계시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암이 신학 연구의 가능성으로서 인간의 이성의 작용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효과적 반응과 이해를 위한 이성인 것이지, 계시의 빛 안에서의 이성, 반대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규명되는 계시가 아닌 점을 알 수 있다. 루터는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이성의 대립을 그의 신학의 주요한 테마로 삼고 있는데 알트하우스는 이점에 대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와 만나려는 인간의 독자적인 시도와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통하여 선사한 만남과 인식의 대립, 이 테마에 대한 관심은 그의 신학을 관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루터는 인간의 신인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지 아니한다면 절망"이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즉 계시의 빛 가운데에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다.

헨리 디이슨도 신학의 가능성으로서 두가지 면, 즉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타고난 기능을 들고 있다. 디이슨은 다시 계시의 두 형태로서 일반계시와 특별 계시를 들고 있으며, 인간의 기능에 있어서도 정신적 기능과 영적 기능을 들고 있다. 참고로 루터에게 있어서 신학의 자료는 "성서"와 "믿음"과 "이성"이다. 영암이 제시한 신학을 가능하게 하는 위의 세 요소는 이러한 점에서 주요 신학자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우리는 영암의 이러한 견해 속에서, 최근에 와서 밝혀지고 있는 웨슬리 신학의 방법론적 특징인 이른바 사변형의 방법(四邊型 方法), 즉 four-sided method와 상통한 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웨슬리의 신학에는 "성서"와 "전통"과 "이성"과 "경험" 등 네 요소로 구성된 4변형의 모델로 보는 입장인데 영암의 신학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이성"을 비롯하여 그가 가장 절대적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성서"와 실천적 신학을 강조하는 경험의 요소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웨슬리의 신학에 주요한 요소인 전통에 대해서는 당시 웨슬리가 처한 영국 국교회의 전통 속에서 피할 수 없는 한 요소이나, 기독교 전래 1세기에 이르지 못했던 영암 활동기의 풍토 속에 서 서구적 기독교 전통으로서의 요소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영암이 이처럼 인간의 이지적 능력을 중시한 것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협동하는 인간의 자발적인 순응과 역할을 중시하는 웨슬리 신학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2.영암이 중시한 신학의 자료-자연·성서·경험

신학 방법론을 다룰 때 먼저 직면하는 것이 신학의 자료에 관한 문제이다. 이 자료를 어떻게 이해하며 취급하느냐에 따라 방법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신학의 자료는 권위적 자료(權威的 資料)와 보조적 자료(補助的 資料)로 나눈다. 흔히 권위적 자료를 1차적 자료라고 하며, 보조적 자료를 2차적 자료라고 한다. 1차적 자료로는 성서가 있고, 2차적 자료로는 전통과 경험, 자연, 역사 등이 있다.

영암은 이 점에 대해서, 신학자료의 3요소로서 (1)자연(自然)과 (2)성서와 (3) 경험을 들고 있다. 성서가 언제나 신학의 원천적 자료이듯이 영암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신학자료의 순서를 1차적 자료와 2차적 자료로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성서와 성서에 의한 체험적 삶의 순서에 따라 구분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기독교에서 신학의 자료가 될만한 3요소는 ①자연과 ②성서와 ③경험 등이다. 하나님께 관한 것 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진리가 잇는 곳 어디든지 신학은 이것을 사용하여 자료를 삼을 수 있나니 진리가 있는 곳이라 함을 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자연계요, ②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서요, ③인간의 경험한 바 역사 등이다.

영암은 하나님께 관한 진리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리고 무엇이든지 신학의 자료가 된다고 주장한다. 영암은 먼저 그 자료로서 자연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자연이 신학의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방면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영암이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는 역할로서의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서적이라 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것을 자세히 연구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크게 배울 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시편 19편을 들어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분이 하신 위업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영암에게 있어서 자연은 믿는 자들이 영안을 가지고 관찰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는 수단을 말한다. "우리가 자연을 관찰할 때 육안으로 보는 것같이 영안으로도 볼 수 있나니 자연에 대하여 놀라운 현상을 볼 때에도 깊이 이것을 고찰하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께 관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눈먼 소경으로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영암은 다음으로 신학의 자료가 되는 성서에 대하여 진술한다. 죤 웨슬리에게 있어서 변함없는 궁극적 지식과 권위의 원천이 성서였듯이 영암에 있어서도 성경은 언제나 그의 신학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한 책의 제목을 「성서적 정통신학」이라고 정한 것을 보더라도 그의 신학 은 철저히 성서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서문에서도 "성서를 중심한 순수한 진리 입장에서" 정통신학을 쓴다고 진술한다. 그뿐 아니라 「성서대강해」 서문에서도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은 인용하면서 성경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발견할 수 없음으로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알도록 하셨다고 영암은 주장한다. "우리들에게 다행한 것은 자연 외에 또 한 가지 서적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때문이다. 이것이 곧 성서이다. 전술한 바 자연은 신학에 훌륭한 자료라 할 수 있으나 자연보다 더 근본적인 자료는 성서이다."

