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강: 예수는 무슨 일을 합니까?

  

앞장에서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단지 위대한 인간, 인류의 스승, 성현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자, 즉 하나님과 같은 자, 참 하나님으로도 신앙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즉 예수는 인간 앞에서 참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요, 하나님 앞에서 참 인간을 대변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 안으로 오신 참 하나님이요,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낸 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서는 그가 단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자만이 아니라 만물의 화해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추상적인 표현만으로 예수를 파악하기는 너무나 모호하고 미흡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가 앞에 놓고 이렇게 저렇게 묘사할 수 있는 정적인 물체가 아니라,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움직이는 대상처럼 살아 있는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나 인간 등에 대해서와 꼭 마찬가지로 예수에 대해서도 그가 행한 일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인격, 존재는 바로 그의 임무, 활동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임무를 행하는 자일까요? 그가 어떤 신분으로 살고 행동하고 죽었을까요? 비록 그의 활동과 신분을 몇 가지로 요약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만, 신학자들은 대체로 그의 신분 혹은 임무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1. 예수는 '예언자'의 일을 합니다

 예수는 현저히 예언자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숱한 옛 예언자들처럼 그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일을 자신의 주요 임무로 삼았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소명) 혹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이 위탁하셨다고 확신하는 말씀을 목숨을 걸고 선포합니다. 예수는 30여년 간의 사생활과 광야의 시험기간을 거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로 등장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자신이 친히 가르친 기도문에서 말했듯이,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존재)이 온 땅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온 땅에 실현되는 것, 하나님의 뜻(마태의 표현)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통치, 주권)는 그가 먼저 구하고 두드리고 찾았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촉구한, 절대적이고도 유일무이한 헌신대상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 뜻대로 하나님이 왕(임금)으로 통치하신다는 말입니다. 옛적에 왕이 한 나라를 다스릴 때, 왕의 권한은 절대적이고 막강했습니다, 그는 백성의 행복만이 아니라 생명도 주고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전권을 휘둘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인간과 만물을 다스리는 유일무이한 전능한 왕, 통치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종종 하나님의 나라를 왕(임금)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처럼 왕과 같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에, 다른 왕(재물, 권력, 세상명예 등)을 섬기거나 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돌이켜서(회개하여)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예수는 가르쳤습니다. 오로지 이 나라의 백성이 될 때에만, 우리는 정의롭고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받아들인 자에게는 사죄와 영생, 축복과 평화가 선물로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닮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탁월하게 다른 점도 갖고 있습니다. 즉 옛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혹은 가까운 미래에 올 것이라고 예고하고 열망하면서 이를 미리 가리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예수는 그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고 현재적인 성취의 열정 속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저 멀리 어디엔가 있거나, 손에 잡힐 듯 안 잡힐 듯 모호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이미 우리 가운데 왔고 자라고 있으며, 실로 무르익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모습으로, 땅 속에 묻힌 보물이나 바다 속의 고기와 같이 우리 주위에서 이미 존재하며 활동하기 시작하고 있으니, 속히 결단하고 이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수가 옛 예언자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은 그 나라가 예수의 인격 안에서, 그의 활동과 운명 안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격으로 온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구체화되고 실현됩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말하는 전령(傳令)일 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그 소식입니다. 그의 행동, 특히 죄인의 용서(하나님의 권한)와 치유, 기적과 악귀추방, 죄인들과의 식탁사귐, 예루살렘 입성(왕의 등극), 마지막 만찬(천국잔치의 예시)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장차 있을 영광 중의 재림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안에서, 예수의 모습과 인격으로 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는가 아닌가”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단지 선포하는 예언자만이 아니라 성취하고 실현하는 예언자입니다. 아니 그는 단지 스승과 예언자, 종교 지도자의 권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대변하는 자이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탁월한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예수만이 인류의 소망과 기쁨이며, 인류를 온갖 거짓과 기만에서 구원해 줄 참 예언자, 인류의 빛, 진리의 증인입니다.    

