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가 극복해야 할 종교개혁 신학

2. 율법의 평가절하에 대한 웨슬리의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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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종교개혁 신학의 부정적 영향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인이 빠져있는 율법무용론을 극복하기 위한 웨슬리의 가르침입니다. 율법과 복음을 균형있게 가르치지 못하고, 율법을 폄하하는 방법으로 “복음! 복음!” “십자가! 십자가!”만 외쳐온 설교자나 그들로부터 영향 받은 신자 모두가 주목해야 할 웨슬리의 메시지입니다.

 

웨슬리는, 루터가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을 통해 가르친 진리를 충분히 이해했고 그 의도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따라서 루터가 가르친 율법과 복음,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 구원을 위한 인간 공로의 가능성과 그리스도 공로의 충분성, 인간 행위의 불완전성과 하나님 은총의 완전성 사이의 변증법, 신자라도 율법의 정죄를 통해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게 된다는 가르침은 웨슬리 신학에서 일관되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웨슬리는 설교 “율법의 기원, 본성, 속성 및 용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용구, 웨슬리) “신자는 날마다 신성한 거울인 율법에서 점점 더 자신의 죄 많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모든 면에서 아직 죄인임을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되며, 마음이나 삶의 방식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함을 보게 됩니다. 그로 인해 매 순간 그리스도께 나아갑니다. … 예를 들어,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외적 행위뿐 아니라 모든 불친절한 말과 생각을 금지합니다. 이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느낍니다. 또 그럴수록 주님의 피가 내 죄를 대속하시고, 성령께서 내 마음을 정결케 하셔서 나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약 1:4) 해주셔야 할 필요를 더욱 느낍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없이 단 한순간도 지낼 수 없듯이 율법 없이는 잠시도 지낼 수 없습니다. 율법이 과거에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었듯, 그 후로도 내가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해야 할 필요를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웨슬리 신학에는 루터 신학과 두드러지게 대조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correlation)이다. 웨슬리는, 율법과 복음을 양분한 후 복음은 우월하게 묘사하면서 율법은 “죄, 사탄, 죽음과 동일시해 율법을 판단하고 폄하”하는 루터식 태도에 반대했다. 그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은혜의 도구”로 가르치면서,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말미암고 또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에 “여러분은 율법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다음가는 영광과 기쁨으로 삼고, 율법을 찬양하며, 만인 앞에 영예로운 것이 되게 만드십시오”라고 권면한다. 또 “그리스도를 가까이하려거든 율법을 가까이하십시오. 율법이 여러분을 계속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로 인도하게 하고, ‘율법의 모든 의가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져’(롬 8:4)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엡 3:19) 하시기까지 계속 여러분의 소망을 확증하게 하십시오”라고 권면한다.

