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51)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란 무엇인가?


(2025년 1월 3일)

 

우리는 오랫동안 여러 종교를 수용해 왔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종교 간의 갈등은 비교적 덜 일으켜 왔다고 볼 수 있다. 주류 종교가 무교에서 불교로, 불교에서 유교로 넘어가고, 근대에 와서는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종교 갈등은 격렬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사유 구조가 융합적이고 혼합적일 뿐만 아니라, 민족성도 이원론적인 갈등과 분쟁보다는 조화와 평화를 더 사랑한 민족성이었기 때문일까?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가 무교와 단호히 결별하기보다는 무교와 은근히 융합함으로써 생존, 번영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고려 말기에는 조선 건국의 이념 설정을 위해 불교 비판과 억압이, 그리고 조선 건국 후에는 정치적 붕당의 바탕에 유교를 둘러싼 이념 갈등이 자주 일어났고, 개신교 선교 초기에는 극심한 종교 박해도 일어났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나라에 비해 종교 갈등을 더 잘 조정하거나 슬기롭게 극복해 왔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이념 논쟁이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목격한다. 친일과 독립, 친미와 자주, 자유와 평등, 독재와 민주,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은 지역적, 종교적, 세대적, 성적 갈등으로까지 이어졌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윤석열 집권 이래 더 심각한 이념 갈등을 노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파와 좌파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자.

지금까지 한국에서 우파는 미국을 추종하고 미국의 지지를 받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강하게 표방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가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정치적 독재주의를 더 강하게 선호해 왔다는 사실은 기막힌 역설이다.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고 경제적 번영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우파는 수많은 독재자를 양산해 왔다. 그리고 남북 교류와 평화, 통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우파는 공산주의자와 간첩으로 매도해 왔다. 윤석렬도 다른 대통령처럼 일본과 미국을 강하게 의식한 탓인지,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를 남발했지만, 실제로는 오직 자신과 가족과 측근들의 자유만을 보장했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언론과 결사의 자유는 심각하게 억압해 왔다.

잘 알다시피 우파의 대통령은 모두 불행한 종말(망명, 살해, 구속, 탄핵)을 자초했다. 그러나 그들이 좌파라고 비난한 대통령은 대부분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이것은 참으로 기막힌 역설이다. 우파가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국가 안보와 경제적 발전, 기득권의 연장을 위해 독재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는 헌법과 법률을 수호하고 인간의 존엄과 가족, 국가의 보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이념이 아닌가? 그러나 우파의 현실은 과연 그러했는가? 낙태와 동성애 등을 반대하는 것 말고는 딱히 그들이 왜 보수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진정한 보수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보수라는 옷을 걸친 사람은 대개 자신과 자기 정파의 이익과 부정, 부패를 수호하려는 사람으로 비친다.

좌파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에 진정한 좌파가 존재할까? 러시아, 중국 또는 북한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좌파도 없을 것이다. 복지 확대를 주장하고 자유와 경쟁보다는 평등과 연대를 더 강조하는 자는 온건한 좌파나 진보적 중도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좌파는 헌법적, 법률적 가치보다는 이상적인 미래를 추구하기 때문에 종종 헌법과 법률(국보법 등)을 공공연히 위배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좌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도 범법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우파는 부정, 부패에 얼마나 더 자주 연루되었으며, 그래서 좌파보다 얼마나 더 자주 감옥을 들락날락했는가?

우리의 시선을 종교, 특히 내가 속한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돌려 보자. 성결교회는 이른바 종교개혁의 후예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복음과 성경의 가치를 보수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하다. 그런 점에서 성결교회는 비교적 보수적이고 때로는 근본적이기도 하다. 특히 나를 비롯한 많은 유학파 학자들은 그래서 진보주의, 자유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지내야 했으며, 최근의 박영식 교수의 해임과 이단 의결 사례에서 보듯이, 신학적 변화와 발전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부적이다. 성결교회의 대형 교회와 지도자들의 다수가 보수적인 지역에서 배출되었다는 사실도 성결교회 보수성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개신교에 소속된 모든 교회는 이른바 ‘개혁’이라는 구호도 전면에 내세웠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그래서인지 개혁의 대상인 가톨릭교회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이래 지금까지 하나의 교회를 존속해 왔지만, 개신교는 ‘개혁’의 깃발 아래 수많은 동지들과 교파로 갈가리 분열했다. 분열을 미화하고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개혁의 가치는 보수적 가치와 충돌하기에 분열을 낳기 쉽다. 그러나 분열은 역설적으로 개신교 성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점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점점 더 다원화, 다변화하는 사회에 처한 우리는 종교 간의 평화만이 아니라 이념 간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 더 한층 노력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는 늘 극단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다. 보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보수주의는 늘 개혁되어야 하며,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보수적 가치는 늘 보존되어야 한다. 보수와 개혁,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각자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서라도 평화적으로 협력하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해야 한다.

좌파와 우파도 마찬가지다. 좌파와 우파의 구분도 시대와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다. 그러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고, 인간도 우편과 좌편의 기능의 협력으로 건강해진다. 너가 없다는 내가 없고, 내가 없다면 너도 없다. 보수가 없다면 진보도 없고, 진보가 없다면 보수도 없다. 우가 없다면 좌가 없듯이, 좌가 없다면 우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극단적으로 치우치고 다른 한쪽은 완전히 박멸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보수와 진보, 그리도 좌파와 우파는 건강하게 공존하고 건설적으로 경쟁해야 한다.

윤석열의 탄핵 의결과 체포 과정에서 일어난 우리 사회의 극단적 갈등을 목격하면서 아침에 즉흥적으로, 급하게 써 본 글이어서 논리적이고 실천적인 허점이 많이 보일 것이다. 나의 역량을 넘어설 노릇은 없기에 독자들이 잘 교정하고 보완하기를 바라며, 부디 소모적이고 비인간적인 갈등과 분쟁은 더는 일으키지 말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오늘도 모든 사람에게 건투를 빌며, 모든 사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