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가 가르친 “기준을 가진 은혜”(normed grace)
장기영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원천과 동기, 능력이 되지만, 은혜를 오용하는 죄인에게는 태만과 방종의 핑계거리가 되고 만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스스로 치를 능력이 없는 값비싼 대가를 하나님께서 대신 지불해주셨음에도, 자신 편에서 아무런 값을 지불하지 않았기에 은혜를 값싸게 여기는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과 6: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에서 경계한 일은 시대를 거듭하며 은혜를 오용하는 자들에게서 반복된다. 웨슬리는 이러한 오용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고자 했다.
웨슬리에게서 은혜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죄인에게 경험되는 것이다. 이 경험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수여와 소통”을 통해 죄인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 삶에 참여해 그들과 연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벧전 1:16)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라고 엄중히 경고하셨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엄중히 요구하시는 거룩함이란 달리 표현하면 “사랑의 관계에 동반되어야 할 온전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질적 요소”이다. 하나님 은혜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직접적 관계” 형성의 원천으로 작용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자각은 그 “관계의 질”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더라도 “사랑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잘못된 사랑의 방식에는 제한을 가하며, 하나님의 신비를 인지하게 만드는 거룩함”을 함께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히 그의 십자가에서 가장 겸비한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콜린스는 “웨슬리가 이해한 바, 거룩함이라는 질적 특징을 갖지 못한 사랑은 죄인의 자기 추구, 감정에 치우친 사랑,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선하다고 주장하는 … 탐욕적이고 방종적인 믿지 못할 사랑이다”라고 바르게 지적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사랑 중 “어느 것 하나도 무시해서는 안 되고 둘 모두를 긴장 속에서 함께 붙드는 것”이어야 한다.
웨슬리가 “복음 설교가”(gospel preachers)라는 냉소적 별명을 붙인 많은 설교자는 은혜를 가르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말하지 않고 “율법이 가진 계시적 성격과 신자를 인도하는 능력을 폄하하면서 성경적 균형을 상실한 열광적, 율법무용론적 방식으로” 오직 하나님 사랑의 선포만을 강조했다. 그 결과 그들이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및 피조물을 향한 거룩함의 요구 를 포괄하지 못하고, 신자의 삶에서 구원의 목적인 질적 사랑의 관계를 제거해버린 “무정형의”(amorphous) 은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반대해 웨슬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 모두에 기초해 가르친 은혜는 “기준을 가진”(normed) 은혜이다. 콜린스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란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과 규범이 존재하는 가운데 발생하고 증가하며, 인간의 뜻과 욕망에 좌우되지 않는 기준인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그 본질이 드러난다 … 거룩함과 사랑의 종합을 제거해버린 은혜는 죄인의 억측과 고집, 감상주의, 무엇보다 웨슬리가 통탄해마지 않았던 율법무용론으로 전락하고 만다”라는 말로 웨슬리가 강조한 “기준을 가진” 은혜를 통찰력 있게 설명한다. 율법 속에 계시된 기준, 즉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는 삶과 거스르는 삶,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순응하는 삶과 거스르는 삶, 선과 악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짓는 성경적 기준이 불확실한 채로는 타락한 죄인이 죄를 그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도 일어날 수 없고, 신자 또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함의 “기준을 가진” 은혜이기에 루터, 칼빈 등 종교개혁 전통이 더 초점을 둔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 만으로 끝나지 않고, 영국 국교회, 동방 정교회, 로마 교회 등 폭넓은 가톨릭 전통이 강조한 “하나님의 길로 행할 수 있도록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능력’ ”을 포함함을 강하게 역설했다. 그 결과 “웨슬리에게 은혜란 하나님께서 풍성한 호의를 베푸셔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로 그들의 마음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돕고 갱신해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을 포함한다.” 기독교의 은혜에 관한 선포가 칭의라는 법정적 주제에 그쳐서는 안 되고, 신생과 온전한 성화와 같은 치유적 또는 참여적 주제를 반드시 포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함이라는 기준 안에서 바르게 이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룩함으로의 실제적 변화를 가져오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구원의 과정에서 오직 주권적 은혜만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역사하시는 순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은혜란 언제나 불가항력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을 한없이 수동적이고 무능한 존재로만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임을 분명히 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구원 역시 사람이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생각을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함으로 뒷받침했다. 매덕스가 잘 설명한 대로, 웨슬리는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 “구원은 명백히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이 선물은 동시에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고 또 책임성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친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의해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할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조차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어떤 주장도 인간의 결정을 구원의 최종 근거로 삼는 것이라며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칼빈주의자들의 극단성이다. 그들의 주장은 사람의 신앙의 유무와 성화에서의 진전 등 개인의 구원과 인류 역사의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어떤 해석도 펠라기우스주의 또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라는 극단적 흑백논리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중예정론자들의 배타적 흑백논리에 반대해, 그들의 근본적 전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웨슬리가 제기한 의문의 본질은, 과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이 신앙적 결단으로 은혜에 반응하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인간의 어떤 반응도 고려하지 않고, 심지어 그가 신앙을 갖게 될 것인지 아닌지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서만 인간의 구원과 멸망을 결정짓기를 원하시는가? 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웨슬리의 응답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의 “공로”가 되지는 않는다는, 구원의 “조건”과 “공로” 사이의 구분이었다. 예를 들어, 1770년 감리교 연회록에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질문: “이것이 행위에 의한 구원이 아닙니까?”, 대답: “행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건으로 제시된 행위에 의한 것입니다.” 