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아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을 남달리 구별하는 특징은 무엇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여러분을 대할 때마다, 그들이 어떻게 여러분을 평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니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어떠한 의식과 특징을 지니고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러분의 모습과 인격 혹은 생활이 그들에게 어떻게 비취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참으로 여러분을 무신론자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과도 구분하는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점에 관해서 물론 사람들마다 견해가 엇갈리겠지만, 나는 모름지기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믿고, 바라며,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는 앞으로 자주 상세히 다룰 예정이니 일단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서 볼 수 있는 정신적 혹은 심리적(주관적) 특징인 ‘신앙과 소망과 사랑’을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 가지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 ”(고린도전서 13:13).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하여 다시금 옛 조상들이 물건을 나를 때 사용하던 ‘달구지’를 비유로 들어 보겠습니다. 달구지는 뭔가를 실어 나르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나 달구지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것을 끌어 줄 소나 말과 같은 짐승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달구지와 짐승과 물건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며 서로 도와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바로 이 세 요소와 비교할 수 있는 것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신앙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신앙은 수레에 비유될 수 있고, 소망은 짐승에 비유될 수 있으며, 사랑은 물건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신앙은 달구지에 비유된다고 했는데, 달구지는 그 자체로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달구지를 끌어 줄 짐승이 필요하듯이, 신앙도 자신을 끌어 줄 힘을 필요로 합니다. 이 힘을 우리는 ‘소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짐승이 없다면 달구지를 끌 수가 없듯이, 소망이 없다면 신앙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소망은 신앙을 끌어가면서 신앙이 지치지 않도록 하고, 좌절하지 않도록 하고, 주저앉지 않도록 하며, 신앙에게 늘 힘을 공급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소망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다운 점은 무엇보다도 이 소망에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바로 소망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종교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만큼 이 세상 한가운데서 고통의 문제를 극복하는 희망에 대하여 줄기차게 증언하는 종교는 드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생겨난 환경이 다른 종교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 예컨대 불교나 도교 등은 농경문화권에서 자연의 원리로부터 터득된 종교입니다. 석가는 “만물이 돌고 돈다”는 윤회(輪廻)의 법칙을 가르쳤고, 노자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살라”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개척하려는 삶보다는 자연의 원리나 운명에 맡겨 사는 삶의 태도를 가지며, 잘못된 역사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역사의 변화에 초연하거나 이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에 참여하려는 생각이나 역사의 미래에 희망을 거는 신앙은 이런 종교로부터 생겨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어떠합니까?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즉 세상이 저절로 잘 되어 갈 거라든지, 인간은 항상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아무 때나 희희낙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비관주의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인생살이가 암담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버리고 딴 세상으로 도망가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곧 망할 것이다. 그러니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나서 어서 다른 세상으로 갑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세상이 암울하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철저히 심판하실지라도, 하나님은 결국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까지 보내 주셨고,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희망의 하나님을 믿기에, 철저히 이 세계의 미래를 희망합니다.

요한이 환상 중에 기록한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십시오. 비록 사탄이 온통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사탄을 정복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하늘나라로 데려 가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만을 철저히 희망하지만, 희망이 다른 세계(피안)에서야 비로소 성취될 것이라고 믿지 않고, 희망이 이 세계 안으로 들어와 이 세계 안에서 성취될 것을 기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의 신앙경험에서 발전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은 유목생활 중에서 길을 인도하시며 미래의 땅을 약속하시는 ‘희망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탈출, 족장들의 유랑, 에집트 노예생활로부터의 탈출, 광야의 유랑생활, 이스라엘의 멸망과 메시야 기대,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의 복음, 그의 부활과 재림 등은 바로 이 세계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희망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역사 안에서 희망을 일으키는 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할 이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특징은 무엇보다도 이 희망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에서는 악습과 절망, 억압과 미개를 타파하는 희망도 항상 전파되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소망이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소망 그 자체는 내용이 없이 공허합니다. 왜냐하면 소망은 미래의 힘, 삶의 원동력이지, 삶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이며,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사람은 모름지기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소망은 사랑을 끌어가는 힘이요, 신앙은 사랑을 싣는 수레입니다. 그러므로 소망과 신앙은 사랑에 봉사하는 종이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바울이 “사랑이 제일이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레나 짐승이 필요한 것은 바로 짐 때문입니다. 목적지(천국)에 도달할 때까지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짐(사랑)이며, 목적지에 도착하면, 짐승(희망)이나 수레(신앙)는 내버려두고 주인(하나님)에게 짐(사랑)만을 넘겨 줄 따름입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충만한 곳입니다. 지옥이 무엇입니까? 미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이지, 신앙이나 희망이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의 비유(마태복음 25장)를 읽어 보십시오. 장차 심판자로 오실 예수님은 오직 사랑의 열매만을 찾으십니다. 신앙만이 목적인 양 살아온 사람들(입으로만 주의 이름을 부른 사람들)과 사랑의 열매가 없는 공허한 희망에 빠진 사람들(주의 이름으로 기적은 행하지만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낭패를 당합니다. 그래서 지금이나 나중이나 사랑만이 제일 소중합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입니다. 가장 큰 은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8).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온갖 아름다운 언어로써 사랑을 여러모로 찬양했지만, “사랑은 끌어당기고 모으고 살리고 연합하는 힘이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흩어진 온갖 질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물론 인간의 마음에도 우주 안에도 남을 깨뜨리고 배척하는 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힘들도 실제로는 다른 그 무엇과 연결되어 있고, 크게 보면 잠시나마 우주의 안정과 통합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죽음과 파괴, 미움이 없는 온전한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미움과 파괴조차도 사랑의 힘으로 끌어안고서 사랑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미움을 끌어안고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악을 극복하기 위하여 악을 지고 견딥니다. 즉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악이 선으로 변화될 날을 고대합니다. 즉 사랑은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보십시오! 그분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 위하여 악을 지고 견디고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부활의 승리, 아니 사랑의 승리가 밝아 왔습니다. 그래서 가장 참혹한 실패와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조차도 이제 그리스도인에게는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승리!

