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기원과 본질
최영진(M.DivⅡ.)
1. 성령의 기원
1. "및 아들로부터"에 대한 새로운 토의
(나는 믿습니다.)
주님이시고 생명을 살리시며, 아버지로(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며,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동시에 찬양과 영광을 받으며,
예언을 통하여 얘기된 성령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아들로부터"(Filioque)는 381년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의 본문에 삽입되었다. 그 후 카알(Karl) 대제와 교황 베네딕트 8세에 의하여 삽입된 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는 1054년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주장한 근거가 무엇이든, Filioque의 삽입은 서방교회가 삼위일체론적인 성령론을 발전시키는 데 방해가 되었다. 또한 이 결정은 서방교회로 하여금 많은 잘못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어온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없는가? 범교회적인 교회 회의의 신앙고백에 Filioque를 추가로 첨가함으로 일어난 교회의 논쟁은 삼위일체론을 신학적으로 전개하는 일과 함께 극복해야 할 것이며,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범교회적인 대화는 적어도 세 가지 본질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1. 초대교회 시대의 교회 회의의 전통에 대한 대립을 제거하는일. 2.아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함께 해명하는 일. 3. 성령이 가진 삼위일체적 독자성,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그의 모든 능력과 활동, 성령을 통한 아들과 아버지의 영광을 서방교회가 개방적으로 인정하는 일 등이다.
분열의 시작은 서방교회가 로마의 영토에서 동방교회보다 큰 세력을 형성하였을 때 일어났다. 그들은 동방교회가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Filioque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신학적으로 아무 성과도 없었으며, 오히려 동방교회의 분노를 일으켰을 뿐이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개신교회가 로마로부터 분리된 후 신앙고백의 원문으로 돌아가 Filioque를 포기하고, 동방교회와 다시 대화하고자 하는 진지한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계속해서 Filioque를 고집하였다. 동방교회의 신학자들도 아우구스틴에 대한 포티우스와 그레고리 팔라마의 반대 의견을 반복하였다. 결국 변한 것이 없었다. 거창했던 종교개혁은 1054년의 교회 분리를 전제하는 서방교회적 종교개혁으로 그 자신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초대 카톨릭 신학자들은 1871년 제1차 바티칸 회의를 통하여 로마로부터 분리된 직후 동방 정교회와 대화하고자 하였다. 결국 1874-75년에 본(Bonn)에서 "연합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비록 교회의 위탁을 받지는 않았지만, 영국 성공회의 신학자들과 개신교 신학자들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애초부터 초대 카톨릭 신학자들은 서방교회는 불법적으로 Filioque를 첨가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즉 초대 카톨릭 교회는 서방교회가 첨가한 Filioque를 신앙고백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삭제한 서방에 있어서의 최초의 교회이다. 또한 초대 카톨릭교회는 서방교회의 전통에서 삼위일체론을 새로 작성하였는데, 여기에 Filioque를 넣지 않았다.
이러한 논의는 동방교회에서도 일어났다. 1898년 <<국제 신학평가론지>> 24권에서 "Filioque에 대한 러시아 신학자의 견해를 발표하였다. 저자는 유명한 교회사가 보리스 볼로토프(Boris Bolotov) 였다. 이 발표를 계기로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들과 희랍 정교회 신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었지만, 그의 견해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전통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블로토프는 성령은 "오직 아버지로부터만" 나온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의하면, 아들은 아버지와 너무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아들은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데 대한 논리적인 "전제"와 사실적인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아들은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올 때에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볼로토프에게서 서방교회가 -- 비록 적절하지 못한 방법이었지만 -- Filioque를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였던 진리에 접근하고자 하는 신학적인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pp.214-217)
2. 신앙고백의 본문과 신학적 해석
나중에 승인된 범교회적 교회회의의 신앙고백 본문에 Filioque라는 한 마디를 추가로 삽입한 사실을 서방교회는 빨리 인정해야 할 것이다. Filioque를 첨가함으로 서방교회가 -- 본래 동방교회를 반박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 신앙고백의 삼위일체에 관한 진술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해석하고자 하였다는 점은 인정된다.
