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강: 종말은 어떻게 옵니까?

 

 이제 우리는 조직신학 강좌의 마지막 주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제 우주와 인생의 종말을 생각해 보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종말은 이처럼 늘 마지막에 가서야 생각할 필요가 있는 주제일까요? 물론 종말이 오기도 전에 미리 겁먹고 불안하게 살 필요는 없겠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철학자(스피노자)처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은 동물처럼 맹목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인류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주의 역사를 생각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우주 안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종말이나 미래의 문제는 그야말로 나중에 가서야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로 인간은 평안하든 불안하든 상관없이 늘 미래를 생각합니다. 하물며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문명이 위기에 이르게 되면, 얼마나 자주 종말을 생각하겠습니까? 더욱이 우리의 미래가 이전보다 더 불확실해지고, 자연의 파괴가 가속도로 증가하는 오늘 날에 온갖 종류의 종말론이 유행하는 것을 볼 때, 올바른 종말관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시한부 종말론’이 한국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를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아예 종말론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도 “그런 소동이 언제 있었느냐?”라는 듯이 종말론에 무관심해져 버렸습니다. 교회조차 이러한 태도를 보이다가는, 또 언제 사이비 종말론이 일어나 사회와 교회를 흔들어 놓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강한 종말론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생겨났고, 그래서 어느 종교보다 더 강하게 종말론을 신앙과 생활의 근거와 목표, 활력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종말론(묵시문학)은 그리스도교의 어머니이다”는 케제만의 말은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참으로 그리고 철저히 종말론이 아닌 그리스도교는 전적으로, 참으로 그리고 철저히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 칼 바르트의 주장은 옳습니다. 종말론은 올바른 신학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입니다(몰트만). 교회가 ‘믿음으로 인한 의(義)’ 때문에 서고 넘어진다면(루터), 믿음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의(義)’ 때문에 서고 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종말론은 그리스도교의 운명 전체가 달려 있는 중요한 초석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는 왜 종말을 신앙하게 되었으며, 종말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1. 첫째는 '창조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성서는 단지 개개인과 한 민족의 운명에 관해서만 말하지 않고, 창조와 역사의 기원과 의미, 목표를 가르칩니다. 성서적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나 다른 권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계획과 목적을 가지신 전능한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래서 우주 만물은 맹목적인 우연에 내맡겨져 있지 않으며, 다른 신들이나 영웅적 인간들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또한 성서는 역사를 인간이나 다른 신들의 놀이마당으로 보지 않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장(場), 무대로 보았습니다. 역사의 힘과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攝理) 안에 있기에, 이 뜻을 잘 파악하고 이에 올바로 응답할 때에만, 인류는 복과 영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은 왕이시다" 혹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신약성서에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천국)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신앙을 가장 잘 요약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서에 나타나는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유일절대적인 주권을 믿고, 경험하며,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종종 실제적 경험과 어긋나기가 쉬웠습니다. 특히 정의가 짓밟혀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고, 경건한 사람들이 불경한 사람들에게 온갖 고난을 겪어도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세의 침략과 포로생활 등으로 집단적인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친히 역사에 들어오셔서 정의와 진실로 심판하시길 갈구했습니다.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시편 96: 13).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강대국 바벨론을 잡혀가서 포로생활을 할 때, 그리고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여 기적적으로 고국으로 돌아올 때,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온 백성과 우주 전체에 완전한 평화와 정의를 수립하시고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고대하고, 이를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리하여 포로기 전후로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서 종말론적인 신앙이 크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스라엘의 고난이 더욱 더 커져감에 따라 종말에 대한 희망은 극도로 팽배하였고, 그래서 온갖 종류의 종말론적인 문헌(묵시문학)과 해방운동이 생겨나기에 이르렀습니다.    

