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간론의 의의

 

인간의 지식은 엄청난 속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해 왔다. 인간은 우주의 끝을 엿보며, 물질과 생명의 마지막 신비까지 탐험하고 있다. 이리하여 인간은 만물의 심판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른 눈부신 학문적 업적에 견주어 말한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에서는 정말 매우 초라하고 무지한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토인비의 말대로, "인간의 사회는 높은 수준의 가치에로 올라가 있지만, 인생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백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R. May, 백창영 역,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 문예출판사, 서문에서 재인용).

막스 쉘러(M. Scheler)도 "지나온 어느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도 현대에서처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문젯거리가 된 적은 결코 없었다...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도 인간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제 견해가 우리 시대에서보다 더 불확실하고 애매하고 다양한 적은 없었다."(철학적 인간학, 10, 137 이하)고 말한다.

말르브랑쉬(Malebranche)도 말한다: "인간의 지식 중에서 인간이 꼭 탐구할 만한 지식은 인간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지식이야말로 그 완성 면에서나 그 발전 면에서 가장 뒤지고 있는 실정이다"(M, Buber, 인간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재인용, 10).

롤로 메이(R. May)에 의하면 현대인의 불행이 1. 공허한 인간군상 즉 텅빈 느낌, 공허감, 2. 고독감, 3. 불안과 자기 존재에의 위협(불안)에 근거하고 있다고 규명한 후, 그 원인을 1. 현대사회에서의 가치관의 상실, 2. 대화를 위한 언어상실, 3. 인간의 고향인 자연에 대한 무관심, 4. 비극의식의 상실 외에도 5. 자아의식의 상실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 불행의 원인들 중의 하나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데에 있다. 인간은 기술 등에서는 자신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인간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기계적인 견해로 말미암아 결국 인간은 자신에 대한 존엄성, 다양성,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갖가지 인간의 행동이나 태도의 근저에는 일정한 인간학적 입장 즉 인간의 어떤 자아상이 깔려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한 해석을 내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철저히 말하자면, 인간은 원래 그 스스로 인간학자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M. Landmann). 인간은 겉보기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할 순 있어도, 자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을 믿느냐?"라고 질문받을 때에는, "알 수 없다", "경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관심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당신은 누구냐?"고 질문받을 때에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설사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대답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정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이 알고 있다(고후 2:11). 비록 죄가 인간의 자의식을 방해하고 있더라도, 비록 인간이 자기 인식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독한 가운데서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칸트(I. Kant)에 의하면 철학의 분야는 다음의 네 가지 질문으로 귀착된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3.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4. 인간이란 무엇인가?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이 대답하고, 둘째 물음에 대해서는 윤리학이 대답하고, 셋째 물음에 대해서는 종교가 대답하며, 넷째 물음에 대해서는 인간학이 대답한다. 그런데 앞의 세 물음은 마지막 물음과 관련되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이 모두를 인간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논리학 강의 편람, 부버의 앞 책 중에서 재인용, 10).

그러므로 인간이 가장 날카롭게 탐구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S. Kierkegaard). 여기서 신학적 인간학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모든 복음선포는 실제로 자연적인 자기 인식을 전제하고 평가한다. 모든 목회상담적, 선교적 대화는 자기인식을 목표로 삼으며, 인간의 자연적,심리적 인식을 평가한다. 모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형태들은 특정한 인간론을 전제로 삼고 있으며, 모든 정치이론 혹은 사회이론은 특정한 인간론으로부터 파생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과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선교하기 위해서는 인간이해가 필요하며, 대화와 선교는 필연적으로 인간론의 바탕 위에서 해야 할 수 밖에 없다(E. Brunner, Dogmatik 2, 57 이하). 그래서 판넨베르크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신이 진리임을 주장하려면, 그 주장을 변증해야만 한다. 오늘 날 이 변증은 종교가 인간됨의 본질에 ? 속해 있는지, 아니면 거꾸로 인간을 소외시키는지 논쟁하는 가운데서, 인간됨의 해석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Anthropo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 15.)고 말한 것은 매우 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