이와 비슷하게 동방교회에서도 '오직 아버지만으로부터'라는 해석을 통하여 비록 반대된 방향이었지만 신앙고백의 진술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들 신앙고백의 의도는 -- 교회 정책적인 의도와 정치적인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 공동의 신앙고백의 해석양식이었지 일방적으로 수정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첨가물은 취소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Filioque룰 취소함으로 교회의 분열은 끝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삼위일체론에 대한 공동의 신학적 토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동방교회의 신앙고백은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데 대한 아들의 참여를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 침묵은 성령을 피조물로 이해하고, 아들의 하위에 있다고 생각한 성령론자들에 대한 그 당시의 투쟁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침묵은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데 대한 아들의 참여를 거부하는 교회 회의의 교리적 결정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이 교회 회의에 참석한 교부들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강조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로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교의학적으로 볼 때, 381년의 신앙고백은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나옴에, 혹은 성령의 형태에서 아들의 참여에 관한 질문등이 하나의 구속력 있는 표현이 못되었고, 이것은 하나의 결함이었다.
이 결함으로 인해 많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신학자들은 성령에 관한 신앙고백이 불완전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진술을 새로 표현하고자 시도할 것을 제안하였다. 동방교회 삼체론과 서방교회 삼위일체론이 가진 신학적 차이의 뿌리는 381 년의 미해결된 문제에 있다. 그리고 교회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니게아 - 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아들의 관계와 아들에 대한 성령의 관계의 문제를 함께 답변함으로써 가능하다.(pp.217-219)
3. 아들의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성령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요 15:26). 아버지는 영원히 성령을 "내쉰다." 성령은 아들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확히 해석한다면, 성령은 "단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단지"라는 말은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독특한 방식을 표현하는것이다. 서방교회가 Filioque를 첨가함으로써 오해를 받게 되었지만, 신학자들은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나오는 그 독특성과 성령의 면에 있어서 아버지의 "단일 원인성"(Alleinursachlichkeit)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즉 '그리고 아들로부터'는 '아들을 통하여'(per Filium)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Filioque는 결코 아버지의 "단일체제"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단지 아버지로부터"라는 이 배타적인 첨가는 성령의 신적인 실존(hypostasis)에 대해서만 관계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있는 그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형태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버지가 성령을 생성하는 것은 그가 신성의 단 하나의 원인, 단 하나의 근거, 단 하나의 원천인 한에서 그렇다. 즉 성령의 신적인 실존과 그의 신적인 본질은 단지 아버지 되신 "신성의 원천"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이다. 아버지 신분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제 1 위격의 단일체제 때문에 Filioque는 거부되었고, 또 오늘날도 거부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의 구성과 삼위일체의 내적인 삶을 구분해야 한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고 신앙고백서는 말한다. 삼위일체의 제 1 인격은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는 오직 아들의 영원한 태동 가운데 있는 아버지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나 아들의 아버지이다. 그가 "아버지"라 불리는 것은, 그가 만물의 유일한 원인이시고 만물이 그에게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그리고 배타적으로 영원한 태동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기를 "아버지"로서 증명한다. 구원사적으로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며,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많은 형제 자매들 중에 이 "처음 난 자"의 사귐 속에서,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영원히 아들의 아버지다. 그는 성령의 아버지는 아니다.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나오는 것은 아버지로 인한 아들의 영원한 태동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이 태동 가운데서만, 그리고 이 태동을 통해서만이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성령을 내쉰다면, 성령은 아들의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출현은 1. 아들의 태동과 2. 아들의 실존과 3.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관계를 전제한다. 아들은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데 대한 논리적 전제이며, 사실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성령의 원인은 아니다. 성령은 아버지로 인한 아들의 태동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져한 한다.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버지가 신성의 원천이며, 독생자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으로부터, 다시 말하여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성령은 아들의 영원한 임재 가운데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따라서 아들은 여기에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할 것이다.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있고, 안에 있다. 아버지는 성령 없이 계시지 않으며, 또 행동하지 않는 것처럼 결코 아들 없이 계시지 않으며 행동하지 않는다. (pp.219-222)
4. 성령이 아들로부터 받는 것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완전하고 신적인 실존을 가지며 아들로부터 관계적 형태를 받는다. 성령의 신적인 실존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온다. 그러나 성령의 형태 내지 얼굴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그래서 성령은 "아들의 영"이라 불리운다. 실체와 형태의 구분은 처음 보기에는 놀라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구분을 통하여 신적인 삶의 과정에서 신적인 본질에 대한 성령의 관계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계를 구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적인 삶의 과정에서 신적인 본질에 대한 성령의 관계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계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서방교회 전통은 이 구별을 삼위일체의 관계론에서 발전시켰다. 이 관계론은 삼위의 관계들과 위격들이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관계들은 영원한 순환에 대한 기초를 형성한다. 동방교회는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변용에 관한 이론과 내재적 삼위일체의 능력들에 관한 이론에서 여기에 다루어져야 할 내용에 접근하였다.
