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신앙하는 것은 분명히 평범한 일상적 사건이나 사실 혹은 인물에 대한 확신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신앙하는 사람은 분명히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삶의 가치와 의미, 행복과 목표를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은 절대적 헌신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의 신앙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결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사로잡고 결정짓는 운명적인 요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제 삶의 가장 확고한 근거 위에 서 있고 가장 영원한 가치를 소유하고 있으며 가장 궁극적인 목표를 추구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 같지만 가장 강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 각기 서로 다른 종류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들마다 그 특징이 서로 다릅니다. 특히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유일신(야훼, 알라)을 믿는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유일신을 섬기는 앞의 두 종교는 두드러지게 가부장적-남성적인 특징을 지니는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남성적인 아버지의 모습만이 아니라 여성적인 성령의 모습도 지니고 계시며,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인간의 친구, 형제-자매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신으로 믿는 종교(범신론적 종교)는 대체로 모성적인 신을 섬깁니다. 즉 땅은 생명의 어머니로서 거룩한 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과 분명히 다른 모습의 삶을 살겠지만,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모습도 각양각색과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인을 다른 다른 종교인과 구분시켜 주는 결정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확정하고 지키기 위하여 교회는 수 세기 동안 매우 큰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사활이 바로 이 진리에 걸려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단지 ‘한 분의 하나님’(一神論)이나 ‘세 분의 하나님’(三神論)으로 믿지 않고 ‘세 가지 존재양식(存在樣式), 위격(位格), 주체(主體)로 존재하시는 한 분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결코 신비한 수학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어째서 1 = 3이고, 3 = 1이냐?”라고 질문하면서, 이를 수학적으로 풀어보려고 끙끙댑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기하학적으로 풀어 보려고도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신비를 풀어 보려고 종종 세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비유(比喩)를 끌어오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설명들은 종종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이론과 흡사할 때도 많습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의 공격 앞에서 당황하거나, 삼위일체를 잘 설명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상당히 잘못된 이론을 정통인 줄 알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장 흔한 예는 ‘물’이 고체(固體)와 액체(液體)와 기체(氣體)라는 세 가지 형태로 변하는 것에 비유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한 물질이 상태에 따라 세 가지의 형태를 달리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실상은 세 물질(三位)이 아니라 세번 변하는 한 물질(一位)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설명은 로봇과 비행기와 탱크로 세번 변신하는 어린이 장난감(變身論)보다는 나은 예이지만, 이단으로 결정된 양태론(樣態論: 한 하나님이 세 가지 양태로 변함)과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 남자가 아버지와 남편과 형 등의 ‘역할’을 하는 것에 빗대어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남자는 어디까지나 한 주체로 머물러 있으면서 세 역할만을 하기 때문에, 이것은 세 역할론(役割論)이지 삼위일체와 전혀 상관없고, 물의 예보다도 훨씬 더 잘못된 설명입니다. 또 우리는 흔히 태양과 빛과 열을 예로 듭니다만, 이것도 적절한 예가 되기 어렵습니다. 이 세 가지를 따로 떼어서 생각한다면, 태양은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빛도 태양입니까? 열도 태양입니까? 빛과 열이 없는 태양도 태양일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삼분론(三分論)입니다. 또 어떤 선교사가 다른 미개한 인종에게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 잎 클로버’를 따서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보다는 나은 설명이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세 잎은 다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주체도 아닐 뿐더러 서로 다른 특징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 잎 클로버나 네 잎 클로버나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삼위일체는 서로 다른 세 신적인 주체가 한 하나님을 이루시는 ‘사귐’(코이노니아)을 표현합니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 한 본질을 이루는 분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하나님을 남성적인 모습으로 신앙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실 만큼 권능 있는 분, 자신의 뜻(말씀, 율법, 계명)을 세우시고 심판하시는 왕적인 분, 백성을 선택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주님 등의 모습으로 신앙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 위(앞)에’ 계신 거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특히 예배와 순종하는 생활 등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은 '성령'입니다.

 하나님을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남성적-부성적인 아버지의 상과는 달리 여성적-모성적인 하나님의 상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천지창조 때에 마치 어머니가 생명을 품고 잉태하듯이 만물을 껴안으면서 창조 가운데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영, 생명을 낳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영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위로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위로자)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특히 중생과 성화와 소명, 치유 등 삶의 갱신(更新)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3. 셋째로 하나님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것은 물론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아빠)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아빠)로만이 아니라 친구로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좋은 친구입니다(요한복음 15장). 아들 하나님은 천지창조 때에 지혜와 로고스(말씀)로서 협동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 중보자로서 ‘우리 곁에’ 오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특히 고난과 기도 중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친구와 같은 아들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성(性)을 갖는 분처럼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물건처럼 중성적인 분도 아닙니다. 그분은 인격적인 분으로서 분명히 인간의 속성에 참여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심으로써 친히 자신의 속성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남성, 여성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또 이 두 성의 구분과 차이를 초월하는 분(친구)으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버지-어머니-자녀과 같이 조화로운 가족 공동체의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 가지 속성 가운데서 완전한 사귐을 이루시는 공동체적 하나님(Barth), 사회적 하나님(Moltmann)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사랑하시는 분이요, 아들로서 사랑받으시는 분이요, 성령(사랑의 끈)을 통해 서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Augustinus). 이처럼 하나님은 자유롭고 평등하면서도 함께 사귀고 나누고 참여하고 개방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결코 오만방자(傲慢放恣)한 독재자도 아니고,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이기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사랑하시며 모든 생명과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완전한 사귐(공동체), 사랑의 화신(化身)으로서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 주체 혹은 세 위격(三位), 즉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한 하나님(一位)일 수가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본인은 앞에서 여러 예나 비유가 삼위일체를 잘못 표현하거나,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려야 할까요?

하나님의 존재 증명도 그렇거니와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대해서도 완벽한 이성적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증명하고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찬양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신비는 어디까지나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철저히 증명되고 설명된 신비는 더 이상 신비도 아니며, 더욱이 신앙의 신비, 하나님의 신비도 아닙니다. 그런 신비를 우리는 두려움 가운데서 경외할 수도 없고, 경외 가운데서 찬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성이 하나님의 존재와 존재양식을 다 밝혀 주진 못하지만, 신앙이 믿는 내용을 설명하려고 애쓸 수 있고, 또 이해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 설명이 완벽한 것이라고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이성은 신앙의 훌륭한 후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소 무리가 있지만,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연상해 보는 것이 나는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가난한 시절에 여성들이 자주 짜던 ‘손뜨질’이나 ‘손매듭’을 생각해 보십시오. 뜨개질이나 매듭을 짜는 목적은 아름다운 무늬로 이루어진 옷이나 작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늬의 모습은 사람의 기술과 기호, 디자인에 따라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이 서로 연결되어 감에 따라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이처럼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한 뜨개질이나 매듭작품 속의 서로 독특하며 서로 다른 무늬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 하나님은 서로 연결되는 여러 가닥의 실을 통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신앙하고 소망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분명히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나는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모습도 각양각색과 천차만별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유 안에서 사랑의 신비한 사귐을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진정코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들은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거나 남을 무시하거나 지배하지 말고, 함께 모든 것을 나누고 누리면서, 서로 사귀고 섬기면서, 행복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음으로써만, 인간들의 삶도 역시 행복할 수가 있고 영원할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은 우리가 경배해야 할 하늘의 신비한 비밀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