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구원론에 관한 몇 가지 질문

 

이신건

(2018년 10월 5일, 서울신학대학교 제16회 카우만 기념강좌)

 

오늘 서울신학대학교와 OMS 선교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16회 카우만 기념강좌”가 열렸다. 심심하던 차에 강연장에 들어가 보았다. 강사는 에즈베리 신학대학의 교수였던 앨런 카페지(Allan Coppedge) 박사다. 첫 번째 날(10월 2일)에는 “존 웨슬리의 하나님 이해”를 발표했고, 오늘은 “존 웨슬리의 구원론”을 발표한다. 강연 내용이 유인물에 그대로 수록되었기 때문에 미리 훑어보고 일찍 자리를 떴다.

우리 대학교와 교회가 웨슬리 신학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열렬히 추종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신학적, 신앙적 뿌리인 웨슬리 신학을 주기적으로 연구하고 확산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전통과의 관련성이 점점 희미해지고, 미래의 파도 앞에서 전전긍긍할수록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뿌리를 확인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

강연의 주제가 “웨슬리의 구원론”이기 때문에 나의 관심이 더욱 더 쏠렸던 것 같다. 그의 강연 내용은 작년에 나온 책 “성경적 구원의 길. 존 웨슬리 신학의 정수”(K. J 콜린스 지음, 장기영 옮김, 새물결플러스)와 거의 – 완전히! - 일치한다. 그러나 카페지는 구원의 질서(서정)에 관한 설명을 좀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원은 선행적 은총(구원 이전의 은총) -> 죄를 자각하게 하는 은총(최초의 회개) -> 구원의 은총(용서, 칭의, 신생) -> 구원의 확신(성령의 증거) -> 은혜 아래서 자라감(점진적 성화) -> 죄투성이임을 자각함(제2차 회개) -> 은총에 의한 온전한 성화(완전한 사랑, 성령충만) -> 온전한 성화의 확신(성령의 증거) -> 은혜 아래서 자라감(성숙) -> 영화의 순서로 일어난다. 구원의 목적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백성”이고, 목적을 위한 방법은 “은총”이다.

강연의 장점은 웨슬리 구원론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고 분명하게 밝혀준다는 점에 있다. 단점이라면, 다른 이론과의 비교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질문하게 된다.

선행적 은총은 왜 하필 “구원 이전의 은총”이며, “타락 이전의 은총”은 아닌가?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기를 기다렸다가 타락 후에 비로소 구원을 위해 은총을 부어주시는가? 왜 여전히 “전적인 타락”을 주장하는가? 이에 대한 성서적 근거가 얼마나 희박한가? 비록 그가 칼뱅의 예정론을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웨슬리와 그가 칼뱅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흔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콜린스처럼 그의 구원론도 왜 여전히 “인간중심적”인가? 왜 그는 사회적 해방(사회적 성결?)이나 자연의 치유와 완성, 만물의 화해 등에 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는가? 웨슬리도 과연 그랬는가? 우리도 여전히 그래야 하는가?

여하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나라를 찾아와서, 열심히 강연해 주시는 카페지 박사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모처럼 가을비가 내리니, 기분이 더 맑아지고 만물도 더 신선하다. 그의 방문으로 인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도 더 맑아지고 신선해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