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아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자신을 잘 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상식 선에서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대충 설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묻고 있는 것은 당신의 혈통, 직업, 신분이 아니라 당신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런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시고 머뭇거리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여러분은 마음 속으로 “그런 걸 어찌 아는가? 아니 그걸 알아 무엇하는가?”라고 반문하시면서, 피식 웃으실 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인류가 이 땅에 등장한 이래로 지금까지 줄곧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을 보아도 인간은 아직 자신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희극이면서도 비극입니다. 인간이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면서도 그 스스로 대답을 내릴 수 없다는 모순 자체가 이미 인간의 신비를 입증합니다.

정말 인간은 인간에게 최대의 신비입니다. “아침에는 네 발로, 낮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라는 스핑크스의 물음은 대답하기 쉬운 물음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대답이 우리의 생사와 운명을 결정짓는다면,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이며,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도 그럭저럭 살아 갈 수 있다. 이런 골치 아픈 문제로 고민하느니 당장 살아가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설령 우리의 무지가 당장 우리의 목숨을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자신을 모른 채 부초(浮草)처럼 바람에 떠밀려 살아간다면, 그렇게 살아간 삶은 진정 우리 자신의 삶이 아닐 것이며, 그래서 남이 우리 자신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귀한 생명을 스스로 탕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하나님이나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적당히 알고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을지언정, 정말 자기 자신을 모른 채 자신의 삶을 참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Socrates)의 도전적 발언은 인류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수수께끼입니다.

성서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창조 이야기에서 인간은 우주의 우연한 합성물이나 우연한 진화의 부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은 그저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 한 마디로 창조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정성스러운 배려와 정교한 솜씨로 창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피조물의 하나이면서도 가장 빼어나고 뛰어난 피조물로 등장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바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모습)’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앞에서 본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이 우주창조에 반사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흔적, 아니 형상을 그 얼마나 뚜렷이 남기셨을까요!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희망과 목표가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평등함과 연대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기쁨과 안식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종과 계급, 성과 문화 등 여하한 구분과 차별, 억압도 없이 서로를 하나님의 한 형상으로, 하나님의 한 자녀로 여기며 산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한 몸의 서로 다른 지체들이 서로 다른 역할의 이유가 될지언정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고, 한 가족의 서로 다른 형제자매들이 개성의 이유가 될지언정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듯이, 한 지구촌에서 서로 다르게 사는 인간들도 결단코 지배와 착취, 억압과 소외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지금까지 제시된 이론들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내면적 본질: 이성이나 영혼), 2) 외면적 본질: 외형적 모습, 3) 통치의 기능 4) 관계의 기능. 그러나 인간을 내면과 외면으로 나누거나 본질과 기능으로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인간을 내면-외면으로서 분리할 수 없으며, 인간의 본질과 기능을 나눌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결코 쪼갤 수 없는 전인(全人)입니다. 인간은 내면(정신)과 외면(육체)의 통합체입니다. “인간이 누구냐?”라는 문제는 “그가 온 몸과 온 마음으로서 무엇을 행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무릇 몸과 정신의 일체가 드러나지 않는 존재가 없겠지만, 더욱이 인간의 속마음은 그의 몸짓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의 몸짓은 그의 됨됨이를 가리킵니다.

또 인간은 고독한 단독자(單獨者)로서는 결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즉 인간은 다른 존재와 완전히 분리된 채로 존재하거나 행동할 수 없으며, 다른 존재가 없이는 자신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혼자로서는 결코 인간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그 무엇과 관계를 맺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도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의 모습 안에서만 가장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계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실현됩니다.   

     

 1.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존재입니다

 인간창조의 이야기는 ‘인간’에 관해 말하기 전에 ‘인간창조’에 관해 말합니다. 즉 창세기를 읽어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기로 결심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세기 1:26). 이 말은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관련을 맺는 존재를 만들기로 결심하셨다는 사실을 지시합니다. 즉 이미 자신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귀시는 삼위일체의 형식을 가지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은 바로 자신처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이에 응답할 수 있는 피조물,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인간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이러한 관계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갖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자신의 편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 신뢰, 예배하도록, 하나님에게 기도, 감사, 응답, 반응하도록,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게 응답함으로써(Respond), 책임적인 삶(Resposibility) 살아야 합니다.