 

2. 예수는 '제사장'의 일을 합니다  

예수는 예언자일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지고 죽은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이면서, 동시에 친히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바친 대제사장(히브리서 9:11-12, 28)입니다. 예수가 인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영광과 사랑과 생명이 충만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이를 깨닫지 못했고,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요한복음 1:5, 11). 아니 어둠은 빛을 미워하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는 자기의 땅에 왔지만 마치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았고, 끝내는 자기 땅에서 자기 백성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활동의 초기부터 의(義)로 인하여 박해받을 것을 각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아니 바로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미 예수의 탄생 자체가 하나님의 자기포기, 자기희생의 첫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탄생할 때 많은 갓난아기가 죽임을 당한 것도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과 권능 중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덮개 아래서, 고난의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의 생애도 바로 고난과 가난의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낮추셨고 권능을 비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옛 왕조시대의 많은 왕들처럼 무력으로 인간을 복종시키셨다고 한다면, 인간의 몸은 정복하실 수는 있었겠지만 인간의 영혼은 지배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무력의 방법은 인간을 참으로 구원할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배와 정복의 길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강요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견딥니다. 사랑은 악을 이깁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보복하고 인간의 복종을 강요하기보다는 인간의 고통을 지는 길을 택하심으로써, 영원한 사랑의 승리를 가져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희생당하심으로써 승리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범한 죄는 비단 죄를 범한 자에게만이 아니라 피해자에게도 크나큰 상처를 남깁니다. 가해자는 죄책감을 갖고, 피해자는 보복심을 갖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상실합니다. 만약 누군가 죄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죄의 파멸적인 힘은 악순환 속에서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은 희생과 상처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가해자의 죄책은 해결되어야 하고, 그는 용서받아야 합니다. 피해자의 보복은 억제되어야 하고, 그의 상처도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속죄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구원한답시고 인간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비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죄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같이 가해자요 피해자인 인간이 죄인인 인간을 구원할 도리는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하고 하나님과 화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도 용서와 화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성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성전에 나아가 속죄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이 제도를 창안한 자는 하나님이었고, 인간의 사죄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준 자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처럼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속죄제물을 하나님에게 갖다 바쳤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과 능동적으로 화해하신 분이지, 인간이 바친 제물 때문에 마음이 돌아서서 인간과 화해되신 분이 아닙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화목제물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화해되는 분이 아니라 화해하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친히 인류의 고난의 짐을 지심으로써,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1서 4:10).

그의 희생적인 죽음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대신하여 친히 자신을 제물로 삼은 거룩한 제사장의 죽음입니다. 그는 ‘심판당한 심판자’(K. Barth)로서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교만과 타락에 빠진 인간을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해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들 간에도 화해와 평화의 길을 터놓은 제사장입니다.

      

3. 예수는 '왕'의 일을 합니다  

예수를 왕이라고 부를 때, 앞에서 말한 대로 그의 통치가 무력과 정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왔습니다. 그는 정의와 사랑이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정의와 사랑 가운데서 편만해진다는 것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인격으로 온 그 자신이 바로 정의와 사랑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은 평화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도, 그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무장한 군인을 통솔하고 진군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평화의 왕의 모습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는 로마가 무력통치로써 이룩하려다가 실패한 평화(Pax Romana)를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이룩하였습니다. 그가 가는 곳곳마다, 그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그의 의와 사랑이 지배합니다(Pax Christi). 왜냐하면 그는 세상이 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며, 바로 그리함으로써 폭력과 억압을 행사하는 악한 제도와 권력에 맞서 저항할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아부하는 자는 잠시는 잘 사는 것같지만 결국에는 악의 종으로서 멸망합니다. 악에 대해 침묵하는 자는 잠시는 평안한 것같지만 양심과 하나님의 문책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악에 맞서서 저항하는 자는 쉽사리 악의 폭압적인 희생물이 됩니다. 이로써 그는 악의 실체를 드러내고 폭로하지만, 만인 앞에서 실패하는 자처럼 죽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희생은 결국에는 악한 자를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기는 힘이 되고, 급기야는 악한 자까지도 구원하는 대속적 희생이 됨으로써, 바로 악에 이기는 승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숱한 의인의 죽음처럼 예수의 죽음도 바로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불의는 정의를 영원히 이기지 못하며, 악한 자는 희생자의 무덤 위에서 영원히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최후의 원수인 죽음으로부터 부활함으로써, 예수는 죽음마저 영원히 정복한 진정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강력한 왕도 죽음을 다스리지는 못했습니다. 진시황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죽인 생명의 주님, 왕 중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를 따르고 믿는 자들도 영원히 사는 왕적인 인간이 됩니다. 나태와 비참 가운데 있는 거지와 같은 인간이 왕과 같이 존엄하고 거룩한 자로 변모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통치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적인 통치는 이 세상에서는 아직 다 성취되지 않았고, 아직은 여전히 실패의 그늘 아래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다시 올 때면, 그는 온 세계의 왕으로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그의 자녀들은 그의 손에 이끌려 영광에서 영광으로, 빛에서 빛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모두가 주인이 되고 모두가 형제자매가 되는 그런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예수는 지금도 평화의 왕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와 심판자로서 진정 만물의 왕, 왕 중의 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