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은 흔히 그 어떤 종교를 열심히 믿는 자들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들은 생활에 뭔가 결핍되어 있는 약자들이 아니면, 사업에 실패한 인생의 낙오자들일 것이다. 아니면 이들은 아직도 자립심이 결핍되어 있어서 매사에 그 누군가를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미성숙자들이 아니면, 큰 죄책감이나 공포감 혹은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약자들일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환상이나 꿈같은 비현실적인 것에 쉽게 빠지는 몽상가들이 아니면,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뭔가 이득을 챙기려는 종교사업가의 교묘한 사기극에 순진하게 놀아나는 우매자들일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전혀 틀리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상 이런 것들이 동기가 되어 종교에 입문한 자들도 많으며, 또 지금도 그런 동기를 갖고 신앙하는 자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대개의 종교는 이런 토양에서 잘 번식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온갖 종교들이 우리 주위에서 기승을 부리나 봅니다.

하지만 내친 김에 한 발자국 나아가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이처럼 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과연 이런 특징을 전혀 갖지 않는 사람들일까요? 설사 그들이 어떤 종교행위를 실천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생활에 큰 낭패를 당하거나 사업에 실패할 때, 외로움이나 공포감 혹은 죄책감을 느낄 때, 혹은 이 땅에서 정의와 양심이 통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다반사로 경험할 때, 가끔은 그들도 막연하게나마 자신을 위로하고 정의를 세워 줄 그 누군가를 찾은 적이 있지 않을까요?

아니 비겁하게 종교 비판자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다시 종교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종교인들은 뭔가 별종인가요? 이들은 남달리 특이한 종교성을 갖고 태어나거나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사는 자들일까요? 이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어딘가 다른 속성을 갖는 별세계의 인종들일까요?

아닙니다! 이들도 똑같은 인간의 본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단지 그 뭔가가 계기가 되어 다른 것보다 종교에 더 몰두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 어떤 것에 특별히 몰두할 때가 있고, 또 그런 자유도 있지 않습니까?

 

1. 신앙은 '신뢰'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결코 남다르고 예외적인 사람들의 행동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차원은 다르더라도 매 순간마다 바로 신앙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말이 종교적인 냄새가 나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직관’이나 ‘신뢰’라는 말로 고쳐 불러 봅시다. 그렇게 본다면, 모든 사람들은 모든 행동 속에서 바로 이런 직관과 신뢰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운전’의 예를 들어봅시다. 낮에도 그렇지만 특히 어두운 밤길에 낯선 시골길을 운전하노라면, 나는 매 순간마다 직관과 신뢰에 의존합니다. 앞길은 전혀 가보지도 않았거니와 길의 안전성을 사전에 일일이 다 검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순간순간의 직관에 의존해서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이 길이 안전하리라는 신뢰(길을 놓은 사람의 진실성 혹은 이 길이 안전하다고 믿고 앞에서 운전하며 가는 사람들 등에 대한 신뢰)를 걸고 나는 운전합니다. 물론 예상 밖의 장애물이나 위험한 코스를 전혀 배제할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동차가 위험스럽다고 해서 걸어가거나 가마를 타고 다닐 수 없듯이, 길의 안전성을 100% 보장하지 못한다고 해서 운전도 포기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매 순간마다 자신의 직관이나 길에 대한 신뢰성에 모험을 걸고 앞으로 달리는 것입니다.

‘수영’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먼저 완벽한 수영강습을 받고 곧 바로 수영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경험으로 보아서는 수영은 이론 이전에 바로 물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습니다. 남들이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수영의 요령을 설명해도, 결국엔 “나 자신이 물의 부력을 신뢰하는가 아닌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매번마다 코로 물을 들이마시고 꼬꾸라지면서 스스로 떠보려고 애썼으나 번번이 허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며 직관적으로 물을 신뢰하고 나를 물에 온전히 맡긴 결과로 신비스럽게 내 몸이 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 수영의 경험은 내게는 적어도 나 자신의 수영능력이나 지능지수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신뢰의 모험이요 직관적인 확신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은 순간순간마다 직관과 신뢰의 모험에 의존합니다.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과학'에도 분명히 신앙과 같은 요소가 먼저 작용합니다. 분명히 모든 과학의 추론(이론을 이끌어 내는 작업)에는 직관적인 신앙이 선행합니다. 즉 과학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의 진리성에 대한 신앙, 자연의 일체성에 대한 신앙 그리고 추론 자체의 유효성에 대한 신앙 등은 이성 그 자체가 살아가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과학에서 이론(가설, 창의적 상상)과 관측은 상호의존적입니다. 이론과 관측은 서로 순환적 관계를 갖습니다. 그리하여 과학은 모든 관측을 포괄하는 이론을 통하여 발전합니다. 가설적 이론은 마치 전시에 적진 깊숙히 낙하하는 공수부대와도 같아서 확증된 관측이라고 하는 전차부대와 보병들이 도착하여 그 점령지를 공고히 할 때까지 그 자리를 미리 지켜 줍니다. 신앙을 선구가적 탐험가라고 한다면, 이성은 입주자며 정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과 종교는 다같이 동일한 인간행위의 두 차원이며, 그 신앙양태는 동일한 종류의 것입니다.