웨슬리의 두 편의 설교 “믿음으로 세워지는 율법 (1), (2)”는 웨슬리가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과 상관법 모두를 중요하게 가르쳤음을 보여준다. 이 설교에서 웨슬리가 개신교에서 율법이 평가절하되고 그 선포가 약화된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으로 제시한 내용은 웨슬리와 루터의 율법관의 차이를 잘 드러낸다. 웨슬리는 이 설교에서 먼저 개신교 내에 율법무용론이 만연하게 된 첫째 원인을, 많은 개신교 설교자가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로만 말하면 율법의 모든 목적을 충족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율법을 전혀 설교하지 않으려는” 경향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웨슬리의 이러한 지적은, 루터가 아그리콜라를 비롯해 자신의 추종자 중에서 복음을 편협하게 해석해 율법무용론에 빠진 사람을 비판한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개신교 설교자가 복음을 오직 십자가를 전하는 것만으로 제한하는 편협성은 루터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루터의 은총론을 왜곡한 율법무용론자들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지적한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로만 말하면 율법의 모든 목적을 충족할 수 있다”고 믿는 오류를 루터와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율법을 설교하지 않으려는 경향”에 대한 웨슬리의 지적에서 루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웨슬리는 이 표현에서 율법의 정죄적 용법만을 인정해 율법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태도는 율법의 온전한 가치와 효용성을 드러내지 못하기에, 성경이 가르치는 율법의 정죄와 지시,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과 상관법 모두를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제각각 다른 유용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말씀은 “잠자는 자를 일깨우고” “무지한 자를 지도하며”, 다른 말씀은 “심약한 자를 위로하고”, 또 다른 말씀은 “성도를 일으켜 세우고 완전케” 한다. 성경 속 율법은 신자의 삶을 전반적으로 지도하는 말씀으로 가득하며, 그 모든 것이 신자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인은 아그리콜라처럼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의 의미를 축소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으로 한정 지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루터처럼 율법의 역할을 정죄라는 부정적인 것으로 축소해 그 가치를 폄하하면서 복음만 높여서도 안 된다. 웨슬리는 이 모든 의미를 담아, 설교자는 “신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것을 … 전하며 설교할 때”라야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하고 설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웨슬리의 이런 생각은 그가 설교에서 어떤 성경 본문을 많이 사용했는지에 잘 녹아들어 있다. 아우틀러의 분석에 따르면, “웨슬리가 설교 본문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 성경은 마태복음(1,362회), 그다음은 히브리서(965회), 요한복음(870회), 누가복음(853회), 고린도전서(779회)” 등이다. 이 분석은 웨슬리의 생애 전체에서의 “설교 횟수 52,400회를 모두 다루지는 못했지만, 웨슬리가 어떤 성경 본문에 더 애착을 가졌는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웨슬리가 마태복음을 자주 설교한 이유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가 처음 출판한 네 권의 『표준설교집』 총 44편의 설교 중 13편, 전체의 약 3분의 1 분량이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에 할애되어 있다. 이선희에 의하면, 이 산상설교 시리즈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의 설계도 전체”를 보여주여 성경적 구원의 길을 “정밀하고도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구원을 신자가 회개와 칭의, 중생을 거쳐 성결로 나아가는 것으로 설명하되, 구원의 열매는 신자가 “영혼의 거룩한 기질”을 소유해 그 “외적 표현”으로 율법을 준행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 신앙과 순종, 구원과 그 열매 사이의 관계를 균형 있게 가르치는 일에 산상설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신약은 구약의 율법을 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이 성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마태복음을 “예수님을 구약성경과 연결”하는 중요한 본문으로 보았다. 쉐마(신 6:4-5)를 포함해 구약의 “모든 도덕적 명령”은 신약 시대에 부어진 은혜의 관점에서 보면 “‘감추어진 약속’(covered promise), 즉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될 약속”과도 같다. 웨슬리에게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칭의와 성화, 죄 용서와 율법에 대한 순종,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과 상관법 모두를 포괄함을 보여주는 최적의 본문인 것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루터와 웨슬리의 견해 차이는 소위 ‘정경 속 정경’개념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 루터는 복음에 가치를 두어 요한복음, 바울 서신, 베드로전서 등을 순수한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가장 소중히 여겼다. 특히 루터는 『탁상담화』에서 “갈라디아서는 내가 사랑하는 서신이다. … 갈라디아서는 내게 카티 폰 보라[루터의 아내]다”라고 말할 정도로 갈라디아서를 특별히 여겼다. 그러나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가 지적한 것처럼, 루터의 ‘정경 속 정경’ 개념은 “성경의 한두 책을 나머지 책들보다 우위에 둔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어느 책이나 저자를 권장해 항상 성경의 그 부분에서 해답을 찾고 다른 부분을 소홀히 다루는 습관에 빠지면 … [그 결과는] 진짜 성경이 마음대로 취사선택 가능한 미니 성경으로 대치되고 만다. 진정한 정경이 개인적인 정경에 종속되어 버린다.” 복음에 대한 선호와 율법에 대한 폄하로 인해 루터에게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웨슬리가 성경 말씀 전체를 선포해야 함을 강조한 것은 루터식 ‘정경 속 정경’의 취사선택에 내포된 위험, 즉 하나님의 다른 말씀을 배제할 위험성을 명확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정경 속 정경’ 개념 자체를 전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다. 로버트 월(Robert Wall)에 따르면, 웨슬리가 정경 속의 정경으로 여긴 성경은 요한일서다. 그러나 이는 루터가 복음을 강조해 야고보서를 배제하는 태도를 가진 것처럼, 요한일서의 특정한 주장을 강조해 다른 성경의 내용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한일서가 “성경의 모든 책을 요약해놓은 대요”로서 “성경의 나머지 책을 이해하는 신학적 규준이 되어 성경 전체를 보는 시각을 열어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사도 요한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한 마지막 사도”로서 당시 기독교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혼동 속에 있던 문제를 해결해 주기에 적격자였을 뿐 아니라, “세상의 시작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자녀 중 누구도 … 요한일서를 썼을 시기의 성숙한 사도 요한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진전을 이룬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웨슬리가 요한일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성경 전체의 대요와 취지는, 루터가 강조한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만이 아니라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을 포함한다. 즉 성경 전체의 대요와 취지는, 개신교인이 대체로 잘 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얻는 죄에서의 구원과, 신자라도 죄에 빠질 수 있기에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필요로 한다는 가르침(요일 1:8-2:2)만이 아니라, 많은 개신교인이 루터 신학의 영향 아래 신자라도 죄는 어쩔 수 없다는 영적 패배주의에 빠져 쉽게 부인해온 진리, 즉 온전한 사랑을 통해 거룩한 삶이 가능함을 가르친다.

