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종교개혁적-프로테스탄트적 모형


 

Ⅰ. 서 론

본 소고에서는 종교개혁적-프로테스탄트적 모형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 먼저 모형이 교체되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본, 중세적-로마 카톨릭 모형과 종교개혁적 - 프로테스탄트적 모형의 차이점에 관하여 기술하려고 한다. 종교개혁적-프로테스탄트적 모형의 특징을 알아보고, 모형의 한계점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Ⅱ. 모형교체의 이유

종교개혁적 인의론이 새로운 획기적인 모형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새로운 모형의 특징들을 토마스 쿤과 관련지어 다루어야 한다. 낡은 모형(중세적-로마 가톨릭적 모형)수많은 불일치점들에 대한 경험을 통해 모형변형의 압력이 생긴다. 여기서 과학사적인 프톨레미의 실례로서, 세계상에서 세계상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교체를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적 인의론에도 해당한다면, 인의론과 함께 신론, 인간의 자기이해, 교회이해 그리고 교회와 사회의 관계 전체에도 해당할 것이다. 로마-가톨릭 전통처럼 종교개혁 이전의 언어전통과 결합된 교회전통은 동일한 개념들(하느님, 은총, 양심, 자유, 교회, 교직 )을 사용하면서도 종교개혁적 개념과는 다른 내용을 의미한다. 새로운 이론의 도입은 반드시 그리고 정당하게 해당분야의 일부 전문가들에게서 동일한 반응(저항, 혁신) 일으킨다. 그들에게서 새로운 이론은 이제까지 표준과학의 관행을 지배했던 규칙의 수정을 의미한다. 루터에게는 신학적 이론뿐만이 아니라 교회-정치적 실천을 위한 새로운 제도론과 이론도 문제시되었으므로, 신학자들에게는 교회와 정치의 제도적 담지자들도 각기 그들의 실천적 영역의 "전문가들"로 나타났다.

 

Ⅲ. 중세적-로마 가톨릭적 모형과 종교개혁적-프로테스탄트적 모형의 차이점

루터의 의인론은 실제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새로운 것인가? 종교개혁적 그리스도교의 공동적 토대가 되었던 루터적 모형의 새로운 성격은 종교개혁적 인의론의 비중에 있다. 당시 신학적전통과의 연속성 속에서 루터의 신학이론은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의 신학체계 안에서 "인의론"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 인의론은 많은 교리항목들 가운데 하나였다. 죄인의 인의는 인간 안에서 신적 은총이 작용한 결과로서 간주된다. 루터에게서는 하나님에 의한 죄인의 인의에 관한 항목이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삶의 중심을 이룬다. 멜란히톤은 "아우구스타나 신조의 변호"에서 이것을 "모든 그리스도교적 교리 가운데 가장 고귀한 항목"이라고 불렀으며, "성서 전체를 분명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크게 기여하며 그리스도의 표현할 없는 보화와 바른 인식으로 안내하고 전체적인 성서의 문을 여는 항목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의론의 이러한 중심적인 위치가 교회적 전통에서 그때까지는 아직 그처럼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새로운 모형에서 생겨난 비판적 신학개념을 통해 토마스에게 신학사적으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존재론과 인생론을 그리스도교 속에 통전시키려는 시도는 토마스의 모형에 속한다. 그에게서 하나님은 존재의 총괄개념이며 다른 모든 것처럼 행위와 잠재태로 결합되어 있지 않다. 그가 표명한 신학적 언어공동체의 모형은 이러한 헬레니즘적 존재이해를 통해 표준적으로 형성되었다. 토마스는 출애굽기 3장 14절의 "존재하는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본문을 인용하면서 "'존재하는 분'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가장 고유한 이름이다"라고 한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본질을, 완전한 존재, 선하고 참되고, 단순하고 전능한 존재의 총괄개념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루터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최고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극히 위협적인 상황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결정적인 이해모형과 언어모형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그를 받아들이고 한없이 베풀고 의롭다고 선언하는 하나님, 인의를 약속하고 절망의 나락에 빠진 그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줌으로써 그에게 자신을 여는 하나님이다. 그것은 독존적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다. 우리와 함께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경험이 낡은 모형의 경우와는 전혀 달리 새로운 모형의 인식적 근거와 언어적 근거가 된다.

