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라

 롬 12:10

2004년 7월 18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더위와 장마 속에서 건강하고 기쁘게 잘 지내셨습니까? 모든 만물이 서로 의존하고 영향을 주고받다 보니, 사람도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순 없습니다. 특히 더위와 장마는 짜증을 유발하고 나태를 조장합니다. 이럴수록 목청을 드높여 크게 찬송하심으로써 짜증을 물리치시고, 남을 위해 열심히 일함으로써 나태를 이겨나갑시다. 우리 교회 창립 18주년을 즈음하여 저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세 차례 연속 설교를 하였습니다. 첫째 날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고, 둘째 날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말씀드렸으며, 셋째 날에는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땅에 많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국가, 민족, 사회, 직장, 가족, 계모임, 동창회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보다 영광스러운 공동체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족 관계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없지만, 실로 가족은 영광스럽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칭찬하고 싶은 훌륭한 가족과 가문이 많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어디까지나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로서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지, 영광스럽다고까지 말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찬송가 245장의 가사처럼 "시온성과 같은 교회의 영광은 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실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보다 새로운 계약으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 즉 교회를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장사와 계약 혹은 장례와 같이 가족의 생계와 운명이 달려 있는 그런 일들을 먼저 처리한 후에 예수님을 뒤따르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단호히 말씀하시면, 먼저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바깥 일, 즉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에 온통 빠져 있다고 가족이 느꼈을 때,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상당히 파격적입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3-35). 물론 예수님은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고 부모를 지극히 공경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의 가족에 대한 도리보다는 하늘 아버지의 일을 더 중요히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랐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과 고향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버렸습니다. 여기서 "가족을 버렸다는 말"은 물론 가족을 "나 몰라라" 하며 "가족을 내팽개쳤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가족을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장모의 병을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청하였을 만큼 장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가족의 일보다 하나님과 교회의 일을 위해 더 열심히 충성하였고, 결국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순교하였습니다. 만약 이처럼 교회가 가족보다 더 영광스럽지 않다면,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까지 헌신하고 순교까지 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만큼 영원한 공동체는 없습니다. 이 땅의 공동체는 살아 있는 동안만 유효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죽어서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상들을 기억하는 가운데서 정신적으로 그들과 계속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관계는 일시적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맺는 우리의 관계는 이 땅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퇴색해지는 이 땅의 모든 관계와는 달리 성도의 관계는 날로 더 분명해지고 영광스러워지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245장 4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세상 헛된 모든 영광 아침 안개 같으나, 주의 자녀 받을 복은 영원무궁하도다." 가족이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가문의 영광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이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영광은 놀랍고 영원무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는, 크고 놀랍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교회의 가장 영광스러운 신분을 지니신 여러분은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늘 당당하게, 늘 기쁘게 살아가시기를 부탁합니다.