여기서 웨슬리가 말하는 구원의 “조건”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른 응답, 즉 신앙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신앙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가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적합하지 않은 태도로 일관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신앙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조건"에 순응한다 해서 그것이 구원의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구원의 조건과 공로 사이를 구분해 실제로 성경 본문을 해석한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첫째 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해이다. 웨슬리는 신약성서주해에서 이 구절을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라는 더 넓은 문맥(3장 12-22절) 속에서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라는 말씀과 연결해 다음과 같이 주해한다.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완전히 내던져버릴 것이다 ... 그러나 너희가 기쁜 마음으로 나를 받아들이면 나는 은혜와 은사로 너희를 새롭게 하고, 너희에게 은혜와 은사 주었음을 즐거워할 것이며, 너희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는 계시록 3:20을 하나님께서 죄된 상태를 지속하며 회개하지 않는 신자는 버리지시만, 회개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생을 계속 누리게 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비록 구원 받은 이후의 신자라도 태만과 방종 속에서 다시 그 “기질과 행위가 ... 하나님의 일에 철저한 문외한같이 되어 아무 관심과 생각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내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빌립보서 2:12(“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말씀처럼, 구원 이후의 신자 역시 언제나 “’불로 연단한 금’ 즉 고통 속에서 정제된 참되고 산 믿음과, ‘흰옷’ 즉 참된 성결과, ‘안약’ 즉 성령의 신령한 조명하심’”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함을 강조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의 문을 열어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계시록 3:20의 요구는, 처음 예수님을 믿는 영접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과거에 믿음을 가졌으나 그 후로 믿음과 사랑이 냉랭해져 주님께 내치심을 받을 위기에 처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다시 회개와 성결로 나아감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하라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이 모든 말씀이 보여주는 것이, 강제로 신자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고, 이미 은혜를 주셨기에 신자의 책임성 있는 태도를 요구하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심을 매우 강조한다. 특히 15절의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는 주님의 요구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주님의 바람은,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 자신의 인격적인 결단이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일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라고 분명히 단언한다. 20절의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이라는 말씀 역시 주님은 은혜를 주실 때 신자의 인격적 책임성과 결단을 촉구하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웨슬리가 구원의 조건과 공로 사이를 구분한 두 번째 실례는 로마서 11:22(“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해석이다. 이 구절이 포함된 더 큰 문맥인 로마서 11:20-23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 문맥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변하지 않는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 속에 계속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믿음을 버림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저버리느냐가, 하나님의 구원의 나무에 접붙임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찍혀 버려지느냐의 조건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도 찍히는 바 되리라”(22)라는 말씀을, “현재 믿음 안에 굳게 서있는 자라도 후에 믿음을 잃게 되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잘려나가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구원의 조건으로서 신앙의 요구를 구원의 유지 뿐 아니라 구원 자체에도 적용한다. 23절은 이방인들도 불신 가운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즉 신앙을 갖게 되면 접붙임을 받는다고 표현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므로 인간의 어떤 반응도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다. 그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자신이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는 신앙을 조건으로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웨슬리는 로마서 11:20(“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꺽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말씀이나, 11:22(“그렇지 아니하면[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무르지 않으면] 너희도 찍히는 바 되리라”) 말씀이 모두 “조건적이지” 즉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요구되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즉, 신앙으로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켰다 해서 믿음 자체가 구원을 위해 충분하고 완전한 공로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만약 믿음이 구원을 위한 절대적 충족 요소라면, 사람이 자랑할 수 있을 것이지만” 믿음은 결코 스스로 자랑할 만한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11:23(“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말씀에서 드러나듯, 하나님께서 신앙을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시고 또 인간이 신앙으로 그 조건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그를 구원하실 자유와 능력과 공로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분명히 언급한 것이다. 웨슬리가 여기서 “절대적”이라고 쓴 용어는 1770년 연회에서 “공로”라고 쓴 말과 유사한 의미로 지닌다. 즉, 믿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조건이지, 그 자체가 공로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웨슬리가 구원의 조건과 공로 사이를 구분한 세 번째 실례는 출애굽기 14:15-16(“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해설이다. 웨슬리는 설교 “은총의 수단”에서 출 14:13-14(“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말씀을 통해 구원과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말씀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홍해가 갈라진 사건 앞에서 누가 감히 인간의 공로와 노력을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림이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공로와 영광을 돌려 마땅한 이 사건에서조차도 하나님은 인간이 전적으로 수동적이기만 바라지는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출 14:15-16) 말씀하셨다. 웨슬리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을 앙망하고 받아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과,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요구하시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일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음을 역설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로 전진한 것과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민 것이, 구약의 위대한 구원 사건을 성취하게 된 “공로”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구원 사건에서 그들의 인격적 응답을 원하시기에 그들에게 요구하신 “조건”일 뿐이다.
