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2)
빌 3:12-14
2003년 1월 19일, 현풍제일교회
지난 주일에 저는, 인생만이 아니라 신앙 생활도 곧 경주와 같으므로 경주자는 항상 자기가 달려야 할 마지막 목표 지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에 관한 두 번째 설교 말씀으로서 "어떻게, 누가 목표를 결정하는가?"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잡힌다"라는 말은 동물의 사냥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서 저는 자주 동물의 세계를 봅니다만, 거기서 사자와 같은 강한 동물이 사슴과 같이 약한 동물들을 사냥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동물이나 인생이나 모두가 "누가 잡아먹고, 누가 잡아먹히느냐?"라는 운명의 기로에 서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약하다는 이유로 삶을 채 피워보기도 전에 강한 동물에게 잡아먹히는 어린 동물을 보면 "제발 잡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다가도, 굶주린 사자의 새끼를 보면 "어미가 빨리 먹이를 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결국엔 "생명의 순환과 유지를 위해서는 적당한 희생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인간 세계에서도 분명히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옛적에는 동료 인간을 잡아먹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동료 인간을 양식으로 삼는 인간은 거의 사라졌지만, 이런 저런 방법으로 다른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살해하는 광경을 보면, 슬픔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억압하고 살해하는 일은 정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폭력과 전쟁, 사형 제도를 단호히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인간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느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목표를 붙잡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그를 붙잡아서 인생의 목표를 알려주셨다는 말입니다. 동물은 "누가 잡아먹으며, 누가 잡아먹히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하느냐, 아니면 다른 그 누가 결정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누가 여러분의 삶을 붙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가는 힘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입니까, 환경입니까? 보이지 않는 운명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특히 "인간이 구원을 받는 일에서 주도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냐, 아니면 인간의 행위냐?"에 관해 지금까지 많은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대체로 세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났으므로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과 칼빈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제 자신의 의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장로교 정통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만을 너무 강조하거나 하나님의 의지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다 일방적인 이론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먼저 강조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도 함께 강조한 이론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웨슬리(Wesley)가 가르친 교리였고, 감리교회와 성결교회가 따르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사람들은 흔히 신인협동설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령 암담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전혀 개입하시지 않았다고 생각되더라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설령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릴지언정, 사랑의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끌려 강압적으로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결코 운명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간은 컴퓨터나 물건이 아니므로 운명에 질질 끌려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한다고 말하면,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셈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생각을 미리 측량할 수 없으며 더욱이 조종할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모든 것이 다 나의 행위였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때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처럼 "내가 힘써 살았지만,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였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행했지만, 이것은 나의 덕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붙잡히기 전만 해도, "내 운명은 내가 만든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자질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자신만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을 붙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도리어 예수님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신비한 환상 중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율법으로, 행위로 의롭다고 하는 생각을 다 버렸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이제 그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사랑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요, 신실하신 하나님이 끝까지 보증하시는 약속이요,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다고 하면, 수시로 이 연약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환경과 나이에 따라, 기분과 변덕에 따라 행동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든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근거와 보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바울의 사명도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에게 붙잡히기 전에는 그가 무슨 사명을 품고 살았는지는 정확하게 몰라도, 아마도 그는 유대교의 지도자, 존경받는 학자가 되는 사명에 푹 젖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붙잡힌 후로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거기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남이라면 피하고 싶을 죽음을 각오하면서 죽음을 복음 전도의 기회로 활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의 인생의 목표는 예수님에 의해 결정된 것이므로 흔들릴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사명을 다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은 것은 그의 사명이 다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시고, 운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환경에서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손에 담담히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하나님의 손에 늘 붙들려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붙들릴 수 있는가?"하고 물으실 겁니다. "하나님에게 붙들리는 일"은 우리가 미리 계획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배우기 전에 저는 저의 힘으로 물에 뜨는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물에 떠보려고 발버둥치다가 오히려 물을 들어 마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수영의 원리를 터득한 후로 저는 제 힘으로 물에 뜨는 것이 아니라 물의 힘, 즉 부력으로 물에 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이 저를 떠받쳐주니까 제가 뜰 수 있었고, 그 후에야 비로소 손을 저어 앞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바늘은 물에 빠져도 바늘보다 엄청 무거운 쇳덩어리 배가 물에 뜨는 것은 물의 부력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비행기가 하늘에 나르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공기가 비행기를 떠받쳐주니까 비행기가 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호흡하고 걷고 뛰는 것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명만이 참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월드컵 이후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만,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꾼 꿈은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허황한 꿈을 꾸는 사람을 볼 때마다 우리는 "꿈 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우리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언젠가 꼭 이루어지고 맙니다. 요셉의 꿈이 그러했습니다. 바울의 꿈도 그러했습니다. 그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죽음을 통해서도 실패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바로 죽음을 통해 그의 꿈은 더욱 더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더 가까이 가져오겠다는 예수님의 꿈도 바로 그의 죽음을 통해 더 생생하게 실현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어차피 그 누구에 붙잡혀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자식에게 붙잡혀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내와 남편에게 붙잡혀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약이나 술과 담배에 붙잡혀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과 쾌락에 붙잡혀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붙잡혀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꿈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해 동안, 아니 평생 동안 꿈꾸고 가꾸고 실천해야 할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꿈에 붙잡혀 살아왔으며, 그 꿈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저의 꿈은 현풍제일교회에서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취임식의 답사에서도 밝혔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가장 닮은 교회,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교회를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이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므로 그 누구도 깰 수 없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한 해 동안, 아니 평생 동안 이 꿈에 사로잡혀서 살아가지 않으시렵니까?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이 주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향해 다함께 나아가십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여러분을 강하게 붙들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