니케아회의 이후 이 삼위일체론들은 동일한 차원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들의 견해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고찰될 수 있다. 성령의 실체는 신적인 근원에서 존재를 표현하며, 형태라는 개념은 영원한 삶과 영원한 영광의 삼위일체적 과정에서 형태를 표현한다. 실체가 존재론적 개념이라면, 형태는 미학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들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한다.
순수한 형태는 가장 높은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내적인 본질의 표현이며 사랑을 낳는 표현이 되는 완전한 형태이다. 형태는 밝게 비추어지고 빛을 다시 반사할 때 나타난다. 이 때 형태는 변용되는데, 이러한 변용의 대상을 가리켜 바울은 흔히 '얼굴'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얼굴"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고후 4:6). 주의 영광이 우리 모두에게 "수건을 벗은 얼굴"로 나타난다(고후 3:18).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인식하게 될 것이다(고전 13:12). 성령의 형태에 대하여 말할 때,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을 향함으로,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에게로 향함으로 나타나는 그의 얼굴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영광 가운데 나타나는 성령이다.
실존의 생성은 형태를 받는 것보다 사실상 선행한다. 왜냐하면 받는다는 것은 받는 자의 실존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성과 받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생성은 "신성의 원천"인 아버지에 대한 성령의 형태를 표현한다. 성령의 관계적, 순환적 형태를 표현하는 데 Filioque는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성령의 생성에 있어서 그것은 배제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의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제의할 수 있다. '아들의 아버지로부터 오며 아들로부터 형태를 받는 성령' (pp.222-224)
2) 성령의 경험들에 대한 은유들
1.인격적 은유들: 주-어머니- 심판자
"주"라는 이름은 자유의 개념을 포함한다. "주는 영이시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 3:17). '영'은 부활의 영을 뜻하는데, 부활의 영은 '지금 여기에서' 신자들을 사로잡으며, 죄의 강요와 죽음의 폭력에서 그들을 해방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그 안에서 살기 시작한다. 주의 이름은 노예화와 관계되어 있지 않고 해방과 관계되어 있다. 이것은 오직 1계명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 경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이다. 성령을 '주'라고 부른다면, 기독교의 성령 경험은 이스라엘의 야웨의 역사와 관계를 가지게 된다. "오순절"에 성령이 종말적으로 부어지는 것은 메시야적 출애굽의 역사로 이해된다. 신앙고백에서 이 연속성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한" 것이 성령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타당성을 얻는다.
'주'가 해방의 경험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이름이라면, 그를 남성적 지배의 틀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이름은 생명을 주는 것과 생동하게 하는 것의 이름이다. 바울이 말한 "살리는 영" (고전 15:45)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요한은 어머니가 위로하듯 위로하며, 신자들이 그로부터 "새로 태어나는"(요3:3-6) 위로자로 그를 이해한다. 이 경험들을 우리는 시리아의 교부들과 진젠도르프와 같이 "생명의 어머니"라는 은유로 파악하였다. 인간의 생명은 어머니의 생명에 의하여 태어나고 양육되며 동반된다. 그러므로 이에 상응하는 성령의 경험들은 여성적 은유들을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죄의 분리와 죽음의 무관계성의 극복은 삶으로서 다시 태어남에 상응한다. 자유와 삶은 신적인 영의 경험들에 대한 두 가지 기본 요소이다. 새로운 삶 없는 자유는 공허하며, 자유없는 삶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살아 움직이는 자유와 그 삶은 오직 정의 가운데서 존속할 수 있다. 정의를 통해 인간의 자유는 삶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공동의 삶을 위하여 봉사한다. 정의 가운데서 인간의 삶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자유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며, 억압에 저항한다. 정의는 자유와 삶이라는 두 가지 기본 요소를 하나의 공동분모로 가져온다. 거꾸로 자유와 삶은 하나님의 정의가 채워야 할 넒은 공간을 의미 한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 속에 정의를 향한 굶주림과 갈등을 일으킨다. 결국 정의를 통하여 삶은 바르게 되며, 자유는 내용적으로 "삶의 계약"을 통하여 규정된다.
