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2019년 6월 12일)

 

어제는 청명한 날씨가 강하게 유혹하여 아내와 함께 나들이를 했다.
오래 전에 대충 돌아보았던 다산 유적지를 조금 더 세심히 돌아보았다.
그곳은 다산생태공원과 함께 매우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정약용의 생애와 행적을 비교적 소상히 소개하고 있었다.
그의 자취를 가까이서 맛볼 수 있음이 여간 행복하고 고맙지 않았다.
나는 그를 일찍이 교과서를 통해 선구적인 실학자로 알았지만,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동안 그에게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어제 나는 그의 삶으로부터 새삼 적잖은 도전과 충격을 받았다.
나의 신학 이론이 현실에 얼마나, 그리고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는가?
공허한 사변과 생계의 방편으로 신학을 연구해 오지 않았는가?
그의 방대한 저서와 선구적인 실천은 나에게도 영원한 귀감이 된다.
그가 환갑을 맞이하여 미리 써놓았다는 유서가 특히 눈에 띄었다.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이 글귀에서 문득 노무현이 떠올랐지만,
옛것을 좋아한다는 말만을 빼면, 나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정약용과 노무현, 그리고 나에게도 고난이 안겨준 열매는 쓰지만 달았고,
그래서 고난도 때로는 운명, 하나님의 섭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속에 쌓였었다.”
이 글귀는 나를 매우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가 왜 이런 고백을 남겼을까?
가족과 친지, 동지에 대한 큰 죄책감 때문일까?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는 옛말처럼
그가 남긴 눈부신 빛은 어둔 그림자도 길게 남겼으리라.
살아갈수록 나의 죄와 허물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더 사랑해주지 못한 사람들,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들이 생각난다.
이런 죄와 허물을 죽기 전에 제대로 갚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높은 산이 되려고 애쓰다가 깊은 골을 남겼다면,
이제는 온갖 생명이 자라고 깃드는 평평한 들판이 되고 싶다.
하지만 이런 소박한 소원도 어찌 내 마음대로 이룰 수 있으랴?
모든 게 운명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