①구약 39권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중에게 자기 계시를 부여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는 수 천년을 통하여 저희들의 경험을 통하여 계시되었다. 경험과 계시는 하나님의 선민을 통하여 기록된 39권을 한 권에 합해 놓은 것이 구약 성서이다. ②또 하나는 신약 성서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의 계시를 하셨으나 이것은 한 부분에 불과하고 수 천년을 지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사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성질을 충분히 계시하셨나니 곧 하나님으로 사람이 되셔서 강림하사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곧 자신의 인격과 교훈과 사업을 통하여 충분히 계시하셨다. 그리스도의 전생애를 기록한 것이 신약성서인데 신학의 자료로서 주요한 위치를 점령하였다.

위에서 영암이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이스라엘 민족의 경험과 결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경향성과 상통하는 점이어서 주목된다. 한숭홍은 영암의 중생관을 살피는 과정에 "그의 신학은 내재 주의적 신학경향을 띠고 있으며, 감정의 신학에서 성(聖)의 본질이 인간의 절대 의존적인 의존감정에 의해 실제로 인정되고 있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진술과 유사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울러 영암은 "성서적 위력"이란 설교를 통해 "우리는 성서를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그리고 성서가 인간에 대하여 어떠한 위대한 역사를 하심을 믿는다"고 성서의 하나님 저작과 무오설을 지지한다.

웨슬리가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었으며 "성서를 진리의 유일한 표준이며, 순수한 종교의 유일한 규범"으로 받아들인 성서의 사람이었다면, 영암 역시 "내게 한 권의 성서가 있다"고 일생동안 외친 "한 성서의 사람"이었다.

영암은 신학의 세번째 자료로서 인간의 경험을 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암이 신학의 과정상 간과하기 쉬운 점을 포착했다고 할 수 있다. 경험이 신인식의 출발점이 될 때 사변적인 신학에 빠지게 되나,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를 출발점으로 하는 기독교신학에 있어서 인간의 경험은 매우 중요한 자료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인식의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인식의 주체로서 인간의 상황에 대한 이해와 경험은 신학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과 사업을 통하여 충분히 자신의 계시를 나타내었으나 인간은 그의 계시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들 이 완악하고 영적 소경이 된 까닭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심원해서 직각적으로 깨닫기 어려운 때문이다. 이에서 인간의 경험을 통하여 점차적 으로 인식케 되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이후 교회 경험을 통하여 또는 기독자 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신학의 중대한 자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영암은 인간의 즉각적인 계시 이해의 불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 즉각(precise moment)이란 용어는 전술한 바 계시 인식의 내적 측면, 즉 인간의 내면에 부여된 직각성(intuitive power 또는 직관성)과는 엄격히 구분해야 할 개념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영암의 의도는 계시의 점진적 이해와 대조개념으로서의 즉각적 이해라는 용어를 쓰로 있는데 전술한 직각성(직관성)은 하나님을 알만한 정신, 즉 계시를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됨을 설명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칼 헨리도 신인식의 한 방편으로 "직관"에 대해 설명하면서 "종교적 실제가 감각적 관찰로서나 철학적 추론으로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직관이나 직접적 지각으로서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종교적 궁극적 존재에 대한 즉각적 의식으로서 자신의 내적 경험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주장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 강조되어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 진리는 그 본질상 인격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인의 경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사귐 속에서 온다. 웨슬리는 설교집 서문에서 자신은 "참되고 성서적이며 체험적인 기독교"를 증거하기 원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설교나 교리적 논제를 증거함에 있어 언제나 성서에서 출발하여 신앙 체험에 호소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웨슬리의 역동적인 사역과 설교가 자신의 체험으로 말미암았듯이 영암에 있어서도 체험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일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암 이 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칼 헨리는 경험주의자들의 신인식 방법을 경계하는 한편, 그러나 경험이 신인식의 자료, 즉 신학의 중요한 자료가 됨을 지적한 바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암은 신학의 자료로서 "자연"과 "성서", 그리고 "경험"을 제시하고 있다. 영암이 진술하고 있는 이 세 요소를 종합해 볼 때 그 중심에 성서가 있고 성서의 궁극적 증거가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강조하려는 데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 요소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이 계시의 완성을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앞으로 본론에서 다룰 영암의 그리스도 중심론적 구원관과 일관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3.영암 신학의 방법론상 특징