성령을 통한 해방과 다시 태어남의 경험은 정의를 세우며 의롭게 하며, 바르게 세워주는 하나님의 의의 경험을 전제한다. 세상의 죄를 드러낼(요 16:8) 것이라 진술되는 성령은 저주가 아닌 구원하기 위해 온다(요 3:17). 그러므로 "죄를 드러내는 것 "은 동시에 죄의 용서를 확신하는 것이 된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진리는 언제나 심판과 관계되어 있다. 구약성서의 표상은 정의를 세우는 것과 바르게 하는 것을 심판자의 적극적 행위들로 묘사한다. "정의로운 이 심판"은 궁극적으로 또 온 세계적으로 메시야로부터, 곧 그 위에 "주의 영이 머물" 메시야로부터 기다려진다. 그렇다면 성령을 "심판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이가? 신약성서에서 그는 글자 그대로 "위로자"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표상에 의하면 심판자는 "구원자" 즉 구원하는 정의이다. 이러한 뜻에서 하나님의 영은 "구원자"이며 심판자로 불린다.
"해방"과 "살아남"과 "의로움"의 세 경험들은 함께 속하며, 하나님의 경험 속에서 삶의 충만함을 위하여 서로를 보완한다. 이 경험들에 대한 세 가지 명칭들 곧 주님으로서, 어머니로서, 심판자로서의 성령은 함께 속하며, 서로 보완한다. 성령-해방하는 어머니이다. 영원한 신적 삶으로의 다시 태어남은 죄의 분리와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여성적 생명만이 글자 그대로 육체적 생명을 전하여 줄 수 있으며, 남성적으로 생각되는 "주님"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생명을 주는 어머니는 영원한 존재로 해방하기도 하며, 그녀의 관심을 통하여 자유를 생동하도록 유지한다.
끝으로 이 세가지 은유들은 신적인 영의 활동의 경험을 인격적으로 표상되는 주체들로 소급시킨다는 사실이 눈에 뜨인다. "주님" "어머니" "심판자"는 기능들이지 인격적 이름들은 아니다. 그러나 내재적으로 경험되는 활동들에 대한 초월적 주체가 각 이름과 함께 주어져 있다. ('생명의 영'pp.359-363)
2. 구성적 은유들: 에너지 - 공간 - 형태
신적인 영을 에너지, 공간, 형태로 나타내는 명칭들을 나는 구성적 은유들이라 부른다. 이 상들은 자연 속에서 관찰될 수 있는 바와 같이 주제들과 그들의 행위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구성하는 힘들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이 성령 경험은 사람을 이 땅과 그 자신의 땅으로부터 오는 몸으로부터 분리하여 그의 영혼이 영들의 나라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히 몸과 영혼에 새로운 활력으로 불어 넣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특유한 활동력을 느끼며, 이 활동력을 우리는 모든 다른 생물들 안에서도 인지한다. 삶의 힘에 대한 경험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을 하나의 커다란 삶의 공동체 속에 가져 왔으며, 이 공동체 속에서 유지하는 단 하나의 삶의 힘이다. 상이한 카리스마들과 에너지들의 다양성 속에서 생동하며 성령의 단 하나의 사귐 속에서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이에 대한 모범이 될 수 있다.
에너지는 물리학이나 혹은 사랑의 관계에서 순수한 삶의 충동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기학적 장들은 그들의 시간과 공간을 운동으로 옮기는 평형적 구조들을 그들의 주파수를 통하여 얻는다. 형식 없는 물질은 없다. 전자, 원자, 분자들과 이보다 더 높은 구조들은 열려져 있는 체계들을 향하여 배열되어 있다. 열려진 체계들은 진동하는 에너지 교환으로부터 실존한다. 이것은 산정될 수 있는 우주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는 카오스도 있다. 코스모스와 카오스는 분명히 파괴적으로만 서로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도 관계되어 있다.
