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하나님의 형상" 이해

 

김성호(M.DivⅡ 1차)

 

 

 

Ⅰ. 들어가는 말

 

전통적으로 신학적 인간학의 기본개념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인간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성서의 전통들은 이 개념의 중심적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P문서에만 나타난다 (창세 1,26-27; 5,1; 9,6). 시편 8편 6절은 이 개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지혜서 2장 23절과 집회서(Jes.Sirach) 17장 3절은 이 개념을 알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그것은 전통적 개념으로 사용되지만 (야고 3,9;고전 11,7) 더 이상 전개되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우리는 신학적 인간학이 사람의 하나님 형상됨을 오직 창조론에서만 다루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죄의 타락으로 인하여 어두워졌거나 파괴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다시 회복되는 사람됨의 이상적인 원형(Urbild)은 이 개념으로써 묘사되었다. 이러한 일면적 견해와 함께 신학적 인간학은 근원의 신화(Urspungsmythos)에 가까워졌으며,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인간 역사의 메시아적인 관점을 간과하였다.(1)

우리는 사람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관점을 세 가지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첫째, 사람의 '원래적인 규정'으로서 하나님의 형상, 둘째, 사람의 '메시아적인 소명'(Berufung)으로서 '그리스도의 형상', 세째, 사람의 '종말론적 영광'으로서 '하나님의 영광'. 해석학적으로 이것은 다음의 내용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구약 성서의 창조기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함께 시작하지만, 이 해석의 빛을 그리스도의 메시아적인 복음으로부터 얻으며, 이 빛과 함께 인간의 본래적 규정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도달할 그의 궁극적 영화와 관련시킨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앞의 것을 뒤에 오는 것의 빛 속에서 인식하며, 시작을 완성의 전망에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신학적인, 보다 더 정확히 말하여, 메시아적인 방향을 가진 성서 주석은 역사적 성서 주석은 물론 토라의 빛 아래에 있는 신학적 성서 주석과도 구분된다. 물론 그것은 두 가지 성서 주석을 전제하며, 그 어느 것들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통합한다.(2)

 

 

2. 사람의 본래적인 규정 :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에 개념에 대한 기본 텍스트는 이미 그것을 번역할 때부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번역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26-30절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입, 결단, 사람의 창조, 축복, 사명 부여, 돌봄. 이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몇 가지 내용을 부각하고자 한다.

 

a)사람의 창조는 창조의 마지막 사역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결단이 선포되는 축제적인 도입과 함께 시작한다. 빛을 창조할 때, 그가 말씀하셨다.-그리고 있었더라(창세 1,3) 고 기록되어 있다: 동물을 창조할 때,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말씀하셨다.-그가 지으셨다(창세 1,20-21). 그러나 사람을 창조할 때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가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하나님은 지으셨다. 이 텍스트에 의하면 사람은 창조적인 말씀으로부터 생겨나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한 '결단'으로부터 생겨난다. 이 결단에 선행하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요구'이다. 결단을 내릴 때  한 주체는 스스로 행동한다: 다른 존재에게 행동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결단한다. '하나님'은 이 형상을 만들기 전에, 여기에 말하는 자기 요구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그의 형상의 창조자로 결정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결단한다": 여기에 이 한 가능성을 향한 하나님의 '수축'이 있으며, 이 수축 속에 하나님의 최초의 '자기 낮추심' 이 있다.(3)

 

b)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형상'으로'(zu)" 지으셨다. 그러나 전통적인 번역들은 "그의 형상에 '따라'(nach)" 라고 말한다. 이리하여 그것은 하나님 안에 하나의 원형을 전제하고, 이 원형에 따라 사람은 모형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론에도 전제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골1,15-16; 히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는 신자들이 "닮아야" 할 처음 태어난 자이다(로마 8,29). '그리스도의 형상' 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중재된 '하나님의 형상' 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즐거이 "그의 형상에 따라 지으셨다."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적 맥락에서 이 구절은 "그의 형상을 향하여"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여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창조는 성육신을 향하여 열려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론은 인간론의 완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인간론은 그리스도론의 준비가 된다.(4)