요한일서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정죄와 용서에 그치지 않고, 복음으로 인해 율법을 성취하는 데까지 나아감을 분명히 드러내는 본문은 3: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과 5:18(“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이다. 웨슬리는 온전한 사랑의 실현과 죄에 대한 승리를 가르치는 요한일서를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통로로 삼아, “요한일서와 신약성경 전체의 취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은 완전하다”는 것임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요한일서를 “고귀함과 단순함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가장 강한 의미와 분명한 언어로 쓰인 … 성경에서 가장 깊이 있는 말씀”으로 묘사하면서, “만약 설교자가 하나님 말씀 중 어느 한 책을 다른 어떤 책보다 설교의 모범으로 삼고자 한다면, 그것은 요한일서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역설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려는 개신교 설교자는 아그리콜라식 율법무용론, 루터식 율법의 평가절하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 개신교 설교자는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로 율법을 성취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할 수 있음을 믿고 율법을 다음과 같이 설교해야 한다.

(인용구, 웨슬리) “우리는 위대한 선생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 그랬던 것같이 율법을 전반적으로 가르치고, 그 모든 부분을 상세히 설명하며, 애써 강조함으로 … 하나님의 온전하신 가르침을 어떤 제한이나 유보도 없이 선포함으로 율법을 세웁니다. …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율법을 선포할 때 … 주님과 사도들이 전한 그 충만함 가운데서 넓고 높고 깊고 길게 … 문자적 의미만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 외적 행위만이 아니라 내적 원리와 마음속 생각, 욕구, 의도에 유의해 선포할 때 비로소 율법을 세웁니다. …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은 무엇이든 선포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 속에서 역사해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딤후 3:17) 하시는 과정에서 그 모든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웨슬리는 개신교에서 율법이 경시되고 약화된 두 번째 원인을, 개신교 설교자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율법을 지킬 필요를 전적으로 배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샛길로 빠져 다음과 같이 상상합니다. (1)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오시기 전만큼 성결이 필요하지는 않다. (2) 성결이 필요하더라도 그 정도가 낮아졌다. (3) 신자는 불신자들만큼 성결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웨슬리는,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죄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순종과 성결에서의 자유”로 여기는 어불성설로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하는 죄”에 해당한다고 경고했다. 웨슬리는 율법무용론자가 자주 오용하는 논리가 “은혜 언약 아래에서는 율법의 행위에 묶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임을 관찰하고, 이를 반박했다.

(인용구, 웨슬리) “모든 선행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되기 전이 아니라 용납된 후에 필요합니다. … 율법의 행위는 칭의를 얻게 하는 믿음에 즉시 뒤따르는 열매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이,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근거, 즉 믿음만 있으면 어떤 종류, 어떤 정도의 성결도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 은혜 언약의 본질은 순종과 성결에 대한 필요성을 조금이라도 폐기하거나, 필요성의 정도를 조금이라도 감소시키지 않습니다.”

웨슬리는 은혜 언약 아래에서 율법 순종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요소임을 가르쳤다. 웨슬리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그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의 원천은 “사랑의 대양”(the great ocean of love)이신 하나님이시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조건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그 믿음은 신자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강력한 동기와 능력을 제공한다. 그 결과 인간의 타락 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이지만, 믿음의 시작과 끝, 뿌리와 열매 모두는 사랑에서 시작되고 사랑으로 연결되기에, 은혜 언약 아래에서 구원의 조건인 믿음은 곧 사랑에 의해 생겨나고 사랑을 일으키며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다. 이런 의미로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을 배제한 믿음이 아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사랑을 통해 생기가 넘치는 믿음”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믿음이 이같이 사랑을 일으킨다면, 사랑이 충만한 신자에게 “죄가 자리할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라고 묻는다.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악을 행치 않고 선을 행함으로 율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인용구, 웨슬리) “’율법의 완성’(마 5:17)이자 그리스도인의 … 모든 내적 의로움의 총체는 사랑 아닙니까? 사랑은 교만하지 않기에(고전 13:4) 필연적으로 자비로운 마음과 겸손을 의미하며, 성내지 않고(고전 13:5)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기에(고전 13:7) 유순함과 온유함, 인내를 뜻하기 때문입니다(골 3:12). 사랑은 모든 외적 의로움의 총체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말이나 행동으로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기’(롬 13:10) 때문입니다. 사랑은 고의로 타인을 상하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편견이나 위선이 없이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해’(약 3:17)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을 향하여 선을 도모’(롬 12:17)합니다.”