인간의 인격들의 사이는 감정의 차원에서 좋아함과 싫어함, 행복하게 하는 질서와 무질서하게 만드는 카오스와 같다. 서로 간의 에너지가 작용하는 것과 같은 자극과 매력은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하며, 삶에서 새로운 표현 양식을 주는 예기치 못한 "삶의 영들"을 일깨운다. 이것이 "살리는 생명"이며, 결국 모든 인간은 '살려진 생명'을 영위한다. 반대되는 현상도 우리는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인격들의 상호 관계의 영역에서 미움만이 중재되고 거부가 경험될 때, 삶은 손상된다. 이 때 "삶의 영들"은 자기 자신에게 모순되거나 위축된다.
하나님 경험은 인간 사이의 삶의 경험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먼저 그것은 이 경험을 통하여 중재되며, 그것에 대한 대부분의 상들은 인간 관계의 영역으로부터 유래하며, 하나님 경험은 인간 사이의 경험 안에서 함께, 그리고 포함해서 이루어진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가까우심이 경험될 때, 삶의 정신들이 깨어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가까우심이 신앙과 함께 느껴질 때 "부활의 힘"이 몸과 영혼을 일으킨다. 사람들이 신적인 강물에 싸이고, 넘쳐 흐르며 충만한 몸과 영혼은 봄철의 꽃들처럼 깨어나며 충만하게 된다. 다시 말하여 그들은 생동케 하는 삶이 된다. 이사야와 요한도 성령의 경험을 이와 같이 묘사하였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물의 샘"(렘 17:13, 요 4:14). 믿는 자의 "몸으로부터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7:38). 성령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생동케 하는 삶의 에너지를 다름 사람에게 전하여 줄 것이며, 이것은 영혼에서 영혼으로 일어날 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자기를 전개하기 위하여 각 생명은 이에 상응하는 자기의 삶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삶의 힘과 삶의 에너지만으로 불충분하다. 그러므로 이미 창조기사는 생물들이 창조되어 삶의 공간들 속에 세워 지기 이전, 하나님이 삶의 공간들을 마련하였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삶의 공간들은 다양한 생물들의 외적인 면과 범위와 활동 영역들이며, 이들이 내적인 면과 공간적 육체라 생각될 수 있는 이 생물들 자신만큼 중요하다. 현대의 분해하고 개체화하는 사고는 이 삶의 공간들을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경시하였다. 다른 생물들을 인간 자신의 삶의 공간 속에 병합하고 인간을 위하여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렇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생물들의 삶의 공간들을 파괴하는 사람은 그들의 삶의 가능성들은 물론 그들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 사이의 영역에서도 인격적 자유가 양보되어야 한다. 부모들이 자기 자신을 철회할 때, 이 인격적 자유가 어린이들에게 양보된다. 그것은 좋아함과 신뢰를 통하여 양보된다.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 속에서 우리는 활동의 자유를 발견하며, 이러한 자유로운 공간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발견하다. 자유로운 공간들은 우리의 자유를 담지하며, 우리 자신을 충분히 발전시키도록 초대한다. 인격적 자유를 보장하지만, 아무런 자유로운 공간도 마련하지 않는 단순한 경쟁사회는 "늑대들의 자유"와 실업자들과 고향이 없는 자들의 "자유"로 타락하고 만다. 바로 이것이 주관적 자유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사회적으로 자유로운 공간들을 유의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의 불행이다.
하나님 경험은 이러한 인간 사이의 경험들과 다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근원적 경험은 출애굽과 함께 일어난 해방의 힘이요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마침내 야웨께서 우리에게 공간을 열어 주셔서 우리도 이 땅에서 번성하게 되었다(창 26:2). 약속의 땅 없는 해방은 없다. 자유의 날, 안식일 없는 해방은 없다. 시편이 진술하는 인격적 하나님 경험도 두 가지 면의 자유를 포괄한다. "당신은 나의 발을 넓은 공간에 세우십니다"(시31:9). 신적인 영은 해방하는 주님으로 경험되며, 어떠한 고통도 더 이상 있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경험된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나를 사방에서 감싸십니다(시 135:5). 그리고 이 경험에서 인간은 그 속에서 그가 숨쉬고 자기를 전개할 수 있는 성령의 넒은 공간 속에 숨겨져 있고 자유롭게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경험한다.