사정이 정녕 이러할진대, 아직도 종교적 신앙을 비과학적, 신화적 시대의 유물 정도로 취급하시지는 않겠지요? 단지 종교는 과학보다는 더욱 더 내면적이도 초월적인 영역 혹은 신비하고 거룩한 영역을 다룬다고 표방할 뿐이지, 엄밀히 따지자면, 이 세상에 내면적이고 초월적이고 신비하고 거룩한 영역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우주의 생성과정과 생명의 탄생은 얼마나 신비합니까? 어버이와 연인의 진실한 사랑은 얼마나 거룩하며 초월적입니까? 그리고 이 모두는 얼마나 은밀하고 깊은 것입니까? 아니 만물이 그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부터가 신비하지 않습니까? 왜 나는 없지 않고 존재하는 겁니까? 누가 날 존재케 했고, 죽음은 날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이런 질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찌 매 순간마다 차가운 이성만으로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저런 문제들 앞에서 마치 종교인처럼 경외감을 갖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신앙인이요 종교인이 아닙니까?

 

2. 신앙은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서 ‘이성’(인식, 이해, 지식)은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긴 해도 이성을 무시하진 않습니다. 신앙이 초이성적(超理性的)이라고 해서 반이성적(反理性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은 자신이 믿는 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신앙은 이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이성 즉 이해를 추구합니다. 이성을 희생시킨 종교는 광신이요 미신입니다. 잘 믿는 것과 눈을 딱 감고 덮어놓고 믿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다시 ‘운전’의 예를 들어봅시다. 비록 길을 운전할 때마다 나는 항상 다소 거친 비포장도로와 같은 직관과 신뢰를 먼저 앞세우지만, 직관과 신뢰가 개척한 길을 곧 바로 이성이 뒤따라 와서 든든한 포장길을 만듭니다. 달리 말하면, 나는 같은 길을 자주 운전하면 할수록 더욱 더 든든한 이성의 도움을 받습니다. 직관과 신뢰가 이성과 이해의 길을 개척한다면, 이성과 이해는 직관과 신뢰의 길을 포장합니다. 이런 상호의존의 관계는 갈수록 더욱 탄탄해집니다. 이리하여 나는 더욱 안심하고 같은 길을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도 모든 이성적 체험을 통하여 발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수영’의 예를 들어봅시다. 물을 신뢰하고 물에 뜨기 시작한 그 즉시 나는 부력의 원리를 이성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신뢰는 이성의 든든한 조력을 받아 아무리 깊은 물이라도 수영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앞으로 수영(평영)하는 원리를 터득한 후에 나는 뒤로 수영(배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때에도 물론 물에 대한 신뢰가 필요했습니다만, 이미 수영의 원리를 이해한 나로서는 신뢰의 모험이 이전보다 덜 필요했고 이성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이리하여 신뢰와 이해는 항상 수영을 동반하면서 수영의 즐거움을 더해 줍니다. 비록 이해의 폭이 날로 더 늘어가지만, 신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단지 이해와 신뢰의 순서가 좀 바뀐다거나 그 비중이 바뀔 수는 있어도, 신뢰와 이해는 영원히 함께 가는 동반자인 것입니다.

 

3. 신앙은 '고백'입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대충 배운 줄 압니다. 그러나 신앙은 단지 신뢰(인정)와 인식(이해)으로만 그치진 않습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고백’이라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옵니다. 나는 내가 신뢰하고 이해하는 그것을 남에게도 알리고 싶어합니다. 나의 기쁨도 슬픔도 남에게 알리고 싶어 합니다. 기쁨은 남에게 나눌수록 더 커지고, 슬픔은 남에게 나눌수록 더 작아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남에게 나누면서 우리의 소중한 내면을 드러내 보입니다.

다시 ‘운전’의 예로 돌아가 보실까요? 나는 앞서 운전한 수많은 사람들의 신뢰와 이성에 찬 정보(고백)를 토대로 하여 더 안전한 운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는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길에 관한 유익한 정보를 줍니다. 만약 그 길의 안정성과 쾌적함 그리고 주변의 경관이 남달리 빼어나다면, 나는 친구들과 연인에게 그 길을 알리고 함께 드라이버하길 원하며, 그래서 기쁨을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만약 이러한 기쁨을 나 혼자만 간직한다면, 나는 이기주의자일 것이며, 진정 친구와 연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못 될 것입니다.

‘수영’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영이 주는 기쁨과 건강의 유익을 아는 사람이라면, 남에게도 수영을 권하고 자신의 경험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함께 수영하는 즐거움을 맛보길 원합니다. 이처럼 좋은 일은 저절로 나누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이라는 것이 요상한 괴물이나 요술단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일상적이고도 근본적인 경험이라고 말했습니다. 설령 신앙의 대상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으로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그 대상을 신뢰(인정)하고 인식(이해)하고 고백(공유)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신앙인이요 종교인입니다. 단지 신앙의 대상과 그 가치, 그 진실성, 헌신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실의 토대 위에서 이제 다음 장으로 모험해 보실까요? 나를 신뢰하고 이해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