이제 논자는 영암 신학의 방법론상 특징을 -혹은 두드러진 중심 요소를- 1)절대 권위로서의 성서, 2)초월성과 내재성의 조화, 3)일관된 구원론적 사관, 4)말씀과 체험의 역동성 등 네 국면으로 나누어 진술하고자 한다. 먼저, 영암 자신이 「성서적 정통신학」에서 언급한 신학 연구의 방법론을 살펴보면 먼저 신학 연구의 조건으로 1)지적 조건과 2)성서의 지식, 3)진리에 대한 애착심을 들고 있다. 영암이 제시한 이 세 가지 조건은 신학을 연구하는 자세와 구비 조건에는 해당하나 방법론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다만 성서에 대한 절대적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암의 신학 방법론이 성서의 최고 우위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영암이 견지하고 있는 신학 방법론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성서의 절대 권위 인정

전술한 바와 같이 영암은 신학의 권위적 자료로서 성서를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서에 대한 정통한 지식없이는 올바른 신학 연구도 방법론적 일관성도 획득하기 어렵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영암의 조직신학서라 할 수 있는 「성서적 정통신학」을 보더라도 "성서를 중심한 순수한 진리 입장에서" 진술하고 있음을 본다. 아울러 영암은 그의 주저(主著)인 「성서대강해」에 수록된 1959년 초판 서문에서 자신의 신앙 내지 신학의 기반이 성서 위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30년 전까지는 성경 연구에 대하여 많은 취미를 가지지 못하였다. 반대로 세속적 서적에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30년 전 어느 날 성화(聖火)의 세계가 임할 때에 신앙의 정화를 받고 성서의 빛을 받음으로 성서의 경이적 가치를 깨 닫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신앙의 혁명인 동시에 성서로 돌아가는데 획기적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이에서 따르는 결과는 성서연구에 방해되는 제반 속서(俗書)를 숙정하고 성서연구에만 전심치의(專心置意)하였던 것이다. 누구든지 이같은 경험을 가진 자마다 성서에 대한 진미를 깨달을 줄 믿는다.

이처럼 영암은 철저히 성서로 돌아가 성서 위에 자신의 신학을 구축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그러면서 그가 자신의 주석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급변하는 신학사조와 성서에 대한 이설이 많은 이 때에 순복음적 입장에서 성서 그대로 표현하려 함에 있다"고 밝힌다. 영암은 「나의 고백」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렇게 성서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내게 한 권의 성서가 있음을 무쌍한 영광으로 생각하노라. 나는 과거생활에 수년 간 과학적 이론 하에 번민하였다. 그 결과 신경쇠약, 염세증을 가지게 되었다. 최후 에는 죽음의 철학도 부르짖게 되었다.…그러나 성령은 내 상한 심령을 치료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만권 시서에서 뛰어난 것이 내게 있는 성서라 하노라.… 나는 이 성서가 나의 은혜의 책임을 깨달았을 때에 세상 속서에서 절연하고 성서에만 전심하고 주께만 헌신하였노라…네게 만권 시서가 있느냐? 내게는 한권의 성서가 있을 뿐이다.…네게 통고금(通古今)·달사리(達事理)의 지식이 있느냐? 내게는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밖에 없다…루터의 종교개혁도 링컨의 노예해방도 한권 성서의 능력이다. 실로 성서는 구원의 능력이요 사회개조의 원동력이다. 나는 한권의 성서가 있음을 무쌍한 영광으로 생각하노라.

영암의 이 진술은 웨슬리의 신학이 성서에서 출발하여 성서로 결론짓는 방법론에 있음과 맥을 같이 한다. 웨슬리는 그의 신학을 성서에 근거하고 모든 문제의 최종적인 해답을 성서에서 찾고 있다. 그는 "나의 근거는 성서이다. 그렇다. 나는 '성서고집장이'이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성서를 따른다"고 하였다.

이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서가 유일한 권위의 자료요 출발점이었듯이 영암에게 있어서도 성서는 절대 권위의 자료요 신학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웨슬리 뿐 아니라 성서적 정통신학관을 가진 동서고금의 신학자들처럼 영암은 성서를 진리에 대한 유일한 표준이자 신앙의 유일한 규범으로 받아들였다. 영암은 「성 서대강해」서문에서 비록 짧은 언급이지만 그가 철저히 성서에서 성서로 일관하고자 하는 자신의 신학 방법론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성서로서 성서를 해명하려는(以經解經) 연구방법에 의하여…" 자신의 성경 이해를 진술하고 신학 적 입장을 밝힌다고 한 대목이다. 영암은 성서의 절대 권위를 인정함에 있어서 첫째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서의 성서, 둘째로 성서의 문자적 진실, 세째로 성서의 영감설을 지지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암은 자신의 신학적 진술의 방법을 철저히 성서의 절대 권위를 전제로 성서에서 출발하여 성서로 귀결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성서는 신학의 기본적 자료이자 최초적 자료이다. 와일리는 "가장 참되고도 완전히 종교를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기독교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문서적 기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앙과 실천에 대한 거룩한 법칙이며, 또한 신학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가 되는 자료인 것이다"라고 했다. 마르텐센은 "모든 교의적 체계는 점차로 낡아지지만, 성경은 영원히 변함없이 남아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고 이것을 제1차 자료로 삼아 신학을 구성하는 방법은 정통신학의 기본 요체이자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다. "정통"(Orthodoxy)라는 용어 자체가 "올바르게 생각하는 개인이나 사회나 학파나 또는 교회의 성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통신학이란 이런 의미와 맥을 같이하여 성경 속에서 신앙적 권위의 근거를 찾는 신학을 말한다. 영암은 성서적 정통신학자로서 철저히 성서에 의한 신학 진술의 방법론을 구사한 학자라 하겠다.

