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앞장에서 우리는 이 세계 안에 있는 악을 제거하고 더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은총을 행하시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악을 물리치고 구원을 이루는 일에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떤 역할을 행하도록 요구받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행위,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많은 토론이 있어 왔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대립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도 대체로 세 갈래의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첫째로 펠라기우스(Pelagius)와 같은 사람은 주장하길,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났으므로, 무슨 일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우리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 자유롭게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로 우리의 행동은 그 이전의 수많은 제약과 조건들 안에서 이루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러 운명적 조건들 가운데서, 그 힘의 영향을 받아 행동합니다. 또 우리의 행동의 결과는 나중에 우리를 얽어매는 운명으로 변합니다. 더욱이 물리적인 악과 구조적인 악, 개인적인 죄악에 노출된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하물며 인간이 이러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은총을 얼마나 간절히 필요로 하겠습니까?

 둘째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루터(Luther), 칼빈(Calvin)과 같은 사람들은, 비록 제 각기 표현과 강조점을 달리 했지만, 대체로 죄악에서 구원을 받는 일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제 자신의 의지로 구원받을 수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먼저 강조한 점이나, 부패한 인간이 스스로 부패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점은 분명히 옳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도 “악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파스칼 등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개입의 결과로 회심했던 경우를 보게 되면, 은총이 죄보다 더 강하고 더 앞선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사람들은 마치 인간이 수동적인 인형이나 꼭두각시라도 되는 것처럼 종종 지나치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만을 강조한 결과로, 운명론이나 수동주의, 체념주의에 빠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셋째로 가장 무난하고 성서적인 해결책은 하나님의 은총을 먼저 강조하되(先行的 恩寵),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도 다함께 강조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암담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전혀 개입하시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헤쳐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거기에도 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변함이 없으며, 은밀하면서도 늘 현재적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신의 의지나 선택과는 전혀 무관하게 갑자기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하여 강제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의 은밀한 결단이 거기에 함께 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나무나 로보트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사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에 오른 셈이고, 신앙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라 과학이 될 따름입니다. 때로는 “모든 것이 다 나의 행위였다”고 말할 수 있고, 때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었다”라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처럼 “내가 힘써 살았지만,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행했지만, 이것은 나의 덕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였다”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 이상으로 신앙의 신비를 표현하기가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은총이 때로는 전혀 없는 듯이, 때로는 강제적인 듯이, 때로는 설득적인 듯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자유가 신비하게, 풀 수 없도록 얽혀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만약 이 둘을 다 부인한다면, 하나님의 인격성과 인간의 인격성도 다 부인하는 셈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도 인격적으로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아신 것처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어떤 순간에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먼저 우리를 어루만지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태아(胎兒)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그 스스로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기(大氣)의 품 안에 감싸여 있기 때문에 호흡할 수 있고, 그 힘을 지탱하여 나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이 떠받쳐 주기 때문에 수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 앞에 길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운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 있기 때문에, 그 품이 우리를 떠받쳐 주기 때문에, 맘껏 행동할 수 있습니다. 기차가 기차길 위에 있을 때에만 진정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부자유한 것이 아니라 진정 자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은 바로 우리의 자유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필연과 자유의 관계처럼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는 상호협력적이고 상호보완적입니다. 이런 관계를 전제로 하여, 악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협력-보완하는 일에 우리가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1. 인간은 '창조 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수동적인 인형이 아니라 능동적인 창조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땅을 경작하고 다스리는 등 문화창조와 창조적 작업을 위한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비록 인간의 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아니지만, 그리고 인간의 창조도 하나님의 창조를 모방한 것이지만, 인간은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된 창조자’로서 다른 그 어떤 피조물보다 뛰어난 지혜와 능력을 갖고서 이 땅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힘에 대항하여 인간도 싸울 수 있고, 또 싸워야 합니다.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문명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지구환경, 아니 지구라는 생명공동체를 위태롭게 하는 위기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상처난 지구를 치유하고 모든 생명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창조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창조된 창조자’로서 창조를 올바로 보존하고 갱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존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 아니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파괴하는 되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모형에 따라 ‘안식년’ 혹은 ‘희년’의 제도를 도입하여 실천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정 기간 동안 땅과 짐승까지 쉬게 함으로써, 땅의 생산력을 보호하려는 배려에서 나온 제도입니다만, 그들은 이를 잘 지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한 역사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거기로 끌려 간 것은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기 위함”(역대하 36:21)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희년’을 선포하시고 이를 실천하시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보존하고 갱신해야 할 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2. 인간은 '해방 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인간의 참여를 전제하듯이, 하나님의 해방행위도 인간의 참여를 전제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에집트로부터 탈출시키실 때에도 분명히 모세와 아론의 협력을 요구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결단과 순종, 인내도 요구하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해방자는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해방을 이루기 위하여 많은 시험과 시련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즉 해방은 하나님의 선물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행해야 할 임무로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해방을 공짜로, 수동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이루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인류가 질곡과 압제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 역사를 되돌아보면, 거기에는 숱한 투신과 희생이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방과 자유는 분명히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해방의 역사에서 간디와 링컨, 마틴 루터 킹과 로메로와 같은 영웅적 인물뿐만 아니라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사에서도 희생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4,19 의거와 6,10 항쟁, 5,18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 자유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피와 눈물로 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실까요? 희생을 통하여 얻지 않는 자유는 쉽사리 뺏길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피와 땀으로 일구어 낸 것만이 값어치가 있고, 그래서 지킬 가치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싸구려 은혜’(본회퍼)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무능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의 희생은 우리의 고난을 면제해 주는 ‘값싼 고난’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분처럼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게 하고, 정의를 위해 투신하게 함으로써,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요구하는 ‘값비싼 고난’입니다. 희망은 고난의 형태 안에서만 다가오고, 고난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그처럼 해방의 투신이 없다면, 해방의 선물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해방된 해방자’로서 하나님의 해방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구원도 상실할 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값진 자유의 가치를 방종으로 바꾸고 사회정의를 무시하며 온갖 불의를 자행하는 백성들을 엄하게 꾸짖고 심판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비유’(마태복음 25:31-46)에서 심판자인 인자(人子)는 굶주리고 목마르고 집없고 헐벗고 병들고 갇힌 이웃들을 돌보지 않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선언하십니다.

               

3. 인간은 '구원 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칭의와 성화, 영화를 위해 무엇을 행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가로, 값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稱義)을 받았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용납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납되었다는 사실을 용납해야 합니다(틸리히). “구원을 위해 인간이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하는 것도 인간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강조하면서, 구원은 인간의 참여를 완전히 배제한다고 우기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을 선물로 받아들여야 할 자유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운명 안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운명 안으로 길들여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공로가 없이,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운명도 이 운명을 수용하는 ‘믿음의 결단’이 없다면, 우리의 운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운명이란 것은 없고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결정할 인간의 자유 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믿음으로 (수동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거룩한 삶으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은 성령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제 힘으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순간 성령의 오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생활도 인간의 헌신이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오심을 긍정하고 성령을 갈구하는 것도 인간의 몫입니다. 그리고 성화(聖化)의 생활은 온전한 사랑(웨슬레), 말씀순종과 회개, 사랑의 봉사, 십자가를 지는 일(바르트)을 통해 가능합니다.

성화를 위해 우리가 매일 져야 할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영광을 받기 위해, 영화(榮化)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고난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고난이 없다면, 영광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의를 위해 핍박받을 때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고난 중에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더 큰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의 완성인 십자가는 영광으로 인도하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우리가 장차 영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고난이 폭로되고 치유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구원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마도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삶으로써, 구원의 소망을 온전히 이루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