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35)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신학자 선언”에 대한 나의 소감

(2017년 10월 21일)

 

모두가 알다시피, 올해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을 부착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지 500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속속 열리는 중이다. 매우 뜻깊은 일은 그 동안 뿔뿔이 흩어지고 나눠졌던 한국의 신학자들이 처음으로 함께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교파와 신학을 달리하던 사람들이 이를 계기를 함께 모여 예배하고 토론하고 교제를 나누는 모습을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오직 하나뿐인 분단 민족일 뿐만 아니라 남한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와 형태로 얼마나 갈가리 찢겨져 있는가! 이런 점에서 이번의 공동모임은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의 화해와 일치의 상징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던진다고 할 것이다. 물론 머잖아 우리는 다시금 서로 헤어져 따로 활동하거나, 심지어 서로 등을 돌리고 격렬하게 싸우기도 할 것이지만 ...

소망 수양관에서 열린 이 모임에 나는 어제 잠시 들러 반가운 사람을 만나 대화한 후에 저녁에 다시 되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보다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신학자 선언”이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우 당연하고 아주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대개의 학회 모임은 학자들만의 싱거운 잔치로 끝났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는 이 모임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고, 학회도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위한 공적인 임무를 거의 수행하지 않았다. 모처럼 맞이한 종교개혁 500주년에 최소한 이런 신학선언서는 발표해야 학회의 체면과 권위가 설 것이다.

뜻밖에 문장은 그리 길지 않았고, 논리도 매우 복잡하지 않아서 매우 좋았다. 루터를 모방하듯이 선언서를 굳이 95개로 작성하지 않은 것도 무척 다행한 일이다. 내용도 편협하지 않고 포괄적인 것도 매우 감사한 일이다. 신학과 교파의 다양성을 포용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이를 작성하느라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현해 마지않는다.

그럼에도 매우 아쉽거나 유감스러운 점이 엿보인다. 뜻깊은 해에 중요한 신학선언서를 발표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오랜 준비와 더 폭넓은 의견 수렴과 더 진지한 토론이 전제되었어야 하는데, 너무 졸속으로 갑자기 만들어진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기독교의 구원론을 표명한 네 번째 조항은 문제와 허점이 매우 심각해 보인다.

“우리는 인간이 성취와 종교적 업적이 없을지라도,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고백하는 믿음을 통해, 죄의 용서와 성화 그리고 구원이 주어진다는 종교개혁자들의 복음 선포가 지금도 유일한 소망임을 확신합니다.”

특히 사죄와 성화와 구원이 나란히 나열된 문장은 매우 어색해 보인다. 죄의 용서와 성화는 구원과 무관하다는 말인가? 그래서 사죄와 성화 외에 구원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다시 추가되어야 했는가? 사죄(칭의?)만이 아니라 성화와 구원이 믿음을 통해 주어진다는 고백은 매우 편협한 구원론을 반영하고 있다. 성화와 구원을 위한 인간의 역할은 전무하고 그래서 전혀 무용하다는 말인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칼뱅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여기서 강하게 들려오는 듯하며, 인간의 협동과 책임을 강조하는 자(예컨대 웨슬리안)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은 듯이 보인다. 아마도 신학선언서 작성에 참여한 자들이 거의 장로교파에 속한 자들이었고, 웨슬리안들이나 다른 계통의 신학자들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이런 편협한 구원론이 발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루터의 반박문이 구원론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면, 이번의 신학선언서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위해 상당히 큰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 세상의 악과 부패에 맞선 싸움과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노력, 생태계 파괴, 잘못된 목회와 교회론의 극복, 경제 양극화 극복을 위한 노력 등은 분명히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증언의 사명임은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가 현실적, 현재적임을 강조하는 이 조항은 지금도 관행적으로 선포되는 내세적, 피안적인 하나님 나라를 교정하는 소중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매우 이상한 점은 이 모든 인간의 실천적 행동이 앞에서 언급한 “죄의 용서와 성화와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이렇게 많고 어려운 일을 왜 힘겹게 수행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일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비록 급하게 작성되었더라도, 비록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더라도, 모름지기 한국교회를 향해 발표되는 공적인 신학선언서는 논리적, 신학적, 내용적으로 더욱 엄밀하고 정교하고 충실했어야 한다. 단지 문장의 구조와 논리만이 아니라 신학적 내용과 엄밀성이 매우 떨어지는 이런 선언서를 이렇게 뜻깊은 해에 발표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우리가 10년, 20년, 아니 또 다른 500년까지 이어갈 소중한 신학선언서가 발표되지 못한 점이 매우 아쉽다. 그럼에도 이런 신학선언서가 나온 것을 다행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선언서가 밝혔듯이, 더 나은 선언서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개혁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해 나가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신학자 선언