2)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조화

하나님의 초월성(transcendency)과 내재성(immanency)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면서도 흥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의 관념적 개념이 되고 만다. 반대로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의 상대적 개념이 되고 만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 내재하시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전제로 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전제로 하되 그 초월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무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존재한다고조차 말할 수 없는 실재라고 주장 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제한적인 명제(Limiting Statement)를 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제한이 된다. 그래서 그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질문할 수도 없고, 또 그 질문에 답변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묻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를 초월한 분에게 묻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하나님의 속성을 은연 중에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와 같이 무신론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a-being)가 아니라 존재 자체 (being-itself)이다."라고 극단적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초월해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는 어떤 학문적 정의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루이스 벌콥은 단정한다. 유한자는 무한자를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오묘를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성경은 말한다(욥11:7). 그러므로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지식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내재성을 인식하게 되며, 비록 인간의 지식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실유를 얼마간이라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런 점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관계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마틴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의 실유 내지 본체에 어떤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해 확고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뜻하는 "숨겨진 하 나님"(Deus absconditus)과 하나님의 내재성을 뜻하는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 사이를 구별하는 동시에 우리는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것도 다만 숨겨 진 채로의 하나님을 알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에서도 자신을 본질적으로 존재하시는 대로 나타내지 않으면 그의 본질은 여전히 꿰뚫을 수 없는 흑암에 가려있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한에서만 그를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루터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와 만나려는 인간의 독자적인 시도와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통하여 허락하신 만남과 인식의 대립을 그의 신학의 주요한 주제로 일관성있게 다루고 있다. 그는 사변적인 철학자들은 그 분 자체 안에 계시고 그 분의 위엄에 계시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인간의 사변적인 인식의 한계 안에서 인식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는 덧입혀지지 않고 자신의 절대적 위엄 가운데 계신 "벌거벗은"(nudus) 하나님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즉 "벌거벗은"(초월하신) 신성을 포착할 능력이(capax divinitatis)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루터는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계시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는 벌거벗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계시의 옷을 입은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한다. 즉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내재를 성경 전체가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의 가장 구체적이고 궁극적인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다는 중요한 진술을 하고 있다.

칼빈도 역시 초월해 계신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실유의 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본성(quid)과 품질(qualis)에 관한 지식에 대해 말하면서 후자에는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나 전자에 대해 사색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이 지식은 연역적인 방법으로는 얻어질 수 없으나 다만 속성들을 통하여 귀납적인 방법을 통하여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성서의 언명은 인간의 사변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를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난 바 여러 계시의 현상을 통하여서 우리는 귀납적으로 신존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듯이 계시의 정점이자 완성이 그리스도이심을 생각할 때 이러 한 칼빈의 진술의 중심에서도 역사 속에 내재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암묵적 진술을 발견하게 된다.

영암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신의 무형(無形)"과 "신의 유형(有形)"이란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영암이 말하는 신의 무형 개념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형체가 없으시다"는 단순한 개념만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출3:14) 하나님의 초월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신의 유형 개념은 초월해 계신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영암은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함은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심이 아니라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유형체로 나타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루터의 경우, 하나님은 그 자신을 계시함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 존재하시는 대로 나타내지 않고 그의 본질은 여전히 꿰뚫을 수 없는 어둠에 쌓여있다는 설명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영암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신의 유형, 또는 내재성을 (1)순결한 비둘기 모양(요1:32; 마3:16)에서부터 (2)불과 바람(행2:2-3; 출3:2; 살후1:7)으로, (3)천사의 모양(창32:24; 단10:5-6)으로, (4)사람의 모양(창18:22; 19:27)으로, (5)구름(출40:35; 민9:17)으로, (6)영광(창 33:20-23; 40:35)으로 나타나며 궁극적으로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을 보고 있다. 그는 "신약에 걸어다니시는 그리스도를 찾으려면 구약에 숨은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순서이다"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초 월성과 내재성을 일관성있게 그리스도 안에서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실제적인 작업이 그의 <성서대강해> 전편을 통해 나타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영암이 신존재 인식의 주요한 수단으로 "직각 의식"(直覺意識)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의식의 기원에 대하여 성서에서는 미리 하나님의 존재를 기록하였고 하나님의 성질에 대해서만 기록하였고 하나님의 존재의 여부에 대하여는 성서에는 하등의 논리(論理)한 바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서 하나님의 존재 의식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직각 의식(直覺意識), 곧 제일 진리에서 찾을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제일 진리가 무엇인가, 여기 대하여 하등의 증명을 요하기 전에 선천적 내재의 진리이다.