 

2. 둘째는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렇게 종말론적 신앙이 확산되는 가운데 몇몇 예언자들은 장차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임을 믿고, 그의 오심을 선포했습니다. 물론 모든 예언자들이 다같이 하나님을 대리하여 통치할 이상적인 메시야를 기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의 역할을 했던 옛 왕이나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이제는 하나님이 친히 왕으로 다스릴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와 같은 예언자는 메시야가 올 것임을 힘차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政事)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無窮)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自今) 이후 영원토록 공평(公平)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 9:6-7).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이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자일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격 안에서 이 나라를 가져온 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와서, "당신이 바로 장차 오실 그 자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도, 예수는 기적과 복음선포의 사실을 증거로 들어 이를 시인했습니다.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마태복음 11:2-5)은 바로 종말에나 이루어질 사건이 현재 안으로 돌입해 들어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종말적인 사건이 가장 생생하게 일어난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단지 한 인간에게 일어난 우연한 기적이 아니라, 종말에 있으리라고 예언된 '만인의 부활'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린도전서 15:21)라고 했습니다. 만인의 부활은 예수의 재림 때에야 비로소 일어나지만, 예수의 부활은 이를 미리 예시(豫示)하고 입증한 종말의 징조(徵兆)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셋째는 희망의 영, 성령' 때문입니다

 종말은 하나님의 역사개입, 그의 아들 메시야의 활동을 통해 일어나지만, 성령의 활동이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서도 그렇거니와, 종말사건 가운데서도 삼위 하나님은 함께 활동하십니다. 이미 말했듯이, 성령은 창조와 해방, 구원의 사건 가운데서 활동합니다. 그러나 특히 만물의 회복과 갱신을 가져다 주는 영인 성령은 마지막 시대에 강력히 활동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힘차게 증거하고, 또 이를 앞당겼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악귀를 추방한 것은 바로 하늘의 악한 권세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태복음 12:28).

특히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살리는 영'인 성령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종말적인 사건의 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부활한 그리스도가 약속한 대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성령강림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베드로는 구약성서의 예언자 요엘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특별한 활동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靈)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사도행전 2:17-18).

 

장차 종말이 이루어지면, 인류와 우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성서는 여러 가지 사건을 말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들라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정의와 진실로 심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날을 '주의 날' 혹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이 날은 바로 '예수의 재림의 날'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시는 분, 아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지만, 시간 안에서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미래로부터 오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생각되지만, 하나님 앞의 우리의 시간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즉 하나님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들어오는 '미래의 힘'입니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시고, 그리고 언젠가 완전히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이미 오셨기에, 또 장차 오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은' 다 오지 않았으나 '이미' 가까이 온 종말론적 시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예수의 초림(初臨)과 재림(再臨) 사이의 시간, '중간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만, 주의 재림은 언제라도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우리는 늘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이에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종말 앞에 서 있습니다.

 2) 마지막 심판과 영생: 그리스도인들이 오래 전부터 고백해 온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종말은 만물의 최종적인 심판으로서 다가옵니다. 이것은 만물이 무르익을 때, 농부가 이를 거두기 위해 추수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인간이 삶이 이생뿐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참되게 사는 것이 아니라면, 잘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면, 참 되게 사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약 영생이 없다면, 올바르고 참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 헛되게 사는 셈이고, 속고 사는 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만약 악한 자의 죄악이 죽음으로 다 사라진다면, 그에게 죽음은 피난처가 되고, 실로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더 이상 죽은 자를 심판하지 못하고, 악인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시는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 되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죽음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3) 새 창조: 요한은 밧모 섬에서 새 창조에 관한 거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요한계시록 21:3 - 5).

그리고 그는 새 세계의 여명 안에 있는 옛 세계의 종말을 보았습니다. 세계의 종말은 새로운 영생의 날입니다. 첫 창조처럼 만물의 새 창조도 흑암을 몰아내는 빛과 함께 시작합니다. 새 창조는 영원의 서광이요, 영속하는 창조, 끝없는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빛은 창조물을 비추고, 모든 생명체들을 따스하게 만들며, 그것들을 하나님의 활력으로 채웁니다. 그의 영원한 임재는 죽음이 갈라놓았던 것을 합쳐 놓습니다. 그리하여 창조물로부터 죽음, 흑암, 차가움과 혼돈이 사라져 버립니다. 인간과 동물, 땅 위의 피조물과 하늘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공동거처에서 이웃이 되고 한 식구가 됩니다(몰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