따라서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요약하면, 율법이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뜻을 담고 있더라도 죄인은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완전한 성취가 아닌 믿음만을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한다. 그렇다면 믿음은 성결을 낳지,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하지 않는다.

웨슬리의 설명에는 루터 신학과의 근본적 일치점과 차이점이 모두 공존한다. 먼저 믿음이 성화를 낳으며, 거룩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열매라는 주장에서 웨슬리는 루터와 일치한다. 그러나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웨슬리의 주장은 루터 신학에 대한 의미심장한 비판을 담고 있다. 비판의 핵심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신자의 불완전한 순종을 대체해 신자가 온전한 순종을 한 것으로 여김 받는다는 주장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루터는 “두 종류의 의”(Two Kinds of Righteousness, 151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용구, 루터) “그리스도인의 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 첫째는 외적인 의, 즉 외부에서 주어지는 타인의 의다. 이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을 통해 이 의로 죄인을 의롭게 하신다. … 이 의를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삶, 그가 행하신 것과 말씀하신 것, 그의 고난과 죽음은 마치 내가 그 삶을 살았고, 그것을 행하고 말했으며, 고난당하고 죽은 것처럼 나의 것”으로 자랑할 수 있다. 이는 마치 결혼한 신랑 신부가 한 몸이 되어 모든 것을 공유하므로 신랑이 신부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신부가 신랑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 이같이 그리스도의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것이다. …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가장 거룩한 뜻을 행하러 오셨고(요 6:38)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모든 순종을 하셨으며, 자신의 순종을 마치 우리가 순종한 것같이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셨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며, 구원 받은 신자도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기에, 자신의 의로는 구원 받을 가능성이 없다. 구원의 가능성은 오직 외부에서 주어지는 의, 즉 그리스도의 온전한 율법 성취가 신자의 율법 성취로 여겨질 때 가능하다. 신자의 죄는 그리스도의 죄가 되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거룩함은 신자의 불완전한 거룩함을 대체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순종은 신자에게 칭의만이 아니라 성화의 비결도 되신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순종에 관한 루터의 이러한 가르침이 결국 개신교인에게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준 것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루터의 가르침이 개신교 신자에게 “만약 내가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모든 개인적 순종이 나의 것이 되어버린다면, 거기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 위에 어떤 가치를 더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분석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이 ‘내 것’이 된다는 것은 곧 “믿음이 나 자신이 성결해야 할 필요성을 대신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루터는 믿음의 열매로서 성화를 가르쳤기에 그의 ‘오직 믿음’ 강조를 율법무용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외부에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타자적 의, 그리스도의 대리적 순종,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관한 루터의 주장은, 루터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람의 죄성을 자극해 율법무용론의 문을 활짝 열어놓을 가능성을 가진 것이 사실이며, 이 가능성은 실제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최주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용구, 최주훈)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려고 일어선 종교개혁 진영은 엉뚱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개신교 진영 내부에서는 밑도 끝도 없는 방종과 무식함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개혁자들의 구호인 ‘복음의 자유’를 빌미로 집 안에서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것이다. … 개혁자들은 복음의 자유, 해방, 모든 신자의 평등한 만인사제직을 핵심 가치로 주장했지만, 현장에서는 교리의 오해와 오용으로 이어졌고, 왜곡된 ‘복음의 자유’로 인해 율법 기능은 철폐되어 세상 권위와 질서는 무시해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로 인해 개신교 성직자들의 부패와 게으름, 교리에 대한 무지가 만연했고, 도저히 성직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도덕적 해이와 방종의 사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목사들의 사정이 이러한데 일반 신자들은 오죽했을까? 목회자든 일반 신자든 가릴 것 없이 신앙과 삶의 규칙은 엉망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은 모든 제약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 꼴이 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교회의 징계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제프리 만에 의하면, 종교개혁 진영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은 루터의 가르침 자체가 다음의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평적으로 분석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던 루터는 복음을 깨달은 후, 자신이 수세기 동안 중세 사회 전체에 깊이 뿌리내려온 가톨릭의 율법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로서 철저한 신학 연구와 경건한 삶을 노력하는 가운데 “율법으로 인한 정죄, 죄책, 수치, 고투, 영적 시련”으로 짓눌려왔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아주 철저히 복음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간과한 점은 “모든 사람이 자신과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인용구, 제프리 만) “루터의 영적 전쟁은 … 자기 의로 구원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세상의 부도덕한 죄가 큰 유혹이 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정반대였다. … 그들은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자포자기, 또는 면죄부나 고해성사로 쉽게 죄 용서를 받겠다는 태만한 믿음에 빠져 있었다. 루터는 율법이 중세 전체를 다스렸고 사람들은 율법의 저주에 짓눌려 있었기에 그들이 복음을 들으면 기뻐 뛰면서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자기 삶을 바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인 기대는 … 그의 예상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 비텐베르크에 만연한 도덕적 방종은, 모든 사람이 루터와 같지는 않았음을 입증했다. … 신자도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라는 루터의 가르침은 신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 신자는 이제 남아있는 죄가 두려워 거룩함을 추구하다 다시 율법의 노예가 되지 않아도 되었다. 신자에게 항상 죄가 남아있다는 루터의 가르침은, 더는 그 때문에 절망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신앙 생활을 할 자유가 있음을 의미했다. … 신자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구원이 우리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심으로 가능함을 되새기게 해준다. … 그러나 ‘새 사람’은 이런 메시지에 감사로 반응하지만, ‘옛 사람’은 이 교리에서 도덕적 방종을 합리화할 구멍을 발견할 뿐이다.”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결과가 많은 사람에게서 루터가 의도한 긍정적 효과인 성화가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율법무용론으로 나타난 것은, 웨슬리가 분석한 대로 개신교인 중 루터의 가르침에서 “믿음이 성결을 가져온다”는 결론보다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는 결론을 도출한 사람이 훨씬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관한 주장은 루터의 의도와 달리 결과적으로 개신교 타락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말았다. 웨슬리는 이러한 현상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은혜 선포가 율법 폄하로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성결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가져온다”고 선포해야 함을 강조했다. 여기서 믿음의 결과로 맺히는 성결은, 그리스도에게서 전가된 의나 성결이 아니라 신자 자신의 변화로서의 성결이다(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에 관한 더 깊은 논의는 4장 참고).