영암은 하나님 존재 의식의 기원을 규명한 장에서 특별히 "직각 의식"에 관한 내용을 별도로 취급하고 있다. 영암이 판단하기로는 성경이 전제하고 있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인식의 방법으로 "직각 의식"은 그만큼 중요한 요소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제일 진리"요 논증 이전의 "선천적 내재의 진리"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신존재 증명에 관해서는 원칙에 있어서 정의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영암은 논리 이전에 제일의 원리이자 진리인, 인간에 내재된 "직각 의식" 그것만이 신존재를 인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한 것은 이런 점에서 지극히 타당한 주장이다. 일찌기 초대교회시대부터 교부들은 하나님 존재 증명을 시도했는데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본유적 지식, 즉 직각 의식적인 지식에 호소해 왔다. 가령 이레니우수는 어느 누구나 만유의 주되신 한 분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영 속에 있는 이성이 그것을 밝혀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희랍인이든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든…인류 가운데 미리 영향을 받아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없다"고 했다.

위에서 언급한 이러한 견해를 요약하면 우리는 이것을 "선험론적 신인식" 또 는 "신학의 초월적 선험론"이라 할 것이다. 이 신학적 선험론의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외부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 결코 지식의 근원이 못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신이 가지고 있는 표준을 통해서 타당성이 진리가 된다고 주장한다. 즉 정신은 본유적 내재적 법칙에 의해서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지성의 세계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점 에서 자칫하면 인간의 선험적 신인식이, 인간에 의한 신인식 또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신인식으로 오해될 것을 경계한다. 인간의 선험적 신인식 능력, 즉 본 유적이고 직각 의식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지 아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루터는 더욱 철저하게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지워 선험적 요소를 이해하고 있다. 스트롱은 하나님의 존재인식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직관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 위에 쓰여진 하나의 지식이 아니라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는 것이다. 헨리는 종교적 실제가 감 각적 관찰로서나 추론으로서가 아니라 직관이나 직접적 지각으로서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종교적 궁극적 존재에 대한 즉각적 의식으로서 자신의 내적 경험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가들에 의해 주장되어져 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영암이 신인식의 근본적 도구로서 인간의 직각 의식을 논의한 것은 접근 방법상 정통신학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3) 일관된 구원론적 사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은 기독론이다. "기독교 신학"란 용어 자체가 하나님에 관 한 이치 또는 지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현존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체화되며,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인간의 구원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신론과 인간론 사이에 기독론이 있듯이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기독론이 있다. 그런데 논의의 초점은 기독론의 중심은 구원론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직분으로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 등 3중직을 말하고 있는데 이 3중직은 모두 인간의 구원과 관계하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의 중심은 속죄 사역, 즉 인간 구원 사역에 있다.