온 세계를 두루 살펴보면, 인종마다 풍습과 습관, 언어와 종교가 다 다르지만, 한 가지 일치하는 점으로서 가는 곳곳마다 제단이 없는 곳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결정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존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동물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입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종교행위가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절대자를 찾고 부르고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날 겉으로는 절대자를 부인하는 현대인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절대자를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절대자를 극구 부인하는 사람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황금이나 인기, 권력이나 사랑,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주먹까지 절대로 신봉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우상, 거짓 신이라도 섬겨야 할 존재이기에, 손오공이 뛰어 보았자 삼장법사 손 안에 있다고 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 보았자 또 다른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도피할 수 없이, 우리 앞에 절벽과 같이 우뚝 서 계시는 나의 ‘영원한 너’(Buber)이시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은 '동료인간'과의 관계를 맺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세기 1:2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고 실현되는 또 다른 관계는 인간의 성적인 차이와 사귐에 있습니다. 인간이 남과 여라는 두 성(性)을 갖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생활은 두 성(性) 안의 그의 존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남녀 성의 구별과 결합은 모든 인간관계, 가족관계, 사회관계의 토대요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독자적, 개체적 인간은 반쪽 인간이다”(W. Zimmerli)고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치지만,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 사귐으로 결정된 존재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사귐은 하나님 자신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하나님도 자신 안에서 풍부한 사귐의 관계를 맺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의 구별과 사귐은 인간들의 사회생활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의 삶의 사귐을 결정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모든 종류의 이론적, 실천적 차별은 부당하며, 남과 여의 성적인 우위와 서열도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남자만이 아니라 인간을, 즉 남자와 여자를 다같이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한자로 사람은 인(人)입니다. 즉 인간은 홀로 고독하게 땅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와 같은 개체(⊥)가 아니라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함께 사는 존재(人)입니다. 더욱이 한자로 사람은 인간(人間)입니다. 즉 인간은 ‘사이에’ 있을 때, 더불어 있을 때, 비로소 참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人人人人”, 즉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워야 사람”입니다. 인간은 이웃을 외면하고 무시하면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웃을 존중하며 그와 더불어 살아갈 때, 비로소 참 인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웃에게도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됩니다. ‘너’를 부를 때, 비로소 ‘나’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나와 너’의 만남에서 ‘영원한 너’ 하나님의 옷자락을 봅니다. 우리는 ‘너’에게서 ‘영원한 너’를 부릅니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삶은 만남입니다(Buber).

   

3.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맺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만물의 통치권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기 1:28). 인간은 만물의 통치자를 이 땅에서 대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할 사항이 있습니다.

 1) 비록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탁월한 존재로 지음받았지만, 인간도 분명히 ‘자연적인 존재’입니다. 히브리어로 ‘인간(아담)’이라는 이름은 ‘땅(아다마)’으로부터 유래했습니다. 인간은 땅으로부터 지음받고, 땅 위에서 집을 짓고, 땅에서 경작한 것으로 먹고 살며, 죽어서 땅으로 되돌아갑니다. 이처럼 땅은 인간에게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제 아무리 자연보다 뛰어난 정신적 존재라고 하더라도, 자연의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이 자신의 육신적 어머니를 어떻게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땅을 버리면, 땅도 인간을 버립니다. 땅과 인간은 공동운명체요, 다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2) 인간의 세계지배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환경오염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파괴하도록까지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정복이 ‘기술(技術)’이라는 새로운 신화(테크노피아)를 통해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배권은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지, 인간을 다스리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주인이 되려는 민족과 인종과 국가는 결코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괴물이 될 뿐입니다.

 3)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도 단순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이고 착취적인 지배가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에덴 동산을 가꾸며 돌보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은 만물의 주인(하나님)을 섬기는 관리인으로서의 지배와 보존을 의미하지, 무제한적이고도 자연파괴적인 지배로 오해되어선 안 됩니다. 하늘과 마찬가지로 땅도 나눌 수 없거니와, 더욱이 하나님의 위탁물인 땅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독점할 수 없고, 탐욕으로써 파괴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자연을 파괴한 일에는 분명히 성서를 잘못 해석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을 새롭게, 아니 올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하나님을 위한 청지기의 지배이며, 하나님을 위한 땅의 지배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배는 분명히 책임적인 관리와 보존입니다. 이 우주, 즉 하늘과 땅도 분명히 영광의 잔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창조의 마지막, 목표는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안식하고 사귀는 하나님의 나라(영광의 잔치)이기 때문에, 인간이 다른 피조물을 멸종시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도전이요, 세계의 주인에 대한 범죄입니다. 이제는 인간의 권리(인권)만이 아니라 자연의 권리(자연권)도 재발견하고, 자연에게도 구원의 희망을 열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자연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마지막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의 나라, 그분의 영광을 물려받을 피조물입니다.        

마지막으로 꼭 알아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막 태어난 갓난아이도 분명히 어른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지만, 그는 아직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으로 성숙해야 하듯이, 인간도 처음부터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맞추어) 지음받았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즉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도록 지음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과정적 존재’, ‘종말론적 목표를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매일 새롭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목표가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