삶의 에너지로부터 삶의 공간들 속에 다양한 '삶의 형태들'이 생성한다. 형태는 "살면서 자기를 발전시키는 형성된 형식'이다. 하나의 삶의 형태 속에서 한 생물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균형을 취한다. 한 형태의 윤곽들은 제한하지만, 그의 제한들은 열려져 있으며 다른 것과 교통하는 제한들이다. 개개의 삶의 형태들은 삶을 유지하는 에너지를 다른 생물들과 교환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나누는 삶의 사귐 속에서 자기를 형성한다.
인간의 영역의 개별적 삶의 형태는 내적이며 유전적인 조건들과 외적, 생태학적, 문화사적 조건들을 통하여 가능하게 되고 또 형성된다. 개인의 영역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어떻게 우리의 삶의 기대들과 삶의 경험들을 함께 중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신체적, 영적, 성격적 형태는 위에서 말한 이 모든 관계를 표현하지만, 이와 동시에 무언가 교체될 수 없으며 유추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하나님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삶의 경험도 우리를 형성한다. 하나님 경험이 그리스도의 사귐 속에 있는 삶과 결합되어 있다면, 이 경험은 결코 보편적이며 종교적인 감정이나 "무한한 것들에 대한 감각과 멋"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은 구체적이며 인격적인 삶의 길이다. 이 삶의 길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형태지워진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 자녀들의 "장자"와 "같은 형태로 형성된다"(롬 8:29). 우리는 그의 메시야적 삶과 그의 치유하고 빛나며 사랑으로 가득한 삶과 동일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파괴의 세력들과의 투쟁 속에서 그의 고난의 길과 동일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그의 영 가운데서 이미 지금 그의 부활에 "죽어가는 자로서", 그러나 보라 사는(고후 6:9)자로서 그의 부활에 참여하며, 언제가 그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태로" 될 것을 기다린다(빌 3:21) 성령의 경험은 우리의 인간적 삶을 생동하게 만드는 신적인 삶의 경험이다. 그러므로 삶의 힘으로서 , 삶의 공간으로서, 삶의 형태로서의 성령에 대한 은유들은 모든 삶의 사귐에 함께 속한다. 어떠한 은유도 단독으로 말할 수 없지만, 이 은유들은 함께 합하여 삶, 피조된 삶, 생동케 만드는 삶, 거룩한 삶의 비밀을 알려준다.(pp.364-369)
3. 활동의 은유들: 세찬 바람- 불 - 사랑
오순절 경험은 세찬 바람의 포효와 불길의 은유들을 가지고 묘사된다(행 2:2-4). 이 은유들은 활동의 은유들이다. 그들은 무언가 힘있는 것에 의하여 사로잡힘과 특유의 새로운 활동의 시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사로잡으며, 경험한 사람들을 예기치 못한 새로운 일로 향하게 만든다. 이때 우리는 깊이 감동되며, 그 다음 우리는 활동하며, 우리로부터 나간다. 세찬 바람과 불의 활동과 같은 은유들은 삶을 긍정하며, 생동케 만드는 하나님의 영의 경험, 곧 거룩한 영의 현존과 관련시킨다.
세찬 바람의 상과 함께 야웨의 루아흐가 지닌 근원적 의미가 다시 받아들여진다. 신적인 것은 죽은 것에 반대하여 생동하는 것이요, 경직된 것에 반대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과 동물을 생동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숨결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경험들은 자주 바람과 물의 세찬 소리로 묘사된다. "당신은 바람을 시켜 명령을 전하시고 불길에서 심부름을 시키십니다"(시 104:4). "마침 동쪽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 오는 소리 같았고, 땅은 그의 영광으로 빛났다"(겔 43:2). 호렙산에서 가진 엘리야의 하나님 경험은 열왕기상 19:11 이하에서 자연의 모든 요소들로써 묘사된다. 엘리야의 경험은 원시 기독교의 오순절 이야기에서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로써 묘사되는 경험과 비교될 수 있는 경험이다.