사람의 규정은 두 가지 개념들, 곧 zäläm 과 demuth, 희랍어로 ?ικ?ν과 ?μο?ωσι? , 라틴어로 imago 와 similitudo 로 묘사된다. 첫째 개념은 석고상을 가리킨다면, 둘째 개념은 비슷함을 가리킨다. 첫째 개념은 밖을 향하여 대리하는 면을 표현한다면, 둘째 개념은 안을 향한 반사의 면을 표현한다. 두 개념은 아마 '이집트의 왕의 신학'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파라오는 땅 위에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초상, 그의 대리자, 그의 임명을 받은 자, 땅 위에 있는 그의 광채요 현상의 방식이다. 시편 8편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왕과 같은 사람으로 묘사한다. 고대 동방의 대리 사상에 의하면 파라오는 그의 제국의 모든 지방에 세운 그의 모형들 속에 현존한다. 이에 상응하여 사람은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주권의 표지", 하나님의 대리자, 땅 위에 있는 그의 영광으로 이해된다. 하나님 형상의 어휘가 왕의 신학으로부터 유래한다는 말이 타당하다면, 여기에는 이미 하나의 정치적으로 혁명적인 잠재력이 숨어 있다: 군주가 아니라 사람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아무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들과 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대리자요 임명받은 자요 광채이다. 역사적으로 제사장 문헌군 속에 "왕의 신학의 민주화"가 들어있든지 들어있지 않든지 간에, 이 구절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역사에서 "민주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그 다음 구절에 나오듯이 땅을 지배해야 할 사명을 사람에게 부여할 때에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 구별이 없으며 오히려 평등이 있을 뿐이다.(5)

하나님 형상은 사람의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신학의 답변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실체의 아날로기아에 의하면 사람의 '영혼', 그의 이성적 본성과 의지적 본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2. 형상의 아날로기아에 의하면 바로 서서 걷는 것과 위를 향한 사람의 시선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3. 조화의 아날로기아에 의하면 그것은 땅에 대한 '사람의 통치'에 있다. 4. 끝으로 관계의 아날로기아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귐에 상응하는 '남자와 여자의 사귐'에 있다. 이러한 답변들은 사람을 동물과 구별하는 특징들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을 동물과 구분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보편적 관계를 의미한다.

이 출발점은 타당하지 않다. 사람의 하나님 형상됨은 인간학적인 개념이기 전에 신학적 개념이다: 그것은 창조되는 사람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언가를 먼저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먼저 말하며, 그 다음에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땅 위에 있는 그의 형상과 영광이 되는 그러한 관계를 사람과 맺는다. 사람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 관계로부터 생겨나며, 이 관계에 있다. 그것은 사람을 다른 생물과 구분하는 이 속성이나 저 속성에 있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땅 위에 자신의 형상을 스스로 만드는 하나님은 자기에게 상응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하나님 형상됨은 사람이 자신의 편에서 하나님에게 상응하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의 영광을 땅 위에 있는 그의 형상 속에서 빛나게 하는 하나님은 마치 거울처럼 인간 속에서 자기를 반사한다. 신학의 전통은 하나님의 형상을 거울 속에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반사로 이해하였다. 자신의 형상을 통하여  땅 위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이 형상 속에서도 나타나며, 이 형상은 땅 위의 형식을 가진 신적 본질의 간접적 계시가 된다.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현상으로서 사람은 세 가지 근본적인 관계 속에 있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땅의 다른 피조물들을 지배한다. 그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대칭'으로서, 하나님은 그와 함께 말하고자 하며 그는 하나님에게 답변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현상'이요 땅 위에 있는 그의 영광이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짐승이나 천사를, 자연의 힘들이나 운명의 세력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나 현상이나 계시로 경외하거나 숭배해서는 안 된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 형상 제작을 금지한 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인 사람의 가치를 보호한다.(6)

