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예수는 누구입니까?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를 창조하고 역사 속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동시에 역사의 종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 속에서 역사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이미 그 자체로서 역사(시간과 공간, 피조물의 운동)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행위였다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과 탈출, 광야 유랑, 땅의 점령 등도 바로 인간의 역사 한복판에서 역사에 개입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원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적인 은총의 행위를 가장 구체적으로,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건은 뭐니뭐니 해도 바로 ‘예수’라는 사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실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온통 이 한 분에게로 향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창조와 해방과 구원)은 바로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과 종착점만이 아니라 그 핵심에도 바로 예수가 존재합니다. ‘인류의 소망과 기쁨’(바하)도 바로 그에게 있다고 그리스도인은 믿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천년 전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라고 물었던 예수의 질문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던져진 중요한 질문입니다. 과연 예수는 누구입니까? 아니 성서는 예수를 누구라고 증언합니까?

      

1. 예수는 '참 하나님'입니다

 성서는 예수가 단지 비범한 인간만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육신이 된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를 충만히 계시하는 자(요한복음 1:14),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브리서 1:3)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인간으로 오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안에 구원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예수는 하나님의 모습, 얼굴을 띄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등장하여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즉 그는 그 이전에 그 누구도 감히 표방할 수 없었던 신적인 권위를 갖고서, 하나님 대신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동한다고 자임했습니다(죄의 용서, 악귀추방과 병자치유, 기적, 구원의 약속 등). 그래서 바로 이러한 예수의 행태와 발언은 그 당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귀신에 들린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등으로 낙인찍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그를 참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랐습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도 그를 미치광이나 사기꾼으로 비난하든지 아니면 참 하나님으로 믿든지 결단해야 합니다. 제 삼의 선택, 즉 그를 성자나 현인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만약 신적인 권위와 얼굴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자처하고 행동한 예수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는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크게 속인 희대의 사기꾼이요 미치광이나 될지언정, 어찌 성인이나 현인이 될 자격이 있겠습니까?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가치조차도 없는 자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육신이 되셨고, 화해하셨으며,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는 주장은 이성적으로 입증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중립적인 지식, 객관적인 정보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지식이요, 전인적인 결단이요, 성령의 은밀한 조명(照明)을 받은 자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신앙이 안고 있는 내용입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었을까요? 5장에서 설명한 ‘창조의 목적’과 연관시켜서 이 질문을 풀어 보십시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거울, 영광의 작품으로 창조된 피조물은 악의 세력에 의해 깨어지고 일그러지고 비틀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을 비추도록 창조된 세계는 이제 그것을 왜곡시키고 변질시켜 버립니다. 설령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죄악으로 인하여 완전히 마귀의 형상으로 바뀐 것은 아닐지라도, 이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며, 심지어는 마귀의 형상도 반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 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는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하나,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과 동물과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로마서 1:21).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3:23).

이처럼 깨어진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을 누가 다시 고칠 수 있겠습니까? 깨어진 거울이 스스로 자신을 고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오직 처음 거울을 만드신 제작자인 하나님만이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친히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깨어진 영광을 회복하시고 우리를 영광에서 더 큰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요한복음 1:14).  

2)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하나님과의 사귐의 파트너, 하나님과의 계약의 동료로 창조된 인간은 악의 세력으로 인하여 사랑을 변질시키고, 사귐을 단절시키며, 계약을 파기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신앙조차도 사귐 그 자체보다는 인간의 유익과 목적을 위해 변질시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계약을 완강하게 거절하며, 은총에 거슬리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조건없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삶보다는 조건적, 계산적, 강압적, 폭력적인 삶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 피조물(이웃과 자연)과의 사랑의 사귐을 무시와 증오와 폭력의 사귐으로 변질시킵니다. 이리하여 피조물 안에는 증오와 착취의 문화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병든 사랑, 일그러진 사귐, 파괴로 치닫는 계약을 누가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사랑의 창조자이신 하나님만이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거부와 냉대, 저항과 도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요한복음 3:16).      