한 가지 주지할 사항은, 웨슬리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는 주장에 반대해, “믿음이 성결을 낳는다” 즉 신자 자신의 실제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함으로, 은혜 언약 시대도 행위 언약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율법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회귀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은혜 언약 시대의 구원의 조건이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성결의 열매를 맺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구원의 유일한 조건인 믿음이 참된지 아닌지를 입증할 뿐이다.

루터에게서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은 믿음과 율법의 관계 설명에서도 유지된다. 비록 믿음이 성결을 낳더라도 신자는 여전히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기에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없다. 해결책은 오직 자신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의존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웨슬리의 언약 신학은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과 상관법 모두를 함축한다. 즉, 은혜 언약에서 구원의 방법으로서 ‘오직 믿음’은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에 대한 강조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믿음을 통해 율법에 대한 순종을 일으킨다는 주장은 율법과 복음의 상관법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개신교 내에서 율법이 경시되고 약화된 세 번째 원인은, “앞에서 지적한 어느 것보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서 “실천적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태도”임을 지목한다. 즉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성결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활해, 이론적인 면이 아니라 실질적인 면에서 율법을 무용하게 하는 태도”다(롬 6:1, 15). 이는 자신은 이미 믿고 구원 받았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더 넓은 자유를 허용해 … 율법 아래에서 죄를 깨달을 때는 감히 하지 않던 일”을 행함으로 점점 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탐닉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대해 웨슬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감사함으로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을 지배해 사랑으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복음적 순종의 원리가 노예로서의 공포로 인해 순종하는 율법적 순종의 원리보다 힘이 없습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실천적 율법무용론에 대한 바른 해결책은 회개와 거룩한 삶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루터가 신자 개인과 교회의 순결을 위해 많은 실천적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루터와 웨슬리는 상당히 일치를 이룬다. 예를 들어, 루터는 강력한 교회 시찰을 통해 부패한 성직자를 일벌백계함으로 기강을 바로잡고, 『대교리문답』(1529), 『소교리문답』(1529) 등의 집필과 보급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의 토대를 확고히 함과 동시에, 십계명과 신자의 의무에 대한 교육 등 율법 교육에 힘썼다. 루터는 『소교리문답』에서 신자의 삶을 바로잡기 위한 율법 교육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인용구, 루터) “매 계명과 기원(祈願) 및 여러 부분을 상세히 설명해 그 가운데 명한 의무를 가르치며 또한 그 이득과 축복, 또는 의무를 태만히 여김으로 따르는 위험과 손실을 가르치라. … 사람들이 특별히 주의해야 할 계명이나 기타 부분은 특히 주의를 기울여 강조하라. 예를 들어, 노동자와 상인, 농부, 고용인들을 가르칠 때는 도둑질을 금하는 제7계명을 특히 강조하라.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부정직하거나 도둑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일반 대중을 가르칠 때는 특히 제4계명을 강조해 그들로 질서 있고 신실하며 순종적이고 온화하도록 격려하라. 언제나 성경의 많은 사례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벌하시고 또 복 주시는지를 예증하라.