구약성서에서 '불'은 하나님의 영광의 초자연적 비전들로 묘사된다. 신적인 불은 삼키는 불길처럼 인간에게 역사한다. 불에 타버리지 않으면서 불에 타는 떨기는 모세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표식이었다(출 3:2).
하나님은 광야에서 유리하는 백성 앞에서 낮에는 "구름" 속에서,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나아갔다(민 9:15). "불의 형태를 가진 구름"이 처소를 덮었다. 이것이 출애굽에 있어서 하나님의 현존이었다. 우리가 어떤 일로 감격했을 때, 우리는 "불과 불길" 같다고 말한다. 감격이 불처럼 우리를 "충만시킨다" 불은 우리를 뜨겁게 하며, 우리는 따뜻함을 전하여 준다. 그것은 우리를 밝게 비추고, 우리를 빛나게 해준다. 그것은 우리를 태우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불태우는 불길이 된다.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삼키는 불길"로 묘사된다(신 4:24). 그는 열정적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의 노기는 불과 같다. 시 79:5, 시 89:47, 습 1:18, 히 1:.29, 시편 18:8은 무서운 하나님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는 인간을 지옥과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하는 하나님이요, 권능이 가득한 분으로 묘사되는 하나님이다. 불이 "삼키는 불길"로 불리울 때,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분노는 그의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거부당하였고 상처받은 그의 사랑에 불과하다. 그의 분노 속에 그가 끝까지 지키는 사랑이 숨어 있으며, 그의 심판 속에는 은혜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삼키는 불길"처럼 활동하는 그의 분노 속에는 그의 사랑의 정열이 나타나며 또 경험된다.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불길"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현존 속으로 들어가게 하며, 그들을 뜨겁게 만들었다. 누가복음 12:49에 의하면 예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러나 이것은 묵시사상적 우주의 대 화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 위에 성령이 부어짐으로써 일어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뜻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3:11에 그것은 정화의 불이요, 모든 사물들을 녹이는 불이다. 이것은 세계의 새 창조에 대한 상을 나타낸다.
세찬 바람과 뜨거운 불길의 상들은 삶을 창조하고 그것을 내면으로부터 자극하며 너무도 생동적으로 만드는 영원한 사랑의 경험에 대한 상들이기도 하다. 왜 사랑은 "죽을 만큼" 강한가? "그것의 열화는 불과 같으며" 사랑 자신이 "주님의 불길"이라 불리워지기 때문이다. 하나님 경험은 신적 사랑의 경험으로 묘사될 수 있다.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지 않지만, 하나는 다른 하나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에 대한 실재적 상징이 된다. 그리고 인간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에 대한 실재적 상징이 된다. 오순절 찬송가는 우리 안에 "뜨거운 사랑"을 깨워 달라고 성령께 간구한다. 이와 병행하는 "뜨거운 불길"에 대한 말은 다시금 사랑과 성령을 불로 나태내는 은유들의 언어적 친화성을 나타낸다.(pp.369-373)
4. 신비적 은유들: 빛-물- 생육
"흐르는 불빛", "살아있는 물", 생육이라 부르는 것을 신비적 은유들이라 한다. 이 표상들은 신비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요, 신적인 영과 인간의 영이, 인간의 영과 신적인 영이 너무도 깊이 결합되어 나타내므로 양자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이 의미 있게 서로 보완하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간단한 모델은, 태양의 빛과 땅의 수분으로부터 잎과 뿌리를 얻어 생명을 얻고 생식하게 되는 식물이라 말할 수 있다.
신적 존재에 대한 빛의 은유는 매우 오래된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시 27:1, 미 7:8,요일 1:5). 그는 "빛의 아버지" (약 1:17), "빛은 그가 입고 있는 옷이다".(시1 04:2) "그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빛 속에 거한다(딤전 6:16). 신적인 영광의 광채는 피조물의 존재가 견딜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피조물들은 그 빛의 광채요. 그들의 구원은 하니님의 "얼굴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는 데 있다.
