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


마 7:1-5

2004년 7월 14일, 현풍제일교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가 가장 지나치기 쉬운 예수의 말씀이면서도 많은 오해를 받아온 말씀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예수의 말씀을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국한하는 것을 거부하고, 삶의 전반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실현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그는 "살인하지 말라"와 "보복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을 근거로 삼아 전쟁과 폭력 일체를 거부하는 평화 운동에 앞장을 섰다. 톨스토이는 오늘의 말씀을 근거로 삼아 시민을 재판하는 법정 제도를 거부하였다. 정말 법이 전혀 필요하지 않고, 그래서 재판할 필요도 없는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은 완전한 사회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한 인류의 영원한 꿈일 것이다. 이 땅에 범죄가 존재하는 한, 정의로운 재판을 내림으로써 악을 처벌하고 방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하려면, 올바른 분별력과 건전한 비판 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 즉 교회 안에서 준수해야 할 계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에 관해 가장 널리 퍼진 오해는 예수가 모든 비판을 일절 금지하였다는 주장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첫 구절만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예수는 모든 비판을 금지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슈바이처(A. Schweizer)와 본회퍼와 같은 사람은 예수가 모든 비판을 금지한 것으로 본다. 슈바이처는 말한다. "만약 우리가 헤아리고 재고 분류하는 범주 안에서 산다면, 구원받지 못한 자임을 의미한다. 남을 비판하는 자는 그 비판의 잣대로써 하나님에 의해서도 비판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놀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비판을 중지한다." 본회퍼도 말한다. "남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은 제자들에게 있을 수 없다. 사랑에는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결코 방관적 관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나의 사랑과 봉사를 언제나 요구하는 사람으로 대한다. 심판은 소경을 만드나, 사랑은 보게 한다. 비난은 이웃에 대한 월군 행위요 오만이니, 자기에게 그것을 철저히 금하여야 한다." 유대인의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다. "너는 이웃의 상황에 처해 볼 때까지는 이웃을 비판하지 말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교회 안에서 모든 비판을 차단하는 안전핀으로 사용해 왔다. 물론 교회 안에서 비판과 비난이 자주 이루어진다면, 교회가 올바로 지탱되기 어렵다. 성도는 모름지기 남의 허물을 들추는 데 관심을 갖기보다는 남의 허물을 통해 먼저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시정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다른 성도의 허물을 볼 때마다, 즉시 이를 까발리기보다는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그의 허물을 덮어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하고 더욱이 그의 허물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잠언 기자는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고 말하며,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고 말한다.

 

하지만 "남을 절대로 비판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사람도 남을 비판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만약 비판이 절대로 금지된다면, 비판하는 사람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그리고 절대적인 비판 금지는 악행을 허용하고 불의에 굴종하는 결과를 낳는다.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으로 비판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잘못을 못 본 체하거나 진실과 오류,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예수도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분명하게 판단할 것을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죄악과 불의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일체의 정당하고 적법한 비판까지 막는다면, 예수의 의도를 그르치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 힘센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서, 결국은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억울하고 불의한 사회가 생겨날 것이다.


 

2)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정당한 비판과 부당한 비판을 구분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예수는 무죄한 자를 정죄하거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나치게 정죄하거나 충분한 근거도 없이 남을 정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스토트에 의하면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한 마디로 "비난하기를 좋아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명령은 "분별력을 갖지 말라"는 요구가 아니라 "관대하게 되라"는 간청이라는 말이다. 실로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이 모든 비판을 금지하기보다는 비판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형제의 티를 지적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들어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햐 하고,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빼내야 한다. 바로 그런 후라야 그는 사물을 밝히 볼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도 지적할 수 있게 된다.  


대개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보다는 남들에게 대해 더 비판적이다. 남들의 잘못은 부풀리는 반면, 자기 자신의 잘못은 넘겨 버리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똥 묻는 개가 겨 묻은 개를 보고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 무의식적이고 보편적인 경향인 것 같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슬람의 한 종파인 수피즘(Sufism)을 창시한 수피라는 사람이 젊었을 때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온갖 수련을 거친 끝에 거의 완전하다고 느낄 정도로 자신에 차 있었다. 하루는 강변을 걷고 있는데, 대낮부터 웬 젊은이가 여인을 품에 끼고 술을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슬람 사회는 술과 간음을 매우 혐오한다. 이를 본 수피는 쯧쯧 혀를 차면서, 그 사람을 비난하였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강에 떠 있던 배가 전복하여 여러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수피가 수영을 전혀 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 동안, 그가 비난하는 그 젊은이가 갑자기 강에 뛰어들어 여러 사람을 구하였다. 그리고는 물에 흠뻑 젖은 몸으로 수피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러 사람들 구했으니, 당신이 남은 한 사람을 구해 주시오. 내가 안고 있던 여인은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이며, 내가 마시던 것은 술이 아니라 물이라오. 이 말을 듣고 수피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스스로 잘났다고 자랑하던 자신이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한 명도 건지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심히 부끄럽게 여겨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고개를 들으니, 그 젊은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꿈이었는지, 사실이었는지 잘 분간할 수 없었던 그는 그 날 이후로 크게 뉘우치고 다시 수련한 후, 이슬람 신비주의의 한 분파의 수피즘의 위대한 창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도 크게 뉘우친 적이 있다. 그래서 "남의 입장이 되어 보기 전에는 결코 남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실로 남을 비판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할 만큼 그렇게 선한 사람도 아닐 뿐더러, 남의 인격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심히 어렵다. 설령 남을 비판할 자격이 갖추어져 있다손 치더라도, 객관적이고 사심이 없이 판단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급적 남에 대해, 특히 성도에 대해서는 더욱 관대히 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3) 남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우리가 남을 함부로 비판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남을 비판한 그 잣대로 남에게서도 냉철한 비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을 비판한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의로운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섣부른 비판과 비난은 자신의 위선과 교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더 큰 불화와 비난을 낳기 때문이다. 남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말한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4-5).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존중하고 먼저 자신을 꾸짖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을 냉철하게 되돌아보고 잘못을 제거한 후에 비로소 남을 도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남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마치 자신이 더 의로운 재판장이라도 되는 듯이, 혹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 남을 내려다보는 듯이 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도 더 큰 허물과 잘못을 범하기 쉬운 연약한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임을 함께 고백하면서, 비판과 비난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눈으로 남을 바라보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남도 기꺼이 용서하고 용납하기를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긍휼히 여기는 자라야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5:7).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 정말 함부로 하고 싶다면, 함부로 사랑하라! 사랑만이 영원하고, 사랑만이 승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