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창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특히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지된 물체를 사진으로 찍듯이, 혹은 정물화를 그리듯이, 마치 하나님이 아무런 활동을 하시지 않는 듯이, 하나의 정지된 대상처럼 그분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무릇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활동을 통하여서만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그 활동으로부터만 그 존재의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누구시냐?”의 물음도 오로지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느냐?”로부터만 대답될 수 있습니다. 사실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도 마치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통해 관찰하듯이 골똘히 연구한 결과로 나온 이론도 아니며, 골방 깊숙한 곳에서 기도하는 중에 경험한 신비한 환상을 통하여 터득한 이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고백한 내용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제일 먼저 행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창조행위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첫마디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며,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라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곧장 창조하시는 분으로서 등장하신다는 것과 이러한 창조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알리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공공연히 고백합니다.

나는 앞에서 이미 “존재는 활동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창조는 바로 하나님의 존재의 최초의 드러남(계시)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면에서 창조는 하나님의 모습을 꼭 빼어 닮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효석(李孝石) 씨가 지은 소설 중에 ‘발가락이 닮았다’가 있습니다. 여기서 아내의 행실을 의심하는 남자 주인공이 아내가 낳은 아기를 보고서, 혹시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면 어떻하나 염려하는 나머지 아기의 모습을 구석구석 살피다가 “발가락이 닮았다”는 우스운 말을 하는 것을 읽게 됩니다. 이 말은 “자식이라면 발가락이라도 아비의 것을 닮았으리라”는 소원의 소치이지만, 유전학적으로 자식은 어딘가 조상과 부모를 닮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도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모습을 닮고 있다고 믿는 것도 결코 미신은 아닐 것입니다. 즉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주를 삼차원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는 시간-공간-물질로 이루어집니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이루어지고, 공간은 길이(1차원)-넓이(2차원)-높이(3차원)로 이루어지며, 물질은 운동-에너지-현상으로 이루어집니다(N. R. 우드, 우주의 신비). 물론 이 설명이 삼위일체를 꼭 빼어닮도록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아울러 밝혀 드립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목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도 역시 삼위일체론적으로 풀어야 무난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주는 하나님 아버지가 외로히 만드신 작품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협력하여 만드시고 공동으로 출품하신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을까요? 어떤 목적으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을까요? 우주창조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1. 첫째는 성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권능과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고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심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계에서 최고로 유명한 탁월한 예술가가 있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최고의 보람과 사명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출세와 명예, 성공과 인기가 예술활동의 목적일 수도 있겠지만, 진실하고 진지한 예술가라면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예술활동의 부차적인 산물로 여길 것이며, 예술의 목적(미 혹은 지고의 가치 등)을 완성하는 일에만 자신의 혼신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 즉 순수한 예술활동의 목적은 예술가 자신의 혼을 온전히 드러내는 일에 있으며, 또 그리하여 우주혼과 합일하거나 하나님의 영과 일치하는 일에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주창조의 목적과 의미도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성을 드러내는 일에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마치 예술가처럼 천지를 만드셨고, 그 작품 안에 자신의 혼을 아낌없이 불어넣으셨으리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뭔가 부족하셔서 천지를 만드실 필요가 있었다거나, 어쩔 수 없는 외부적 강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뭔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다른 이들로부터 영광과 예배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은 오로지 아버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고 그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동 다윗은 천지를 보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편 19편).  

그리고 바울도 말하길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한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로마서 1:20)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마치 예술가처럼, 아니 마치 건축가처럼 그의 강하신 팔과 손으로 이 장엄한 우주를 제작하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이 우주 끝까지 미치도록 하셨습니다. 우주는 ‘위(앞)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권능에 찬 걸작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아래서) 그분의 영광을 기리고 찬양하는 데 있습니다.

 

2. 둘째는 성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우주의 설계자요 창조자라면, 성자 하나님은 창조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골로새서 1:16-17)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은밀한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한복음 1:1-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요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지혜로서 창조활동에 동참하셨고, 육신으로도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비밀은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창조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리스도는 ‘사랑의 계약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바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 곁에 오시기 위해, 우리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즉 창조의 비밀,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과의 사귐, 교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영원 전부터 우리와 사귀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이 사랑의 계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체결되었고, 계시되었으며, 또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요 의미요 설계도입니다. 우주는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의 진실하신 사랑의 걸작품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목적은 다른 예술작품(예술인들)과 기쁜 사귐을 나누고자 함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낳는 목적은 결국엔 자식과 좋은 친구,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 위함에도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도 우리와 영원한 우애, 우정을 나누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이 설계도 위에 세워질 때에만, 진정 행복할 수 있고 창조의 목적(사랑)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사랑의 비밀을 노래합니다.

 

   

3. 셋째는 성령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다면, 사랑받는 자들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갈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사랑, 피조물들 간의 사랑도 영원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가 창조될 때, ‘창조의 영’, ‘생명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도 거기에 계셨습니다. 성령은 태초의 창조시에 어머니와 같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우주를 품고 우주탄생의 환희와 고통을 함께 느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지금도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하여 계속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부부가 진정한 사랑으로 결혼하여 서로 결합한다면, 생명을 낳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식을 낳는 일에 무슨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혹 어른의 즐거움, 노후의 생계보장을 위해 자식을 낳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혹 혈통계승에 집착해서 아들만을 낳기를 고집하는 집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든 딸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다른 수단이나 목적이 아니라 생명을 낳고 기르고 물려주는 부모의 생명사랑 그 자체입니다. 자식은 생명의 자연스러운 결실이요, 생명은 사랑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과 생명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생명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시고 치유하시고 보존하시고 갱신하시며, 우리의 썩을 몸도 썩지 않을 영적인 몸으로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옛적에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하게 주시기 위해 오늘도 계속 창조하시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피조물인 우리는 이 생명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영원한 창조의 사귐, 안식, 축제, 즉 하나님의 나라, 영광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를 애타게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피조물과 함께 이 날을 기다리며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로마서 8: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