웨슬리가 구원의 조건과 공로 사이를 구분한 위 세 가지 사례를 종합하면, 웨슬리는 출애굽기 14:13-16과 계시록 3:20은 구원받은 이후의 회개와 은혜의 지속에 있어서 신자의 책임성에 관한 구절로 설명한다. 그러나 로마서 11:20-23은 불신자의 구원 및 신자의 구원의 지속 모두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말씀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모든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신앙이나 행위는 구원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으로 설명한다. 흔히 웨슬리를 오해하고 비난하는 이들은, 만약 사람이 신앙을 결단해야 한다면 그것은 구원이 인간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라는 극단적 흑백논리로 웨슬리 신학은 인간의 공로로 구원받음을 가르치는 신학이라고 비난하곤 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신앙과 순종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요구하시는 구원의 조건임을 가르쳤을 뿐, 그 조건을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구원의 공로와 영광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았다. 웨슬리의 “공로”와 “조건” 사이의 구분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인간의 신앙의 결단과 순종을 조건적으로 요구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음에 대한 탁월한 설명이 되므로, 성경적 구원론의 많은 난제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웨슬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신앙의 결단과 순종조차도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기 위한 “절대적” 또는 “공로적” 가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친 것은, 인간의 행위로서 율법 순종을 구원의 공로를 쌓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율법에 대한 순종을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나 구원의 공로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은 그의 박사학위논문에서 웨슬리가 율법 순종을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시켰는지 다섯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율법은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율법은 “내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율법은, 동일한 하나님의 본성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 본질로 내포하고 있다.
둘째,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우리가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원천이므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율법의 성취는 서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변화 자체를 이루어주신다. 복음의 은혜는 율법의 성취인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가능케 한다.
셋째, 윌슨은 한 성령께서 율법도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사랑도 계시하시므로, 성령 안에서 율법과 하나님의 사랑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윌슨의 설명에서 아쉬운 점은, 이러한 언급 외에, 성령을 통해 율법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5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 보겠지만, 웨슬리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계시하심을 통해 우리로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 그리고 율법에 순종했을 때의 결과 모두를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계시해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령의 증거”(롬 8:16)는 율법의 의미와 원천, 목적 모두와 관계된다. 더 나아가 성령의 오순절적 능력부음의 본질은 죄로부터의 정결과 충만한 사랑의 능력인 성결의 은혜(행 15:8-9)로서, 신자 속에 남아있는 죄의 뿌리를 제거하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성취하게 한다.
넷째로, 율법과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신앙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 신앙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후에, 다음으로 우리 속에 응답적 사랑을 일으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 율법을 세운다. 신앙은 율법이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밝혀주어 순종의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율법과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개념에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책과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다.
윌슨이 제시한 이 다섯 가지 이외에도, 웨슬리에게서 율법과 하나님의 은혜의 연결은 “감추어진 약속” 개념과 하나님의 섭리 개념에서도 나타난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크기가 우리의 능력보다 더 크지 않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할 때는 우리에게 더 큰 힘을 주시므로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시험 외에는 어떤 시험도 겪지 않음”(고전 10:13)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고난을 제한하시는 이유를, 하나님의 정의 뿐 아니라 자비의 측면에서도 설명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자비, 신실하심 뿐만 아니라 지혜로 인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 우리에게 주셨거나 필요할 때 더해주실 힘보다 더 큰 시험은 주지 않으시며, 주실 수도 없습니다 … 하나님은 여러분의 짐을 여러분의 능력에 맞게 조절해 주십니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할 때는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마 7:7).” 따라서 “사람은 누구라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거나, 율법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충분한 은혜는, 우리로 죄를 벗어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성취할 능력을 부으시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요약하면, 웨슬리가 가르친 하나님의 은혜는 복음으로 율법을 배제하거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태만과 방종에 빠져도 구원에는 문제가 없는 거룩함이라는 기준을 결여한(“무정형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이 원천과 동기와 능력이 되어 그 기준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체가 되게 하시는 “기준을 가진”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