여기서 빛은 눈의 비침을 뜻한다. 우리는 눈을 가지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도록 자기를 내어 주는 것만을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에서 그의 인식의 대상인 동시에 원천이다. "우리는 당신의 빛 속에서 빛을 봅니다"(시 36:10). 인식하는 것은 물론 인식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는 이 연관 속에서 "살아 있는 샘"이라 불리운다(시 36:10, 49:20). 이 신적인 빛의 샘은 모든 창조를 비춘다. 이리하여 우리는 사물들이 무엇이며 우리 자신이 사실상 무엇인가를 그 빛 속에서 인식한다.
그러나 신적인 빛은 눈으로 하는 인식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인식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우리를 충만케 하며 우리의 삶을 활발히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의 큰 흐름을 뜻한다. 성령의 신적인 빛은 합리적 인식의 냉정한 빛일 뿐 아니라 사랑하는 인식의 따뜻한 빛이기도 하다. 신적인 사랑은 신성을 흡사 자기 자신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리하여 신적인 삶의 에너지가 신성으로부터 흘러나와 피조물들을 충만케 하며, 그들을 변용시키고, 영원히 생동하게 만든다. 이 빛과 이 사랑 속에서 신적인 영은 너무도 포괄적인 현존이 되며, 우리가 그 속에 있고 그가 우리 안에 있게 된다.
물의 은유는 대개의 경우 샘과 우물의 상과 결합된다. 그것은 땅으로부터 나오는 물을 뜻한다. 빛의 은유가 "위로부터오는" 성령의 활동을 묘사한다면, 수원의 은유는 이 활동을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한다. 빛과 물의 결합은 생명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구약성서는 하나님 자신을 "살아 있는 샘"(렘 2:13), 혹은 생명의 샘"(시 36:10)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생명의 힘이 모든 창조 위에 흘러 나오며 (시 65:10), 이 샘으로부터 인간은 "은혜에 은혜를 받는다".(요 1:16) '생명의 샘'은 인간 자신 안에 있다. 그들이 생동케 하는 물을 받을 때 그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 물의 샘이 된다.
물의 상과 성령의 결합은 세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며, 이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된다(요 3:5), "물로"말미암은 출생을 내적인 새로 거듭남에 대한 우연적이며 외적인 표식으로만 생각하지 않을 때, 세례의 물은 샘물을 뜻할 뿐 아니라, 어린 생명을 양육하는 양수를 뜻하기도 한다. 초대교회의 세례식 물잔의 상징은 생동케 하는 성령의 이 어머니 신분을 자주 나태낸다. 이로써 샘물의 상징이 소진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상징은 우리가 얼마나 생명과 목말라 하느냐에 따라 이해될 수 있다.
끝으로 생육의 은유는 빛과 물의 결합, 그리고 그 내적 논리의 결실이다. 하나님 경험을 나타내는 상으로서 그것은 구약성서로부터 유래한다: "나는 싱싱한 전나무와도 같고 너희가 따먹을 열매가 달린 과일나무와도 같다"(호 14:9), 신적 지혜는 "생명의 나무"이다. 잠 3:18 성취된 희망과 좋은 말은 "생명의 나무라 불리운다. 잠 13:12, 15:4, J문서의 창조 이야기에 의하면 파라다이스의 한 복판에 한 그루의 "생명나무"가 서 있었다. 성서의 마지막에 이 나무는 하나님의 파라다이스(계 2:7)와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도성 예루살렘에 서 있을 "생명나무"로 나타난다. 요한 복음 15장에서 그리스도는 "포도나무" 와 비교되며, 신자들은 그의 "가지들"로 비교된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15:5). 갈라디아서 5:22에 의하면 그것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를 맺는 성령이다. 생명은 다른 생명에 의하여 배태되며, 생명은 생명을 생동케 하기 때문에 생식력은 생명의 생동성의 총괄개념이라 말할 수 있다.
"생육"을 하나님 경험의 표현으로 선택한 힐데가르크폰 빙언에 의하면, 태초의 창조는 언제나 푸르렀고 생기가 있었다. 그러나 죄와 함께 일종의 겨울이 모든 창조 위에 왔고, 그것을 경직시켰으며 메말라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흐르는 빛과 살아 있는 물로서의 성령을 경험함으로써 모든 것들에 새 창조와 모든 생명의 다시 태어남의 종말론적 봄이 시작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경험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참되고 새로운 역동성의 경험이다. 성령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적 숨결을 느끼며, 봄을 맞이한 자연처럼 깨어난다. (pp.373-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