3)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시고, 그래서 우리의 생명도 영원하길 바라시지만,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였으며, 죽음에 이르는 죄와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자로 창조된 피조물은 악의 세력에 사로잡혀 덧없고 허무한 노예생활을 합니다. 나뭇잎이 생명의 근원인 뿌리나 생명의 통로인 가지로부터 잘려 나가면, 잠시는 푸릇푸릇한 것 같이 보이지만, 쉬이 마르고 떨어져 부패합니다.

길을 잃은 어린 양과 같이 생명의 길을 떠난 인간이 어떻게 제힘으로 생명의 강가로 되돌아 올 수 있겠습니까? 죄악으로 인하여 죽어가는 자가 어떻게 스스로 일어나겠습니까? 오직 생명이신 하나님만이 생명을 다시 창조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포로가 된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죽음의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로부터 오신 자,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시기 위하여 인간으로 오셨습니다(요한복음 3:31, 36, 10:10).

 

2. 예수는 '참 인간'입니다

예수가 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굳이 설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범죄하지 않은 사실만을 빼면, 그는 바로 인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는 인간의 성정(性情)과 본성(本性)을 가졌습니다. 문제는 그가 인간일 뿐만이 아니라 ‘참 인간’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왜 그가 참 인간입니다. 이 질문도 7장(인간이란 무엇인가?)과 관련해서 풀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참 인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참 형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는 항상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행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분에게 전적으로 열려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아니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 친교, 사귐을 드러내고 완성한 참 인간입니다.

 2) 그는 인간에게 전적으로 열려 있는 자, ‘남을 위한 존재’(본회퍼), 인간을 위하고 인간과 함께 한 자였습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니 죽음 너머(음부)까지 인간과 동행한 자, 인간의 고통의 바닥까지 내려온 자였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자였습니다. 그는 인간들 간의 온전한 일치, 사랑, 연대성을 드러내고 완성한 참 인간입니다.

 3) 그는 만물(우주)과의 사귐도 온전히 실현한 자입니다. 그는 창조 만물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자연을 비유로 삼아 자연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물질의 소중함과 나눔도 알았으며, 물질과 온전히 교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변형시키고 병든 자연을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청지기적 자세를 보여 주었으며, 자연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자연과의 온전한 사귐을 드러내고 완성한 참 인간입니다.

 

3. 예수는 '참 하나님과 참 인간'입니다

예수를 한 인간, 진실한 인간, 인간다운 인간으로 믿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문학작품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즐겨 그려왔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를 참 하나님으로 믿기란 인간으로서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도마와 같은 사람도 부활한 그를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확인할 때까지는 끝끝내 예수를 신앙의 주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했습니다. 그를 보지 않고도 신앙의 주, 참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은총,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인인 우리에게 참으로 믿기가 어려운 점은 예수가 참 하나님이면서도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신앙입니다. 어떻게 두 주체가 한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변화하지 않고도 인간 안에서 하나님으로 머물러 있을 수가 있고,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어려운 문제를 놓고 고대 교회는 뜨거운 논쟁을 벌려 왔고, 이단이라는 많은 교설들이 생겨났습니다.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이라는 교리(兩性論)는 수학적으로 풀 수 없는 신앙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아무리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고 논리가 정교해도, 이 신비를 완전히 해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날에도 여전히 신앙고백의 대상이요, 경배와 찬양의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이 역설적인 교리를 수호한 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 때문입니다. 즉 만약 예수가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간인 그가 멸망에 빠진 똑같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며, 만약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은 예수 안에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두 주체 혹은 두 본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되었는지는 매우 어려운 논리를 필요로 했습니다. 여하튼 두 본성이 변질되거나 혼합되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는 논리는 인간의 이성으로서 쉽게 풀기 어려운 논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의 쉬운 예를 듭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용광로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글거리는 쇳덩어리입니다. 이것은 불과 쇠가 완전히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불이 쇠로 변질된 것도 아니고, 쇠가 불로 변질된 것도 아니면서도, 이 두 요소는 완전히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도 두 본성, 즉 하나님과 인간이 이처럼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화는 매우 그럴 듯하지만, 살아 있는 인격적인 예수를 이처럼 물건에 비유하는 것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지식하게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인간의 언어로 풀려고 하기보다는 지금은 그를 희미하게 알지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그날을 갈구하며, 늘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늘 새롭게 만나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항상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