종교개혁 500주년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하는 한국의 신학자들과 참가자들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95개조 조항을 발표했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며, 종교개혁의 신앙적 유산을 재조명 하면서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의 회복과 사회적 갱신을 통해 교회와 사회를 개혁코자 하였던 것을 기억하며, 이에 우리도 근본으로 돌아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1.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릇된 신학과 전통에 맞서 오직 성경 말씀의 권위에 의존하여 변질된 교리와 잡다한 종교적 허상들을 벗겨내어 기독교의 복음을 제시하려 했던 개혁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것을 선언합니다.

2.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셔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음을 고백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계승해 나갈 것을 천명합니다.

3.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해서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기독교 복음에 대한 확신을 세상과 교회를 향해 선포할 것을 다짐합니다.

4. 우리는 인간이 성취와 종교적 업적이 없을지라도,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고백하는 믿음을 통해, 죄의 용서와 성화 그리고 구원이 주어진다는 종교개혁자들의 복음 선포가 지금도 유일한 소망임을 확신합니다.

5.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힘썼던 정신을 계승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에 근거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세상 속에서 섬기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6.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상호 존중하였으며 진리를 회복하여 교회를 바로 세워나가고자 연합과 일치의 노력을 경주하였음에 유의하면서, 오늘날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지상의 교회들이 일치와 연합을 위해 힘쓰는 것이 시대적 과제임을 확인합니다.

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악과 부패에 맞서 정의로운 평화를 위해 노력하며, 자신과 주변을 계속적으로 갱신하기 위해 날마다 선한 싸움에 힘쓸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주님의 샬롬을 성취하기 위해 국가 간의 폭력, 특히 오늘의 한반도에 드리워진 핵전쟁의 위기를 끝내야 하며, 불의한 사회 상황이 가져오는 폭력, 또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생태계의 파괴를 극복해 나갈 것을 선언합니다.

8.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십자가의 신학'을 강조했던 것처럼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돌보시고 눌린 자들과 소외당한 자들을 치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목양해 나갈 것을 천명합니다. 모든 교회들이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는 목회 철학과 개교회 중심주의, 성장주의, 권위주의 등을 내려놓는 것이 오늘의 과제이며, 작금의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각종 증오와 갈등을 사랑으로 감쌀 책임이 기독교인들에게 있음을 확인합니다.

9. 기술자본주의 시대는 인간의 삶의 조건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으나, 역설적으로 삶의 환경은 황폐해졌습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질서 내에서의 새로운 기술 발전을 기대하면서, 그에 따른 생태계에 대한 책임적 윤리 의식을 잊지 말 것을 다짐합니다.

10. 신학은 겸허히 교회를 섬겨야 하며, 교회는 신학 앞에서 항상 자신을 조망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와 신학은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에게 배우며 서로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교회 없는 신학이나, 신학 없는 교회는 온전치 않은 것으로, 우리는 신학무용론의 반지성주의와 교회 없는 신학의 공허함을 모두 경계합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것을 다짐하면서, 진리에 대한 확고한 태도와 경건한 자세를 갖추고, 모든 일에 겸손하면서도 용기와 희망의 확신을 갖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 진리를 적용하고 발전시켜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사명에 헌신할 것을 선언합니다.

2017년 10월 20일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공동학술대회 참가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