토마스의 모형에서 하나님은 자연과 초자연의 규정적 목적이므로, 사회는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교회의 임무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모델에 의하면 국가는 인류의 초자연적 구원에 관한 모든 일에 있어서, 혼인법에서, 개인적, 공적(性)도덕에 있어서 교회의 지도적 권위에 예속된다. 중세적 모델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가 이러한 이론형성의 배경을 이루는데, 그리스도교 세계는 현대의 국가 교회로 이어졌다.

루터가 직접 체험한 인의의 경험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 아래 붙잡아 두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적인 복음을 우리에게 선언하려고 하신다는 것이 루터에게 분명해졌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킴으로써 바울의 글이나 이후의 전통에서 확고한 신학적 명제로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식을 창조했다.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세상통치"와 (교회의) 영적 임무의 구별을 본질적으로 요청한다. 이에 반해 토마스는 중세적 사고의 모범적 표상에 따라 거리낌없이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세상적 군주의 직책을 차지한다 "고 말했다.

구체적 인간을 인격과 주체로서 평가하는 있어서 종교개혁적 인의사상이 지닌 의미는 새로운 언어공동체의 양심이 겪은 발전을 지적해야 한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자기 양심의 지시에 따라서 황제와 국가에 대항했으며, 기존의 교회와 함께 전체 전통의 일치와 신학공동체를 대변한 신학적 적대자들에게 대항했다. 이유는 인의신앙의 새로운 모형이 인간 양심의 동일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토마스도 양심에 대하여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그는 양심의 선언을 인간적인 상급자 또는 교회적 상급자의 지시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기가 말한 이론의 의미에서 이단자들의 양심을 존중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교회에 이단이 있을 경우 "모든 것을 말씀으로 해결하고 오직 논쟁적인 대화를 통하여 싸워야 한다." 이 시기에는 신앙의 집단성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개인은 이러한 집단성 안에서 그리고 집단성에 근거해서만 존재했다.

루터적인 인의사건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믿는 개인 속에서 "복음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복음이 스스로 그에게 계시되는 , 그는 전체 교회를 위한 예언자적 주체가 된다. 전체에 대한 개인의 책임의식인 교회비판의식의 이러한 신학적 토대가 토마스에게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다.

 [도표]


중세적 - 로마가톨릭적 모형 종교개혁적 - 프로테스탄트적 모형
인의 다른 교리 중의 하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스도적 삶과 신앙의 중심
신론 독존적 하나님

(헬레니즘적 존재이해)

우리를 위한 하나님

(십자가의 모순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인간 집단적

(신앙의 집단성이 모든 것을 지배)

개인적

(개인이 교회를 위한 예언자적 주체)

교회와 사회 교회제도와 정치제도의 불분명한 혼합 세상통치와 영적인 구별

(율법과 복음 구별)


Ⅳ. 종교개혁적 - 프로테스탄트적 모형의 특징

루터의 인의론은 그리스도교적 하나님 이해, 세상 이해 그리고 인간적인 자기 이해와 전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종교개혁적 자기이해에 의하면 인의 항목은 다른 교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전체적인 신학적 이론의 근본적인 관점이 되었다. 루터 자신도 이렇게 말한다. "인의론은 온갖 교리들에 대한 스승이며 영주, 주인, 지도자 그리고 심판자이다. 이것은 모든 교회적 가르침을 보존하고 지배하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을 바로 세운다. 인의론이 없으면 세상은 온통 죽음과 어둠 속에 있게 된다." 인의의 사신(使信)선포한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며, 예수 안에서만 새로운 의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다. 루터가 사도행전 4:12에서 밝혔듯이, 루터의 모형에서 인의의 사신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의론'은 모든 것을 짊어진 그리스도 조항과 함께 모든 신학적 진술의 전체적 관련성을 압축한 공식이다"

새로운 획기적 모형(종교개혁의 인의론)에서는 이전 시대에 비해 전체적인 그리스도교적 삶의 이해가 더욱 내적 적합성을 갖게 되었으며, 동안 알려진 복잡한 전체적 생활경험이 이전의 모형에 의해서는 충분히 포괄될 없게 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모형은 이전 시대에 어느 정도 정합성을 보였던 많은 요소들을 신학 이전의 것으로 또는 신화적인 것으로 신학적 언어체계에서 배제하도록 요구했다.

