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의 여론 읽기

뜻풀이

 

좌우대립의 시대?

한겨레(2001.8.7)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전설적인 `망나니'가 나타났다. 되록되록 눈을 굴리며 뒤뚱뒤뚱 걸어나온다. 피묻은 칼날이 번득인다. 칼솜씨를 겨룰 필요가 없기에 더없이 용감하다. 상대를 빨갛게 덧칠해 오랏줄로 꽁꽁 묶어놓은 까닭이다.

심하다고 꾸짖지 말기 바란다. 그것이 현실이다. 보라. 텔레비전 토론에서 서슴없이 주장한다. “빨갱이를 색출하자.” 해방정국의 피비린내 나는 `사냥'을 다시 불러들이는 주문이 곰비임비 신문지면에 쏟아진다. 대한민국에 건강한 토론문화가 뿌리뽑힌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논쟁에서 막힐 때는 동의가 지식인의 미덕이다. 하지만 느닷없이 색깔공세를 펴는 축이 있다. 불리하면 판을 뒤엎는 보리바둑과 다를 바 없다. “말많으면 빨갱이”란 경고로 길들여진 사회에서 토론이 꽃필 수 있겠는가.

`좌우대립의 시대.' 더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고 공언한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칼럼제목이다. 그가 오늘을 좌우대립으로 몰아가는 까닭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심지어 <중앙일보>의 어떤 칼럼은 살천스레 묻는다. 왜 좌파들은 스스로를 좌파라 하지 않는가. 도둑이어서 그렇단다.

차분할 때다. 이른바 `좌우대립'에서 과연 자유민주주의자가 우파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자유민주주의자는 좌우가 공존하는 지점에 서 있어야 한다. 기실 건전한 보수주의자라면 민주나라 어디에도 없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적극 나서야 마땅하다. 하물며 상대를 법으로 옭아매고 좌우대립이라 부르대기는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다.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구속하는 사회에서 왜 사회주의자라 밝히지 않느냐는 다그침은 비열한 짓이다. 더구나 말끝마다 시장주의자와 경쟁주의자를 자처하면 더욱 그렇다. 사상의 시장, 언론의 시장을 원천적으로 제한해놓고 `일류'를 자칭한다면, 끊임없이 상대를 빨갱이로 몰아가며 명예를 좇는다면, 그 비겁한 지식인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사상의 자유를 짓밟는 수구세력이 걸맞는 호칭이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억압해온 자들에 의해 줄곧 참칭되어 왔다. 2001년 현재 영국·프랑스·독일의 총리가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총리가 되기 전에 일찌감치 신문권력이 빨갱이로 낙인찍었을 터이다. 구속되어 장기수가 되었거나 이미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스개가 아니다. 이 땅의 역사요, 현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른바 지식인의 논쟁이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민주주의가 위기에 부딪쳤을 때 몽따고 있던 이들, 심지어 민주주의를 유린한 군사정권에 부닐며 호의호식한 자들까지 언죽번죽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들은 그때 그 시절처럼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가로막거나 파괴하고 있다. 이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개전의 정이 전혀 없는 수구세력이 적실한 호칭이다. 상식으로나 사회과학으로나 그렇다.

수구세력이 여론을 농단하고 국회를 지배하는 한 민주법안은 제정되기 어렵다. 조금이라도 민중의 이익에 바탕을 둔 법안이 제출되고 시민사회단체가 입법을 촉구하면 명색이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이를 빨갛게 색칠한다. 말살에 쇠살인 선동을 신문권력이 대서특필한다. 기득권세력의 집요한 공세로 지역의 포로가 된 사람들은 자칫 혼란스럽기 십상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민중의 고통이다. 불행중 다행일까. 오늘 우리는 악순환의 굴레를 끊을 계기를 맞고 있다. 언론개혁이 그것이다. 볼만장만 침묵하던 종교인과 대학인 그리고 독자들이 들불처럼 일어서고 있다.

불법·비리가 드러난 신문사주들은 국민에 사죄하고 물러나는 것이 상식이다. 언론을 언론인 손에 돌려주는 입법은 시대적 과제다. 만일 이를 좌우대립으로 모는 정치인·언론인·지식인이 있다면, 더구나 `좌익'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고 날을 세운다면, 이제 한 점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제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그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적이다.

되록되록 : 되록거리는 모양(센: 뙤록되록)

곰비임비 : 계속 일이 일어나거나 물건이 거듭 쌓이는 모양, 계속

보리바둑 : 법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두는 바둑, 서투른 바둑

살천스럽다 : 매섭고 쌀쌀하다

몽따다 :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하다

부닐다 : 붙임성 있게 가까이 따르다, 남을 도와서 고분고분하게 굴다

언죽번죽 : 조금도 수줍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비위가 좋은 모양

적실하다 : 사실과 부합되어 실제에 잘 들어맞음

말살에 쇠살인 : 국어사전에 없음

볼만장만 : 남의 일을 보기만 하고 간섭을 하지 않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