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백성이여, 일어나라!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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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와 스포츠에만 열광하는 두 아들에게 문화적 소양과 역사를 보는 안목을 높여주기 위해 오래간 만에 강남의 문화전당인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때마침 그곳에는 한국 예술의 역사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브로드웨이에 올려져 극찬까지 받았다는 유명한 뮤지컬 [명성황후]가 공연되고 있었다. 온 가족이 보기에는 경제적으로 좀 부담이 되는 편이었지만, 마침 내가 연재하는 아현교회 회보의 기사거리(문화 엿보기)로도 적절하겠다 싶어 모처럼 온 가족이 문화 나들이를 하였던 것이다.

가장 적은 돈을 낸 덕분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영광까지 누렸다. 그러다 보니 가장 높은 임금님이라도 되는 듯이 공연을 내려다 볼 수 있었고, 지난 역사를 멀리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듯한 묘한 자세를 가질 수 있었다. 간간이 빙빙 회전하다가 때로는 위로 들려져 두 칸으로 나누어지는 독특한 무대 설치는 이 공연의 맛을 더해 주었다. 화려한 의상, 감동적인 음악, 박진감 넘치는 연기도 돋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재미나는 공연으로 기억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를 비장하게 재현한 뮤지컬이었기 때문이다. 주변 강대국의 한복판에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암울하였던 국운(國運)이 마치 코앞에 닥친 현실처럼 내 가슴을 내내 쿵쿵 때렸다. 그리고 지난 역사에 대한 뼈저린 회한(悔恨)이 어느 듯 눈물이 되어 내 볼기를 타고 내렸다.

만약 그 때, 그 곳에 내가 있었더라면,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을까? 현실과 무관한 공리공론에 빠진 학자였을까? 나라가 망하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정과 부패에 빠진 관료였을까? 강대국에 빌붙어 아슬한 외교를 즐기는 교활한 외교관이었을까?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였을까? 허약한 왕조와 기득권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보수 정객이었을까? 왕비를 짝사랑하다가 함께 죽는 비련의 주인공이었을까? 전통을 혁파하려다가 숙청당하는 외로운 개혁가였을까? 오늘도 나는 순간 순간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

민비로 잘 알려진 명성황후가 일본의 검객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는 장면은 이 공연의 절정(絶頂)과 결말이었지만, 실은 하늘에서 뭇 신하들을 대동하고서 장엄한 합창을 부르는 장면이야말로 이 공연의 백미(白眉)요 결론이었으며, 우리 가슴을 영원히 요동치게 한 주제였다. "조선의 백성이여, 일어나라!"

무슨 말인가? 삼척동자도 잘 알다시피, "힘이 없으면 또 당할 수밖에 없으니, 부디 강한 힘을 길러라"는 말이지 않는가? 일본이 서서히 재무장하고, 중국이 일어나는 이 마당에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자신을 지킬 힘은 가질지어다. 하지만 괜스레 걱정도 앞선다. 우리도 힘을 좀 가지게 되면, 일본처럼 약자를 깔보고 짓밟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우리 민족은 진정 훌륭한 민족인가? 그리고 진정한 힘은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더해주는 멋진 한편의 뮤지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