보다 큰 새로운 정합성은 이미 신론에서, 새로 정식화된 인간이해에서, 그리고 양자를 내적으로 결합시킨 신학적 인간학에서 입증된다. 우리가 신학과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 능력, 지혜, , 자유 자체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은총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지혜롭고 선하고 자유롭게 하시는 한에서만 하나님과 그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게 것은 인의에 대한 루터의 통찰에서 비롯한 것이다. 신학적 인간학에서 하나님의 의를 서슴없이 인정하면서, 하나님에 의해 선사된 의가 없으면 서슴없이 인간의 죄를 고백해야 하며,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새로운 의의 약속에 의해 살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루터의 인의경험은 하나님의 인의은총에 대한 점증하는 신앙적 확신을 위한 투쟁을 종교개혁운동의 본질적 요소로 만들었다. 이전의 신학적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잘못 이끄는 것으로서 배척했다. 낡은 언어 맥락을 따르는 사람들이 저항했던 궁극적 이유는 그들의 사고체계와 규칙체계의 개별적 구성요소들이 개정되고 전적으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앙의 확신과 희망하는 자의 확신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낡은 가르침과 새로운 가르침의 근본적인 양립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신앙인을 위한 은총의 확신을 주장하기를 거절했다. 낡은 언어전통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관점에 집착했으며, 새로운 언어전통을 내세울 없는 것으로서 배척했다. 실제로 모형교체를 통해 상이한 언어공동체가 생겨나는데, 이 공동체들에 속한 사람들은 동일한 말을 사용하면서도 동일한 내용을 뜻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 공동의 언어를 구사할 없다. 따라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개인은 독자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루터의 호소에서 새로운 신앙이해의 중요한 요소가 드러난다. 인의신앙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인격적 관계를 의미하므로 개인은 신학적으로 대체할 없는 존귀한 주체이다. 교회적 언어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인격적으로 새로운 의식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의사신은 개인적인 권리와 인권의 세속적 결과를 초래하기 전에 교회론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이 사제라는 신학적 이론으로 발전했다. 이전의 교회적 신분질서는 일반 교회대중과 "완전한(성직자) 신분"을 구별했을 아니라, 가르치고 의식을 거행하고 지도하는 있어서 "서품된 자"와 "서품되지 않은 자"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루터는 교직을 폐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성례전적인 서품식을 의미했던 낡은 의식은 새로운 모형의 빛에서 취임식으로 "변형"되었다.

인의사신은 모든 신앙인의 공동체인 교회의 영속적 고백, "항상 개혁되어야 교회"에 대한 고백도 요구한다. 새로운 언어 공동체는 이전의 교회개념을 종교적 신화로서 배격했고, 성직자들에게 어떤 신적 성격을 투사하려는 모든 시도를 배격해야 했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만 구원의 기대를 있었다. 따라서 공동체는 교회를 말씀의 피조물로 고백해야 했다. 종교개혁의 인의론에 내포된 비판적 신학개념은 교회에 대한 무비판적-신비적 관계에서 교회비판적 의식으로 인도했으며, 교회비판적 의식은 낡은 모형의 추종자들처럼 교호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교회를 위해서, 교회가 교회 자신의 소명을 배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Ⅴ. 결 론

본 소고에서는 종교개혁사의 중심적인 이론적 요소와 요소를 발견하고 관철시킴으로써 야기된 투쟁들에 관련된 사건적 과정을 탐구하였다. 탐구과정은 토마스 쿤의 해석모델을 통해 해석의 틀을 얻었으며, 과정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있게 되었다.

종교개혁적 교회들은 전체 그리스도교를 위해 역사적으로 주어진 그들의 임무를 새롭게 자각할 과제를 지니고 있다. 복음과 교회의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에서 성립한다는 의식을 일깨우고, 만약 어떤 제도적 제의적 또는 도덕적 규율 전통의 유지를 신앙과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을 은밀히 하나님의 복음으로 만들면, 이러한 교회의 임무는 포기된다는 의식을 세계적으로 일깨우는 것이 종교개혁적 교회의 임무이다. 개신교적 그리스도교가 자신에 의해 표명된 모형이 그리스도교의 지평에서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에큐메니칼한 이유에서도 이 과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인의론이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논의는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10월 31교황청 일치위원회 위원장인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과 루터교 세계연맹의 크리스티언 크라우저 감독이 독일 남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인의의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에 공식 서명하였다. "인간은 신앙과 함께 선행을 쌓아야 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과 "인간은 신앙만으로 구원받을 있다"는 루터의 주장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였다. 500년이 지난 지금 "인간의 구원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사랑을 통해 이뤄진다"고 진영은 화해하였다. 이것은 새천년 시대에 새로운 모형이 되지 않을까?

<참고문헌>

한스 큉, 데이비드 트라시, 『현대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박재순 역, 천안: 한국신학연구 소,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