 

c) 하나님의 형상에 나타나는 그 다음의 인간학적 장소는 사람들의 성적인 차이와 사귐에 있다. 왜 성적인 차이가 사람의 창조에서 특별히 강조되는가? 두 가지 성(性)을 가진 동물들을 창조할 때는 단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각자 그 종류에 따라." 이것은 생육을 축복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다. 사람의 창조에서는 두 가지 성이 개별적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생육의 축복이 사람의 창조에 첨가된다(창세 1,28). 만약 성적인 관계가 생육과 관계되지 않고 동물에서와 같이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 성적인 관계 속에 본래적인 하나님 형상과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성적인 구별과 사귐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 자체에 속하며, 먼저 생육이나 땅에 대한 지배에 속하지 않는다. 이 사귐은 하나님 자신에게 상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사귐 속에서 자기에게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땅 위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은 그의 남자와 여자의 형상 속에서 땅 위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형상은 고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사람들의 사귐 속에서만 실천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애초부터 사회적 존재이다. 그는 사람들의 사귐에 의존하며, 본질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한다.(창 2,18). 그는 동료적인 존재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사귐 속에서 자기의 인격성을 발전시킨다. 따라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와 관계할 때, 그리고 관계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과 관계할 수 있다. 개체화된 개인과 고독한 주체는 사람의 존재의 손상된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또한 사귐에 대한 인격의 우위성도 없다. 오히려 인격과 사귐은 하나의 삶이 가진 과정의 두 가지 면이다.

 

d) 땅 위에 있는 하나님 형상을 창조한 다음, 동물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하나님은 29절에서 부여하며, 땅을 정복하라는 사명을 28절과 29절에서 부여한다. 이 사명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동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에 별도로 첨가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이러한 지배의 사명에 있지 않다. 이 두 가지 사명들은 분명히 서로를 보충하며, 둘째 사명은 첫째 사명을 제한한다: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사람의 먹을 양식과 결부되고 있는데, 29절과 30절에 의하면 사람의 양식은 오직 식물이어야 한다. 동물들도 식물만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이리하여 동물에 대한 사람의 지배 때문에 동물을 죽일 수 있는 권리는 배제되어 있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식물을 양식으로 삼는다면, 동물에 대한 사람의 "지배"는 평화의 심판자의 과제에 있을 것이다. 땅 위에 있는 사람의 지배는 하나님을 위한 하인들의 지배이며, 하나님을 위한 땅의 관리이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며,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찬송하고 찬양할 수 있다. 창조자는 땅 위에 있는 대리자와 관리인을 필요로 하는가? 그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안식일과 함께 그 시작의 형식을 발견한 창조의 땅에 속한 면을 보존하고 유지해야 할 사명이 사람에게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계속되는 땅의 역사의 주체가 된다. 메시아적인 평화의 나라에 대한 예언자의 환상에서 (이사 11,16 이하) 동물과 사람과 식물의 이 시작단계의 평화의 질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궁극적인 방법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창조기사는 동물에 대한 사람의 지배와 양식을 위한 사람의 땅의 정복을 구분할 것을 가르치는데, 이 두 가지를 종합하고 세계의 파멸을 위하여 양자를 혼합하는 '땅의 지배'(dominium terrae)에 대한 신학적 이론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친다.(7)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존재로부터 지배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비롯한다. 이 결과는 돌이킬 수 없다. 따라서 세계의 주인이 되려는 민족과 인종과 국가는 결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 땅 위에 "현존하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괴물이 될 뿐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서만 신적으로 정당화된 지배를 행사할 수 있다.