 

 3.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사람입니다

 소망은 수레를 끄는 짐승에 비유되고, 사랑은 수레가 싣고 가는 짐에 비유된다면, 신앙은 수레에 비유된다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소망이 없이는 신앙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듯이, 신앙이 없이는 사랑을 태우고 갈 수레가 없는 셈이 됩니다. 만약 신앙이 없다면, 미래를 희망할 수도 없습니다. 즉 수레(신앙)가 없다면, 수레를 끌어 줄 자(소망)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신앙이 없다면, 사랑도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즉 수레(신앙)가 없다면, 누가 짐(사랑)을 운반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빈 깡통이 요란하고, 짐을 싣지 않는 수레가 시끄럽듯이, 사랑이 없는 신앙은 요란하고 시끄러울 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반대로 깡통이 없이는 음식을 담을 수 없고, 수레가 없이는 짐을 싣고 나를 수 없듯이, 신앙이 없이는 사랑을 담을 수도 없고 실어 나를 수도 없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신앙은 사랑의 꾸러미요, 사랑은 신앙의 내용물입니다. 혹은 신앙은 사랑의 뿌리요, 사랑은 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대적 신앙의 대상을 흔히 ‘신’(神)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신(神)’이란 무엇을 일컫는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 궁극적인 신뢰를 걸고 있는 대상, 온 뜻과 마음과 생명과 정성을 다 바쳐 섬기는 대상을 일컫는 용어 혹은 상징입니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종교는 이 대상을 주로 비인격적인 원리로 생각하고(法, 道),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이 대상을 주로 인격적인 헌신의 목표로 생각합니다(야훼 하나님, 알라 신). 그렇지만 모든 종교가 다같이 이 대상을 궁극적인 신뢰, 신앙, 의지, 헌신의 대상으로 여기는 한, 우리는 이 대상을 ‘신’(神)이라는 상징으로 통일해서 칭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 신(하나님, 천주님, 주님)은 창조와 역사와 인생의 궁극적 원인과 토대, 목표로 신앙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신뢰하고 인식하고 고백합니다. 비록 사람이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고백하더라도, 신앙의 출발점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게 있다고 그리스도인은 고백합니다. 그분은 신앙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으로서 신앙의 근거이면서 신앙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물이 있기에 나는 그 물을 의지해서 수영하려고 합니다. 수레가 있기에 나는 나의 짐(사랑, 염려)을 그 위에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토대요 반석이신 그분 안에서 감사히 살고, 사랑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여, 소망과 사랑과 신앙의 원리를 살펴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더 말하자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모름지기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소망하고 사랑하고 신앙하면서, 아무리 힘겹고 고달프더라도, 그분이 요구하신 진리와 사랑의 길을 끝날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은 절망의 밤중에 빛나는 소망의 별이요, 미움의 얼음장을 녹이는 사랑의 불꽃이요, 불신앙의 공격에도 깨어지지 않는 신앙의 반석입니다. 신앙과 소망과 사랑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언제나 사라지지 않고 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