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6)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2015년 11월 24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이제야 그분에 대한 온갖 평가가 난무한다. 역시 인간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평가를 받기 시작하는 것 같다. 살아 있는 자의 면전에서 그를 평가하기란 보통 어렵지 않다. 죽은 자에 대한 평가가 살아 있는 자에 대한 평가보다 훨씬 더 쉬운 법이다. 이제 내가 뭐라고 평가하든,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주위 사람들은 죽은 자를 평가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죽은 자의 반격과 보복을 받을 위험은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살아 있는 자를 평가하는 것이 죽은 자를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직하고 공정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보듯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살아 계실 때에는 결코 할 수 없었던 말을 돌아가신 후에는 천연덕스럽게 내뱉은 교활한 정치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초점은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평가가 아니라, 산 자가 잘 죽는 법에 있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죽음은 삶과 맞물려 있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를 먹고 살고, 그렇게 죽은 자도 결국 산 자의 밥이 된다. 이래서 세상은 공평하다고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생명 현상도 비슷하다. 수많은 세포가 죽은 대가로 새로운 세포가 살아난다. 살아 있는 생명 안에서도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그리고 살아도 죽은 자처럼 취급되는 자가 있고, 죽어도 살아 있는 자로 존중을 받는 자가 있다. 삶은 인식과 연결되어 있고, 죽음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살아 있어도 남이 나를 몰라본다면, 나는 최소한 그에게는 죽은 자다. 그러나 비록 내가 죽었어도 남이 나를 기억한다면, 나는 최소한 그에게는 살아 있는 자다. 살아도 죽은 자처럼 무의미한 삶을 억지로 이어가는 자가 있고, 죽어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충만하게 계속 살아 있는 자도 있다.

“남이 나를 기억하거나 망각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나만 행복하게 오래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자도 많을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그 말이 맞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누가 나를 뭐라 평가하든, 내가 떳떳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기 혼자 태어나서, 자기 혼자 살다가, 자기 혼자 죽는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개체적 존재임과 동시에 집단적 존재다. 네가 없이는 나도 없다. 내가 없이는 너도 없다. 우리는 엄연히 남과 혼동되어서는 안 될 독립적 인격이지만, 분명히 남과 나뉠 수 없는 집단적 인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끝까지 잘 사는 자가 참으로 잘 사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남의 평가를 늘 의식하면서, 남의 눈치만을 보면서 살자는 뜻은 아니다. 남의 평가가 항상 옳을 수는 없다. 남의 평가도 수시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의 평가, 남의 평가, 역사가들의 평가, 하나님의 평가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자는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리라. 이렇게 살아가는 자는 잘 죽을 것이고, 남은 자에게도 오래 기억될 것이며, 하나님에게 큰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죽을 때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라!”라고 말했다.

이번에 열렸던 국제적인 야구 대회에서 일본전과의 시합을 끝까지 못 본 사람이 많다. 예선에서 이미 크게 졌고, 8회 말까지 3:0으로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간에 아예 기대를 접고 다른 채널로 돌렸고, 어떤 이는 8회 말까지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9회 말에 갑자기 4점을 얻어 승리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끝까지 잘 싸운 우리 선수가 이겼다. 그래서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Ende gut, Alles gut)라는 독일 속담이 있다.

그러므로 끝까지 잘 살아야 한다. 끝까지 부자로 살아야 하거나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비록 가난하고 병들어도 끝까지 잘 살아야 한다. 끝까지 부자로, 건강하게 살아도 세인의 비난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끝까지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끝까지 자신의 꿈과 역사적 사명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정말 쉽지 않다. 육체의 노쇠와 질병과 함께 정신도 허약하고 병들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명예를 얻던 자들도 죽기 전에 불명예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의 연약성과 제한성의 탓이므로 그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불쌍히 여기서나 동정을 느껴야 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 분들도 결코 적지 않다. 그분들로부터 우리는 지혜와 용기를 배워야 한다. 주님,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의 남은 날이 얼마일지를 늘 생각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살아가도록 오늘도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