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25)

구원에 관한 오늘의 시각

 

(2016년 12월 16일)

 

얼마 전부터 한국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가운데서 톰 라이트의 이른바 “바울의 칭의론에 관한 새 관점”과 김세윤의 이른바 “유보적 칭의론”을 둘러싸고 논쟁과 토론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이에 관한 기사와 발언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음을 본다. 나도 이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어서 논쟁과 기사를 자주 눈여겨 살펴보았고, 올해에는 나름대로 구원에 관한 책도 한 권 써 보았다. 나의 책에서 나는 김세윤의 입장을 간단히 소개하고, 내 입장을 피력해 보았다.

누구의 이론이 더 옳고 그른지, 누구의 주장이 성서와 전통에 더 적합하고, 더 나아가 현실적 적합성을 더 강하게 지니는지는 계속되는 논쟁 중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여기서 내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사실이 있다.

하나는 어떤 자가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느냐에 관한 논쟁이다. 성서는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고 더욱이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책이기 때문에 매우 다양하거나 서로 상충하는 내용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성서에서 제 나름대로 근사하게 끌어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의 이론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편들거나, 다른 사람의 이론을 틀렸다고 무조건 폄하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구원에 관한 한, 모든 결정권을 겸손하게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결정권에 달려 있는 구원에 관해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왈가불가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참으로 가소롭게 여기실 것 같다.

이보다 더 유감스러운 점은 대부분의 논쟁자들이 언제 완성될지도 모를 미래의 최종적 구원을 놓고는 매우 격렬하게 논쟁하지만,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구원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구원이 마지막 구원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오늘의 칭의가 마지막까지 보장되는지에 관해 논쟁하는 그들도 마지막 구원이 오늘의 구원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여전히 마지막 구원에만 쏠려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미래가 현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오늘의 구원이 내일의 구원에 비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리고 사람들의 주장이 대개 개인적 구원에만 제한되어 있고, 오직 칭의나 용서의 차원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도 상당히 유감스럽다. 오늘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의와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한 채, 미래의 천국에 최종적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구원인 양, 오늘 우리가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영위하는 삶의 구조적 차원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쉽고, 그래서 우습기도 하다. 오늘 여기서 불의한 상황 속에서 신음하는 뭇 피조물들의 고통스러운 외침과 무관한 구원론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탁상이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