다스리는 자와 부모는 지혜롭게 통치하고 자녀 교육에 힘써야 함을 애써 강조하라. 그것이 그들의 의무임과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죄인지 가르치라. 의무를 태만히 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모두를 좀먹게 하고 황폐하게 하므로, 하나님과 사람의 최대의 원수다. 그들이 자녀를 목사와 설교자, 공증인, 그외 직업인이 되도록 양육하지 않는 것은 큰 죄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무서운 형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라. 이런 설교는 반드시 필요하다.”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反)율법주의적 경향과 공중 도덕의 퇴보가 수반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로마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의 적대적인 증언뿐 아니라, 루터와 멜랑히톤 스스로가 후년에 복음의 자유의 오용 및 비텐베르크와 작센 지방 전체에 걸친 개탄할 만한 도덕적 상태에 관해 종종 쓰라린 불만을 터뜨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러면서도 샤프는 루터의 종교개혁 진영의 방종의 원인이 꼭 루터 신학에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다음의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인용구, 필립 샤프) “도덕의 퇴보 특히 방종이 늘어나고 사치와 악덕이 증가한 것은 가톨릭교회 시절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여러 발견과 발명, 상업과 부의 증대의 결과였다. … 두 번째로, 도덕적 퇴보는 어떤 특별한 교리보다, 교회의 질서와 규율이 붕괴된 데 필연적으로 따르는 혼란과 루터파 개혁자들이 교회의 지배권을 너무 쉽게 주교의 손에서 세속 지배자에게 넘어가도록 허락한 사실에 기인한다. 세 번째로, 이런 퇴보는 옛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과도기의 단지 한시적 현상이었다. 네 번째로, 이러한 무질서는 독일에만 국한되었다. 스위스 개혁자들은 처음부터 루터파 개혁자들에 비해 규율을 더 강조했으며 … 칼빈은 그 전에는 기독교 교회에 결코 알려진 적이 없었던 도덕적 순결과 엄격주의를 제네바에 도입했다.”

샤프의 분석처럼 루터파 종교개혁 진영의 도덕적 퇴보에는 루터 신학 외적인 요인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칼빈 등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의 규율과 치리를 강조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 루터가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발생했던 과도기적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상당한 노력이 개신교 내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종교개혁으로부터 2세기가 지난 뒤 웨슬리는 루터와 칼빈이 강조했던 개인과 가정에서의 경건훈련, 교회적 권징,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루터란 경건주의 및 청교도 전통이 강조한 소그룹 영성 훈련과 사랑의 실천 등 다양한 은혜의 방편과 공동체적 훈련의 방법을 메소디스트 운동에 접목해, 신자로 종교개혁 시대보다 다양하고 풍성하게 은혜의 방편 사용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다. 웨슬리는 루터와 칼빈의 혜택을 입어 앞선 시대보다 나은 방법으로 구원론을 교회론과 접목시킨 것이다. 그러나 앞선 시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신자 개인과 교회의 거룩함을 위해 개인적 〮 공동체적 노력을 기울인 점에서 루터는 웨슬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점에서 루터와 웨슬리 신학의 차이점 분석은 루터와 웨슬리의 마음속 의도나 그들이 신자와 교회의 순결을 위해 얼마나 분투했는지만이 아니라, 그들의 의도와 노력이 적절하게 표현되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루터의 의도가 아닌 루터 신학에 근거해 평가를 내린다면, 루터 신학에는 육적인 사람이 율법무용론으로 변질시키기 쉬운 표현과 가르침이 실제로 내재했고, 웨슬리는 그것을 교정하고자 한 것이다.