앞으로 저는 이처럼 영광스럽고 영원한 교회와 성도들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해 "연속 설교"를 할까 합니다. 가장 큰 제목은 "교회는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가?" 혹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 번마다 설교는 항상 "서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리하여 저는 "성도가 서로에게 어떤 자세를 보아야 하며, 서로를 위해 무슨 일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오늘은 첫 설교로서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라"고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밀림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는 "무엇이 최대의 이단이냐? 최대의 이단은 교리의 이단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슈바이처보다 먼저 사도 요한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8, 20)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니 사도 요한보다 먼저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서로 우애하는 것과 존경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로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 사랑'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입니다. 미국의 도시 이름 필라델피아도 바로 여기서 유래한 말입니다. 비록 옛날 사람은 여자보다 남자를 더 존중했지만, '형제'라는 말은 자매를 포함하여 한 피를 나눈 사람들, 친척들, 동족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형제'라는 말은 동지와 친구처럼 정신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도 포함하는 말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은 타국인들도 가끔 형제와 이웃으로 대하곤 했지만, 대개 동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서로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가 동족이든 이방인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 '형제'라고 불렀습니다(마 25:31-46의 마지막 심판 참조).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서로를 형제처럼 사랑할 것을 명하는 본문은 오늘의 본문 외에도 여러 군데 나타납니다(살전 4:9, 히 13:1, 벧전 1:22, 벧후 1:7).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형제가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를 형제처럼 사랑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간의 형제 사랑만큼 강하고 아름답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을 차별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요, 성령의 은사 안에서 서로 섬기는 종이 된 성도들은 서로를 육신의 형제보다, 친구와 동족보다 더 친밀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압니까?  말과 혀로써 압니까? 아닙니다. 사랑으로 압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5).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사랑으로 압니다. 사도 요한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그리고 우리가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사랑으로 압니다. 사도 요한은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무릇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자격이 없고 불쌍한 사람들, 심지어 이 세상의 연약한 생명들도 사랑해야 마땅하지만, 성도들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한 피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성도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를 형제와 자매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의 관습에 매여서 당장 서로를 형님, 아우님, 누님이라고 부를 순 없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그리고 설령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인정하기 싫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미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된 이 놀랍고 신비한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아니 날로 더 분명히 드러내도록 힘쓰십시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합니다. 실로 교회 안에서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아니 극단적으로 서로 미워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판국에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니요!? 가수 태진아의 노랫말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말처럼 존경은 아무나 합니까? 사랑하려면 눈이라도 마주쳐야 하듯이, 존경하려면 우러러 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우러러볼 만큼 높은 신분과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로마 교회가 그 당시 다른 도시의 교회보다 부자와 귀족이 더 많았다는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비록 로마가 다른 도시보다는 큰 도시였지만, 로마 교회는 그야말로 신생 교회로서 낮고 천한 사람들만이 모인, 어쩌면 그곳까지 유랑해 온 가난한 유대인들의 공동체였는지도 모릅니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분명히 로마인에게 멸시를 당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멸시를 당해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가 쉽습니다.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던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보다 더 형편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받던 멸시보다 몇 갑절 더 큰 멸시를 보이기 쉽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거늘, 바울은 어찌하여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합니까?

실로 존경 혹은 공경은 그에 합당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명예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존경하라"는 말은 고위 관리(롬 13:7, 벧전 2:17)와 노예의 주인(딤전 6:1) 혹은 아내(벧전 3:7)를 향해 주어진 말입니다. 다만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공경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7). 바울도 오늘의 본문에서 모든 성도들을 존경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바울은 어떤 이유로 성도를 존경할 것을 요구합니까? 분명히 이 땅에서 태어나면서 가진 자격이나 노력으로 얻는 그 어떤 자격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모든 저주와 수치를 대신 걸머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를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과 같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에 나왔을 때, 매우 신선한 구호를 내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대통령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실 이 말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고, 대통령은 머슴입니다. 하지만 성도가 모두 왕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신하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 즉 세상 통치자의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바로 그의 우편에 앉혀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왕의 신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통치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왕으로 존경해야 합니다. 남을 왕으로 존경한다고 해서, 성도가 신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왕으로서 남도 당당히 왕으로 대접하는 겁니다.

국가 원수들이 서로 만날 때, 누가 먼저라고 할 것이 없이 악수하고 존경의 태도를 보입니다. 상대방을 보고서, "당신이 먼저 나를 국가 원수로 대접해 주어야만, 나도 당신을 국가 원수로 대접하겠다"고 벼르거나 미루지 않고,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인사하고 먼저 포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서로 먼저 공경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럴수록 자신의 모습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왕으로서 당당한 자격을 얻습니다. 제 자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실제로 얼마나 실천하는지는 저도 의심합니다. 하지만 저는 매일 기도할 때마다 진심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만나는 사람을 주님처럼 대하게 하시고,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여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이것은 우리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부탁, 아니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지켜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날로 더 풍성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