이 구원론은 기독론과의 관계 뿐아니라 신론과 인간론 그리고 성령론과 밀접 한 관계를 가진다. 즉 구원론은 "속죄의 동기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본성"과 "속죄의 필요성을 가져오는 인간의 죄"와 "속죄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희생"과의 관계 속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구원을 요청하는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는 성령의 역할과도 구원론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 계시의 역사적 현장에 구원의 장소로 세워진 교회의 사역과도 구원론은 구체적 관계를 갖는 점에서 교회론적이다. 그리고 구원론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 구원의 문제는 기독교신학의 전반적 문제이며 궁극적 관심사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신학은 구원론적이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이자 끝이며, 처음과 나중이다. 멀린스는 기독교 교리의 모든 요소를 예수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먼저 구현되고, 신자들의 영혼 안에서 구현된 바 있는 중심적인 실재, 즉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관련시키는 것이 교리의 체계화·통일화 작업이자 기독교신학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 또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타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죄의 장벽을 허무시고 믿는 자에게는 누구가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런 관점에서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성취를 증거하고 있다. 성경의 교리가 설명하고 있는 핵심점은 영적 권위를 가진 성경 본연의 뜻과 일치해야 하는데,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구원의 선포와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계시의 의미와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구원의 의미를 제시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일관된 구속사(Heilsgeschichte)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구속사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라는 큰 역사적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재창조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을 일관성있게 인간 구원을 위한 역사로 보는 관점이다. 오스카 쿨만은 이 "구속사(救贖史)"를 "구원('救援)의 경륜(經綸)"이란 용어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 구속사란 말은 지나치게 역사적인 사건과 밀접하게 쓰이고, 아울러 성서적인 용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 경향이 있으나 성경은 분명히 구속사적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과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말의 보편적 용어인 "구원의 경 륜"은 보다 성서적이며,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용어이다. 에베소 1장 10절의 "때가 찬"이라는 말이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찬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육신을 입고 마리아에게서 탕생하셨다. 디모데전서 1:4에는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 거짓 교사들의 사변과 대조되어 있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죄인을 구원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활동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초보적 구원으로서의 중생으로부터 온전한 구원으로서의 성결을 향한 성화의 전 과정이 구원론일 때 하나님의 구원사는 성서의 전 과정이며 신학의 구원론적 사건이다. 영암의 신학 방법론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성경을 시종일관성 있게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영 암 구원관의 특징인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과 맥락적인 관계에 있다. 다음 장에 서 상론하겠지만 영암이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또한 그의 신학을 전개하는 것이 바로 그의 구원론적 신학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영암은 「성서대강해」 제 1권에서 창세기 1장 서두,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관한 주석을 시도하면서부터 이를 즉각 구속론과 결부시키고 있음을 본다. 영암의 주석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흑암"은 전연 빛이 없는 세계니 "타락한 인간의 심령"과 방불하다. "깊음"은 심연이라는 뜻인데 비컨 대 엉키지 않은 두부와 같은 상태를 뜻함인데 흑암과 무질서로서 가공(可恐)의 상 태이다. 이것이 천사의 범죄로 인하여 원천지가 심판을 받아서 변동된 "타락의 상태"이 다. 도리켜 생각할 때에 "구원을 받지 못한 죄인의 심령 상태의 가공한 모습도 이 같을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여기에 말한 바 하나님의 신 은 삼위이신 성령인데 성자 성령도 창조의 성업에 동참하셨음을 알 수 있다(요 1:3). "수면에 운행하시다"하심은 비컨대 암탉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 랑이 우주를 덮을 때에 새 세계가 나타나므로 창조의 성업을 실현키 위한 하나님 의 사랑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의 혼돈한 심령에도 하나님의 사랑 이 임할 때에 신생(新生)한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위에서 보듯이 영암은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와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있는 상태와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광경을 주석하면서 즉각 타락한 인간의 심령 상태와 이러한 심령 상태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때 구원(신생)의 은혜를 받게 된다고 구원론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정통신학적 입장에서 대다수 주석가들은 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을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결부시켜 이해하는 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이 본문은 아직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기 전의 창조론적 진술의 장이다. 영암은 계속해서 빛이 있기 전에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 뿐이던 땅이 3절에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흑암은 물러가고 혼돈과 공허도 끝이 났듯이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의 심령에도 하나님의 빛이 임해야 생명이 임한다고 구원론적 주석을 계속한다.

4절의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이 부분을 주석함에 있어서도 "이것은 주야를 구분하기 위한 조처인데 혼돈하고 캄캄한 흑암의 세계에서 광명한 빛의 세계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타락한 인간의 심령을 처음 지으실 때도 하나님 은 빛으로 하셨다"(요1:6)고 설명한다.

이와 함께 영암은 해당 본문에 대해 그의 주석의 한 특징인 "영해"(靈解)를 통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빛은 생명의 빛되신 주님의 모형이니 이 빛을 받아야 신조(新造)함을 받아서 신인(新人)이 된다(요1:4).

말씀의 실천을 강조하는 "교훈"의 부분에 가서는 "중생치 못한 심령은 혼돈과 공허와 암흑이다. 빛을 받아서 새 창조로 신세계의 사람이 되라(고후5:17)"고 역시 구원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창세기 2장 1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는 말씀에 대한 영암의 견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영암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완성을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과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본절은 하나님의 창조의 성업을 완성하셨다는 선언이다. 6일간 하나님은 웅대한 우주의 삼라만상을 말씀으로 건설하고 매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창조의 위업을 확인하셨다… 하나님은 이 같이 물질 세계의 창조를 완성하셨으나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구속의 사업을 완성하셨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과(요 19:30) 본절에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4천년 역사를 전후해서 상호 웅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영암이 창조 과정의 혼돈을 부패한 인간의 심령상태와 결부하고, 하나님 창조사역의 완성을 그리스도 구속사역의 완성과 결부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구속섭리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구속사적 인식관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는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하여 지으셨다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그리 스도 안에서의 구속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된다는 표현이나 만물이 그 발 아래 복종한다는 (고전5:27; 엡1:22, 23) 표현도 창조론과 구속론의 밀접한 관계, 또는 구속론 안에서 규명되는 창조론에 대한 진술이라 하겠다.