웨슬리는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을 받아들이면서도, 루터가 가르치지 않았고 심지어 반대하기까지 했던, 신자의 현재적인 의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목표 사이의 긴장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요소로 매우 중시했다. 웨슬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현은 마치 “절대 완전히 갚을 수 없는 영원한 빚”과 같은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더 많은 사랑을 추구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목적론적 지향점은 항상 더 큰 열심으로 추구해야 할, 계속 뒤로 물러나는 과녁 같은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빌 3:15)로 묘사해 목표에 도달했음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는 말로 여전히 이후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을 고백한 것과도 같다. 이런 점에서 클라렌스 벤스(Clarence L. Bence)는, 웨슬리의 구원론에는 “구원의 순서 전체에서 현재적 성취와 미래의 기대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이 존재한다고 바르게 지적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이 긴장은 신자가 은혜에서 계속 성장하도록 재촉하는 좋은 자극제가 된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에서는 웨슬리 시대의 많은 신비주의 작가와 일반 신자에게서처럼, 신자의 마음에 큰 낙심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칭의의 믿음을 가졌는데도 하나님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생각은, 우리를 은혜 안에서 성장시키기보다 오히려 자신이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의심해 받은 은혜조차 부인하게 할 정도로 우리를 억누르는 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설교 “사탄의 계략”(1750)에서, 사탄은 신자가 성화의 은혜에서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연적 경향”을,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위선이나 낙심에 빠질 수도 있다는 “부수적 오용”과 뒤섞어버림으로, 칭의와 성결 사이의 긴장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를 파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고 경고했다. 사탄은 성결이라는 높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신자가 이미 받은 칭의와 중생의 은혜조차 의심하도록 공격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은총의 더 큰 역사를 기대하는 것”을 통해 오히려 성결의 증진을 방해하기도 한다.

(인용구, 웨슬리) “사탄은 복음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무효화하도록 분투합니다. … 우리의 악함, 죄성, 무가치함을 강조해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에 재를 뿌리려 합니다. … 마귀는 우리가 현 상태에 머물 필요가 없고 더 위대한 변화가 기다리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그것을 이룰 필요성을 왜곡되게 주장함으로 우리가 이미 얻은 기쁨을 감소시킵니다. … 하나님이 행하실 위대한 일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악용해, 그분이 이미 행하신 놀라운 일에서 그 선하심을 바르게 음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그는 당신이 더 거룩해야 하며 하나님의 더 온전한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해 당신이 이미 얻은 거룩함을 흔들고 파괴하려 할 것입니다. … 사탄은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이용해 의심과 두려움으로 우리의 평안을 흔들고 … 하나님의 완전한 사역을 기대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이미 시작하신 사역을 파괴합니다.”

웨슬리가 언급한 그리스도인의 완전 추구의 부정적 효과는, 루터가 신자의 내적 변화로서의 성결 교리를 비판한 주된 이유였다. 신자를 용서받은 죄인으로 가르친 루터에게, 신자의 내재적 의에 대한 주장은 배은망덕한 태도이자 자기 주제를 모르는 뻔뻔한 태도다. 신자는 여전히 죄가 많기 때문에, 자신의 내재적 의의 토대 위에서는 필연적으로 위선 또는 낙심에 빠질 수밖에 없다. 루터에게 신자가 내재적 의를 가져야 한다는 신인협력 사상이 초래하는 문제의 해결은, 칭의를 가능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속죄 또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를 온전케 하실 종말론적 희망을 통해 신단동설적으로만 가능하다. 신자가 항상 죄인으로 머무는 현세에서 신자를 묘사하는 최선의 방법은 율법의 정죄와 복음의 용서 사이의 변증법이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과 달리 웨슬리는 성결에 대한 강조가 일으킬 수 있는 부정적 효과를 경계하면서도, 부정적인 결과를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함께 강조했다. 칭의 이후의 신자는 “칭의 전보다 자신 속에 남아있는 죄에 대해 훨씬 더 깊고 분명하고 충분한 지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것을 아는 것이 꼭 “영혼에 어두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성결의 추구가 루터의 주장처럼 낙심이나 위선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신앙에 있다.

