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8)

즐겁지만 않은 성탄 주일

  (2015년 12월 25일)

 

오늘 오전에 즐거운 성탄 예배를 드리러 운전을 하며 교회를 향해 가던 중에 우연히 즐겁지 않는 두 장면을 보았다. 소사 삼거리 대로에서 어느 할머님이 수레를 끌고 계셨고, 역곡역 대로에서는 어느 할아버님이 수레를 밀고 계셨다. 추위와 위험 속에서도 힘겹게 폐지를 모아 돈을 버시는 노인들이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많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그런 할머님이 한 분 계셨는데, 어느 날 폐지를 버리는 장소가 화단으로 바뀐 다음에는 그 할머님도 사라지셨다.

만약 오늘이 즐거운 성탄 주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광경을 일상처럼 무심히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즐거운 찬양과 감동이 있는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도 나는 이 장면에 대한 기억에서 잘 벗어나지 못했다. 아내가 다른 일로 내가 우울한지를 물었지만, 예배 중에 아니라!”고 답변했을 정도로 내 얼굴은 내내 슬픈 기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지금 저런 고생을 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데,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힘들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양가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지만, 저분들이 마치 내 부모님인 양 애처러워 보였다. 내가 저분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자괴감도 일순간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병약한 노인들을 저렇게 방치하는 우리나라에 대한 분노감이 일어났다. 저분들이야말로 오늘 우리나라가 이 만큼 잘 살 수 있도록 가장 큰 희생을 치르신 분들이 아닌가? 어이없게도 바로 저분들이 지금도 가장 큰 고생을 하고 계시니, 이게 말이 되는가? 노인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유도 따로 없다지 않은가? 경제난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왜 이토록 이기적일까? 정부도 병약한 노인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고 있다. 현 정권의 선거공약은 거창했지만, 결국 반쪽 자리 공약 또는 텅 빈 약속이었음이 드러났다. 야당과 야당도 무심하기는 거의 마찬가지다. 오직 이권, 대권에만 혈안이다. 연말이 되어도, 반성하는 지도자들이 없다. 이러는 사이에 점점 더 많은 노인이 불행의 나락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한국의 빈부격차가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가 되었다니,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무엇에 비교해야 할까?

얼마 전에 나도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불렀더니, 어느 지인이 불쾌히 여겼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와 동행하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답변했더니, 그분의 화가 조금 풀린 모양이다. 물론 나는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아니 나는 불행도 가급적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활용한다. 그래서 나는 불행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불행 때문에 감사하기를 배우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측량하거나 표현할 수도 없지 않은가? 불행과 죽음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로 감사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매일 내리시는 하나님께 불평할 자격과 권리가 우리에게 과연 있는가?

그렇지만 인간의 더러운 탐욕에 대해서는 나는 오늘도 분노하고 불평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이 될 때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지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위대한 혁명의 전조로 보았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1:51-53)

예수가 가져온 위대한 혁명은 어디로 가고 말았는가? 우리나라에는 두 집 건너가 교회당이고, 세 사람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예수의 혁명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고 예수처럼 살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기는커녕 제대로 알고는 있을까? 나도 50년 이상 성탄주일을 지켰지만,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자를 여태 전혀 본 적이 없으며, 예수가 가져온 평화가 거짓되고 불의한 평화를 전복하는 혁명적이고 정의로운 평화임을 설교하는 자들도 거의 본 적이 없다.

성탄절마다 아기 잘도 잔다!”고 노래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진정한 예수를 계속 재워두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의 혁명이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예수를 아직도 계속 구유 속에 가두어 두고 있지 않는가?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탐욕에 끌려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오늘날 예수쟁이들이 탐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즐거워야 할 올해의 성탄 주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