 

 

3. 사람의 메시아적 소명 : 그리스도의 형상

 

참된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과 인류의 역사의 시작에 서 있지 않고 목적에 서 있으며, 목적으로서 그것은 이 역사의 시작과 모든 순간 속에 현존한다. 신약성서에서 바울은 주님으로 부활하였고 변용한 메시아 예수를 하나님의 참된 형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 형상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그리스도는 땅 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와의 사귐 속에서 사람은 그가 규정된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그의 칭의와 함께, 그리고 그의 성화의 과정 속에서 그들의 영화가 약속되어 있다.(8)

 

a)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의하면 사도들의 복음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림으로써 밝혀진다. 이리하여 바울은 랍비의 방법에 따라 창세기 1장 26절과 시편 8편을 종합한다: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은 함께 속하며 하나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신적인 영광으로 변용되었다면, 그는 땅 위에 있는 참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진술에서 바울은 지상의 예수를 생각하지 않으며,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부활의 증인들과 그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나타난 '부활한' 그리스도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을 선포하며(고후 4,6), 새 창조의 시작에 대한 확실한 희망을 확립한다.(9)

골로새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 태어난 자"로 보는 바울의 메시아적 부활신학을 창조에 소급시켰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시며 그를 통하여 만물이 창조된 분"이라고 부른다. 이 원형-그리스도론(Urbild-Christologie)은 아마 유대교의 지혜문학으로부터 유래하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는 '창조의 중재자'요 세계의 화해자요 하나님의 통치의 주님이다. 하나님은 그의 완전한 형상 속에 나타나며,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통치하며, 하나님은 땅 위에 있는 그의 형상을 통하여 화해하고 구원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고 참된 창조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이미 태초의 창조의 비밀일 수 밖에 없다. 처음의 것이 뒤에 오는 것의 빛 속에서 이해되고, 시작은 완성으로부터 파악된다.

 

b) 인간학적으로도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통일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로마서 1장 23절에 의하면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의 형상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다. 이것은 금송아지를 섬긴 사건에서도 나타난다(시편 106,20). 여기에서 "영광"은 사람의 하나님 형상에 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학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신격화하지 않고 피조물들을 신격화하면, 그는 그의 본성에서는 물론 그의 태도에도 이 피조물들을 닮게 된다. 그가 동물을 신격화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죄로 인하여 "전도된다". 로마서 3장 23절에 의하면 그것은 죄인에게서 "상실된다." 이 양면성은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하여 전도되었느냐 아니면 상실되었느냐에 대한 교리사적 논쟁을 야기하였다.(10)

하나님 형상의 회복 내지 새 창조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사귐으로써 일어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며, 이를 통하여 땅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도상에 있게 된다. 로마서 8장 29절에 의하면 그들은 "아들의 형상"을 닮으며 예수의 뒤를 따름으로써 그의 메시아적 형태로 자란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만이 신자들을 그의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그런데 30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선택과 소명과' '칭의'와 '영화'를 통하여 변화시킨다. '칭의'와 함께 죄인은 죄로 인하여 그가 상실한 의를 은혜로부터 얻는다. 그는 다시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그러나 영화는 미래적인 것이다. 그것은 "몸의 구원"(롬 8:23)에, 다시 말하여, 사람의 "천한 몸"의 변화에 있으며, 그리하여 이 몸이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을 닮는다.(빌 3:21). 칭의는 영화의 현재적 시작이요, 영화는 의(義)의 미래적 완성이다. 양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근거하여,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이 충실하게 지킨 관계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죄인이 경험한 칭의와 의롭게 된 자가 희망하는 영화 사이에 '성화'의 길이 있다. 성화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는 것"이 중심적 문제이다(엡 4:24, 참조 골3:10). 하나님의 형상은 은사인 동시에 과제이며, 서술인 동시에 명령이다. 그것은 과제인 동시에 희망이요, 명령인 동시에 약속이다. '성화'는 '칭의'를 전제하며, 영화는 그것의 희망이요 미래이다. 복음의 메시아적 빛 속에서 사람의 하나님 형상됨은 종말론적 방향을 가진 역사적 과정으로 나타나지, 하나의 상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의 존재는 이 과정 속에서 사람됨이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은 전인(全人), 곧 신체적인 사람, 공동체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인하여 영혼과 몸이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으며, 하나님과 다른 인간과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전체적, 신체적, 그리고 공동체적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은 예수와의 메시아적 사귐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미 부활의 과정 속에 있으며, 이 과정 속에서 전체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용납되었고 자기를 약속된 존재로 경험한다. 사람의 메시아적인 사람됨은 끝나지 않았고, 또 끝날 수 없다. 새 땅과 새 하늘에서 일어날 죽음의 종말론적인 파괴와 몸의 구원이 비로소 사람됨의 과정을 완성하며, 이리하여 그의 신적인 규정을 성취한다.(11)