(인용구, 웨슬리)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이 자신의 악함을 느낄수록 그 악함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소망을 확신하는 가운데 더욱 즐거워하면서 사탄의 화살을 그 머리로 되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 내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용납된 것은 나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때문입니다. … 이것을 당신의 목에 매고, 마음판에 새기며, 손목의 기호와 미간의 표로 삼으십시오. … 그렇게 하면 죄를 느끼면서도 성결을 기대하는 그 마음이 당신에게 평안을 주고 그 평안이 강같이 흐르게 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사탄이 제시하는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 참되고 본래적인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 하나님은 용서와 거룩함과 천국을 결합하셨습니다. … 그 한 부분도 끊어지지 않게 하십시오. … 그 구원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을 쓸데없이 괴롭히는 대신 여러분은 조용히 그 은혜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 죄의 짐이 항상 남아있을 것이 아니므로 현재 남아있는 죄의 고통을 기쁨으로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모든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거를 가진 것을 즐거워하십시오.”

만약 성결의 은혜를 고대하는 신자가 사탄이 주는 낙심에 빠지지 않고 믿음과 순종, 인내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 신자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정도만큼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형벌 받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의 가치를 더 크게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정도와 비례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과 그의 사랑에 대한 경험을 더 크게 증가시켜주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성결의 은혜를 주심으로 “여러분의 악함은 사라질 것입니다. 마치 초가 불에 녹듯, 여러분이 느끼는 악함은 그 앞에서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 이미 여러분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행하신 구원의 하나님은 이보다 훨씬 위대한 많은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라고 역설했다. 따라서 위선이나 낙심은, 루터가 주장한 것처럼 성결을 추구할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가 아니다. 신자가 자신의 죄로 인해 경험하는 낙심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더 소중히 여기게 하는 촉매제가 되고, 위선에 대한 유혹 역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능력 즉 신자에게 참 의로움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성결의 은혜로 극복될 것이다. 루터 신학에서는 해결 불가능한, 신자에게 남아있는 죄의 고통이 웨슬리 신학에서는 칭의와 중생, 더 나아가 성결의 은혜로 해결되는 것이다.

웨슬리는 위선이나 낙심의 원인이 되는 신자의 죄 된 상태를 “용서와 거룩함과 천국” 즉 선행은총에서 칭의, 성결, 영화의 은혜까지 하나의 “은혜의 황금사슬”을 이루는 구원의 전체 과정에서 따로 분리해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구원의 과정에서 어느 한 단계를 전체에서 분리해 다루는 것은 하나님 은혜의 매우 능력 있고 포괄적인 사역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더 큰 은혜에 대한 갈망은 반드시 이미 받은 은혜를 굳게 지켜내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결의 은혜는 과거에 주신 칭의와 중생의 은혜를 간직하면서 그 은혜 안에서 점차적으로 자라가는 가운데, 또한 반드시 주실 더 큰 은혜를 소망하며 인내하는 가운데 추구되어야 한다. 하나님 은혜의 ‘황금사슬’은 끊어져서도 안 되고, 각 은혜의 순서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

웨슬리 신학에서 신자의 현재적 의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더 큰 목표 사이의 긴장은, 루터 신학의 정죄하는 율법과 용서하는 복음의 변증법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신자라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가르치는 루터의 변증법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전모를 온전히 드러내고 드높일 수 없다. 레온 힌슨(Leon O. Hynson)은 루터가 변증법으로 묘사한 많은 주제에서 “최고의 신학적 은사를 받은 사람인 웨슬리는 시종일관 신앙과 이성의 종합, 신학과 인간학의 종합, 자연과 은총의 종합, 신앙과 윤리의 종합,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응답의 종합, 자유와 책임의 종합, 율법과 복음의 종합, 칭의와 성결의 종합을 이루어내었다”고 바르게 평가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 추구의 부정적 효과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율법과 복음의 연결, 하나님의 명령과 이를 행할 성령의 능력 부으심의 연결, 계속 뒤로 물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목표와 신자가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결의 은혜 사이의 연결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를 가르쳐 추구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소중한 교리를 부인하거나 가르치지 않는 것이 신자의 영적 성장을 멈추게 하고, 신자로 죄에 머물러 있게 함으로 낙심이나 위선에 빠지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만약 당신이 모든 신자가 완전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리고 매 순간 죄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하도록 가르친다면, 그들은 은혜 안에서 점점 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기대를 잃어버린다면, 그들은 점점 활기를 잃고 냉랭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출처: 장기영, 『개신교 신학의 양대 흐름: 루터 신학 vs 웨슬리 신학』 (부천: 웨슬리 르네상스, 2019), 169-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