영암은 창세기 2:2의 안식일을 "모형론적으로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아서 영혼이 주님 안에서 안식할 것을 예표함이니 이에서 주님은 선언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마11:28)하셨다. (또한) 미래의 영원한 안식의 예표니(히4:10) 구속 얻은 영혼들이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토록 안식할 일에 대한 암시로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안식에 대한 영해에서 영암은 안식일은 영혼의 안식의 모형이니 새로 지음을 받은 성도가 누릴 바 행복의 세계이다. 이에 대한 교훈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안식하셨으나 사람은 안식하고 일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라고 함으로써 안식일을 구원받은 영혼의 안식으로, 안식을 구원의 은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에서 대략 살펴볼 것처럼 영암은 성경을 시종일관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철저하리만큼 일관성있게 구속사적 방법론으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4) 말씀과 체험의 역동성

영암이 자신의 신학을 진술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또 하나 두드러진 특징은 말씀과 체험의 역동성 또는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영암 신학의 방법론상 특징만은 아니다. 목회학이나 윤리학 등 실천신학은 물론 교의학이나 조직신학 등 보다 이론을 중시하는 신학 영역에 있어서도 그 이론의 궁극적인 가치는 보다 성서적인 삶의 규범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인 효능에 있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흔히 참된 신앙고백이 없는 신학은 죽은 신학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신학의 실천적인 사명 기능을 십분 고려한다 하더라도 영암에게 있어서는 신학 진술 방법론상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져 있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물론 영암이 이론신학을 전공한 학자라기보다는 일생을 목회와 설교와 신학 교육에 힘써온 실천신학자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 다. 그는 조직신학서인 「성서적 정통신학」집필 동기나 성경의 이론적 주석서인 「성서대강해」를 집필한 동기, 그리고 그 내용 기술상의 방법론을 살펴보면 시종일관 성서의 말씀과 그것이 요청하는 실천적 삶을 조화시키려 의도하고 양자간의 역동성을 단단하게 천착해 들어가는 집요한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영암이 성서대강해를 집필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1958년)에 새로운 각성을 좀 더 효과있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필요한 급선무는 보수적 성서해석이다. 이때까지 한국의 성서해석은 보수파에 일부, 반보수파에 일부로서 모두가 왕성치 못하였다.

영암은 1957년 10월부터 1958년 4월까지 약 7개월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 여행은 영암에게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지배하고 있는 미국과, 조만 간에 이 영향을 받게될 한국교회의 현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서구의 신학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으로 급격히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신학 조류 속에서 영암은 보수신앙과 신학을 확고히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거기다가 한국 성결교회는 WCC 가입 문제로 오랜 진통을 겪다가 1960년에는 끝내 교단이 분열되는 진통을 겪게 되었다.

위의 진술에서도 보듯이 영암은 단순히 자신의 신학적 입장 표명이나 이론 정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세속화되어 가는 신학 경향 속에서 성서적 보수신 앙을 지키고 이를 표방하기 위한 다분히 실천적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성서대강해」 서문을 보면 "복잡한 논리나 구구한 학설을 피하고 간단명료를 위하야 매장에 (1)분해, (2)종합강의 , (3)본문 주해, (4)요해, (5)영해, (6)교훈, (7)설교예제 등으로 일반독자에게는 성서지식을 함양하며 일반 교직자에게는 실제응용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평이하면서도 심오한 영해와 실제 신앙생활에 교훈으로써 다방면으로 예수를 증거하려고…" 집필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그의 신학 방법론에 실천적인 면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69년에 집필된 「성서적 정통신학」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신학이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구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교리나 학적 논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신앙에 적응하여 실천함에 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바이다. 그리고 신학은 일반 학자 뿐 아니라 교역자는 물론이요, 일반 평신도까지 알아야 한다는 것도 통감하는 바이다.