 

 

4. 사람의 종말론적 영화 : 하나님의 영광

 

창조가 안식일을 위하여 창조된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레네우스가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이라고'(Gloria Dei homo)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은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들은 그들 자신의 규정을 성취한다. 이것은 '사람의 영광은 하나님'(Gloria hominis est Deus)이라는 아만두스 폴라누스(Amandus Polanus)의 다른 문장에 나타난다. 하나님과 사람의 종말론적 영화에 대하여 성서적 전통들이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위에서 이미 말하였다: 사람은 안식일 이전의, 그리고 안식일을 위한 마지막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제사장적 피조물이며, 땅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위하여 땅 앞에 서 있다. 그는 사명을 받은 자일 뿐 아니라 창조 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메시아 예수와 같은 모습을 향한 사람의 종말론적 소명은 사람을 새 창조의 종말론적 역사로 인도한다. 다시 말하여, 소명에서 칭의로, 칭의에서 성화로, 성화에서 영화로 인도한다. 장차 올 하나님의 영광이 부활한 메시아의 얼굴에 빛나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은 이미 여기에서 "가려져 있는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다. 강한 종말론적 성향이 메시아적인 현재를 성취한다. 단지 하나의 거울을 통하여 불분명한 말로 '여기에서(이 땅에서)' 인식되는 것이 '거기에서는(그 나라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여질 것이다.(고전 13.12).(12)

성서의 이러한 암시들을 조직적으로 종합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은 창조 안에 있는 창조자의 현재에 상응한다. '하나님의 자녀' 인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현재에 상응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창조 안으로 들어올 때, 사람은 하나님과 비슷하게 되고 그의 나타남을 닮게 된다. '은혜의 일치를 통한 형상'(imago per conformitatem gratiae)은 그 자신을 넘어서 '영광의 닮음을 통한 형상'(imago per similitudinem gloriae)을 가리킨다.(13)

사람이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본다'는 개념 속에 숨어 있다. 왜냐하면 얼굴로 보는 것과 있는 그 대로의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보는 사람을 보여지는 자로 변화시키며, 보여지는 자의 삶과 아름다움에 참여하게 하기 때문이다. 신적 본성에의 참여와 충만한 '유사성'으로 발전한 하나님에 대한 '상응'은 사람에게 약속된 영화의 특징을 나타낸다. 태초에 창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됨은 성자와의 메시아적 사귐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변하며, 이 둘(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자녀됨)은 새 창조에 영광속에서 사람의 하나님 같아짐(Gottgleichheit)으로 변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에 언제나 상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현존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 일회적으로(ein für alle mal)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의 역사에 상응하여 변화한다. 사람이 무엇인지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이 역사로부터 비로소 인식된다.(14)

 

 

[주]

 

1) J. 몰트만,『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9), p313

2) Ibid, p.314

3) Ibid, pp.315-316

4) Ibid, pp.317-318

5) Ibid, p.318

6) Ibid, pp.319-321

7) Ibid, pp.324-326

8) Ibid, p.326

9) Ibid, pp.326-327

10)Ibid, p.327

11)Ibid, pp.328-329

12)Ibid, pp.329-330

13)Ibid, p.331

14)Ibid, p.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