영암이 이처럼 말씀과 실천적인 면의 조화를 꽤하려고 노력한 그의 자세를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영암이 신학의 자료를 "자연"과 "성서"와 "경험" 등 세 가지를 제시한 것과 결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술한 것처럼 성경은 신학의 1차적 자료이며 자연과 경험은 2차적 자료이다. 이렇게 볼 때 영암은 신학의 1차 자료와 2차 자료의 균형있는 사용을 통해 그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즉 텍스트로서의 성서와 그 텍스트에 의한 실천적인 삶의 실제와의 조화를 통해 신학과 신앙의 역동성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암의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요청하는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진정한 크리스챤의 당연한 신앙 자세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서가 권위적 자료이기는 하나, 단순히 성서만 있고 보조적 자료인 체험이 없다면, 그 신학은 지나치게 교조적이거나 율법적으로 흐르고 말 것이며, 반대로 체험만 있고 성서가 없다면 그 신학은 사변에 흐르거나 신비주의 신학이 될 것이다. 멀린스는 이점을 의식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기독교종교는 "체험의 사실"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의 사실" 등 두개의 큰 사실 등과 관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고찰한 바 있거니 와 앞으로도 자주 이것을 말하려고 한다……그리스도인의 체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기독교 계시의 개념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의 체험과 기독교의 계시는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어느 한편을 떠나서는 어느 편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 할 수 있다. 곧 인간의 응답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이며 실천 그 자체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의 성서와, 일반계시로서의 자연과 역사와 경험등을 균형있게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신앙의 요건이자 기독교신학의 요건이다. 경험의 신학자로 불리우는 죤 웨슬리에게 있어서도 그의 신학 방법론의 한 특징이 곧 성서와 체험의 조화에 있다. 기독교 신학에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웨슬리의 관점은 자신의 영적 변화의 체험에 의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웨슬리 자신이 "이상하게도 가슴이 뜨거워진" 1738년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체험"(Aldersgate Street's Experience)을 중시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조종남은 루터의 신학이나 칼빈의 신학과 구별되는 웨슬리신학의 방법론상 특징을 성서와 체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웨슬리가 성서에서 교리를 연역하며 내는 데 크게 역할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체험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체험이라는 말은 죤 로크의 경험론적인 것이나 슐라이에르마허의 그것과는 구분해야 한다. 웨슬리가 말하는 체험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호응하는 것으로서 구속적 체험이자 "성령에 의한 체험" 으로서 슐라이에르마허가 말하는 인본주의적인 종교체험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체험은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으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또 그 근거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체험은 성서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 호응하는 것으로서의 체험이다. 영암이 그의 신학방법으로 일관성 있게 보여주는 성서와 체험의 관계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선행적 은총"개념을 영암은 "직각 인식"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마르틴 루터는 신앙과 체험을 역동적인 관계 또는 역설적인 관계로 보았다. 신앙은 체험을 요청하는데 이 체험은 시련 속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과 체험은 상호 모순이 아니다. 논자가 성서와 체험, 또는 말씀과 체험을 역동적인 관계로 보는 것도 이러한 관점이다. 이 역동성은 성서가 체험을 불러 일으키고, 체험은 성서의 빛을 더욱 밝히 드러내는 상호 발전적인 역동성인 것이다.

이처럼 성서에 의한 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웨슬리 신학 계열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암 자신도 성서가 증거하는 중생의 교리나 성결의 교리를 구체적인 은혜 체험을 통하여 확신하게 되었던 터이다. 다음 장에서 상론하겠지만 영암은 중생의 은혜를 입신(入信)후 2년만인 1908년 15세때 분명한 체험을 통하여 받게 되었으며 성결의 은혜는 신학교 재학 중인 1917년 일본 전도 여행 중 체험을 통하여 받게 되었다. 그런데 영암은 이 성결의 은혜 체험을 예수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그것을 환상하던 중에 동시적으로 하게 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그러니까 재림의 확신을 갖는 순간 성결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으며 요한일서 3장 3절 말씀이 생각나면서 강한 성결의 은혜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영암은 유례가 드물게도 급진적으로 재림의 환상과 함께 성결의 은혜 체험을 하게 된 인물이다. 그뿐 아니라 신유의 은혜도 성결의 은혜 체험 이후 17년만에 구체적으로 경험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영암이 시종일관 말씀과 실천적 체험의 조화를 유지하고 그 역동성을 강조한 것도 이렇듯 철저한 자신의 은혜체험에 기인한 것이다.


결언

필자는 지금까지 영암 김응조 목사의 생애와 신앙을 개관하고 그의 신학사상의 핵심을 초록하여 소개하였다. 우리가 위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영암은 성결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예성교단의 지도자요 우리에게 신앙과 신학을 전수해 주신 스승이시다. 이런 점에서 영암은 '우리 학교의 아버지'이자 '예성의 상징적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생전에 그의 신앙사상이 교파주의를 훨씬 뛰어넘은 데 있었듯이 영암은 수많은 저술과 초교파 부흥 사역, 그리고 본교를 통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모든 교단으로 파송한 교역사업 등을 통해 볼 때 '한국교회의 공로자'이자 '한국교회와 신학계의 상징적 대원로' 중의 한 분으로 교회사적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는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 뜬 선각자요 일제 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서다가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자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앙의 승리자이자 애국지사이시다. 96년이라는 순례자의 길을 통해 영암이 우리에게 끼치고 남긴 신앙적, 학문적, 인격적 유산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이 시간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그토록 가깝게 따라가려고 애쓴 그분의 삶을 우리도 본받아 사는 일이며 이를 널리 후진들에게 가르치는 일이다.

우리의 모교인 성결대학교 재림관 정문 앞에는 이러한 스승의 일생을 함축하는 글귀가 새겨진 돌이 하나 놓여져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순간 순간 지나쳐 버릴 때가 많지만 가끔씩 그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그분의 가르침이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작은 모세 같으신
예성의 아버지이시여
잘 오셔서
큰일하시고
잘 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