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악은 어디서 옵니까?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창조와 인간창조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창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창조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선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가 선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라는 것을 믿는 것은 이 세상과 그 속의 삶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좋은 선물로, 인간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선한 임무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곧장 다음과 같은 물음이 생겨납니다 .“선한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세계에 왜 이토록 많은 악과 비극들이 생겨나는가?  ”“아우슈비츠에서 행해진 6백만 유대인의 학살, 히로시마와 체르노빌 등에서 일어난 핵폭발로 인한 엄청난 인명살상, 리스본을 비롯한 지구 곳곳의 파괴적인 지진과 온 세계로 확산되는 전염병, 아프리카 등의 기근과 지구 곳곳의 전쟁, 문명화된 사회 한복판에서도 버젓이 자행되는 고문과 살인, 폭행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인류의 비극들도 다 선한 하나님의 창조물인가?” “이런 비극적인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도 우리는 천지를 섭리하시는 선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대관절 악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이 세계는 다 그런거야”, 하나님이 다 필요하니까 악을 허락하실꺼야!”, “악이란 없어! 어디까지나 악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생각만이 있을 뿐이야,”“그런 것을 어찌 알아, 다 제 팔자지”라고 말함으로써, 이런 물음에 만족한 대답을 내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무고하게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자들 앞에서도 과연 이런 대답을 줄 수 있겠으며, 자신이 억울하게 엄청난 고난을 당해 괴로워할 때도 태연히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결코 악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악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악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이 엄연히 버티어 서 있는 실재입니다. 만약 악의 실재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환영 속에서 사는 셈이며, 선한 삶에 대한 신뢰와 선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무너지는 셈이며, 그래서 구원도 필요가 없게 되는 셈입니다. 만약 악이 없다면,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외침도 메아리 없는 공연한 아우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왜 무고한 나에게 이토록 가혹한 고통을 허락하시느냐?”라는 욥의 항변도 다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 그저 그런 거죠. ” “별 도리가 있나요, 운명이거니 생각하며, 참고 살아갈 수 밖에요”라는 체념만이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성서는 선한 하나님과 그분의 선한 창조를 긍정하면서도, 악의 실재도 부인하지 않고서 매우 진솔하게 인간의 고난의 역사를 전달해 줍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증언(證言)이면서, 동시에 형에게 죽임당한 아벨로부터 이방인들에게서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까지 이르는 고난의 전기(傳記)이기도 합니다. 악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물리적, 자연적인 악'입니다

 물리적 혹은 자연적인 악은 창조 세계 안에 들어온 온갖 재난(기근, 태풍, 지진, 질병, 화재, 홍수 등)을 말합니다. 우주는 지금도 계속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존재는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이 고난과 재난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모두 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선한 세계이지만 유한한 세계이며, 아직 완전한 세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 안에는 여전히 혼돈과 질서가 늘 교체하며, 파괴와 건설이 번갈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러한 혼돈과 파괴가 인간에게 큰 고통을 줄지라도, 그 자체를 무조건 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무상함, 연약함, 유한함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유한하고 연약한 것이 곧 악한 것은 아닙니다. 지진으로 건물들이 무너진다고, 아름다운 꽃들이 시들고 죽는다고, 사람들이 병들고 죽는다고, 이것을 무조건 악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도 본래 첫 창조의 조건에 속해 있는 요소입니다.

만약 우리가 추위를 쫓아내고 고기를 구워 먹되 사람을 태울 수는 없는 불을 창조해 달라거나,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고 만물에 생명력을 주되 사람을 익사시킬 수는 없는 물을 창조해 달라거나, 부드럽게 애무할 수는 있되 어떠한 사고를 당해도 다치거나 죽지 않는 불사적인 신체를 만들어 달라고 하나님에게 요구한다면, 차라리 하나님에게 창조하시지 말라고 요구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밝은 태양이 있으므로 자연히 어두운 그늘이 생겨나듯이, 창조세계에는 창조의 그늘(Barth)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재앙을 모조리 악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악의 창조자로, 괴물이나 악마로 몰아붙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종종 너무나 가혹하고 끔찍스러운, 너무나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자연재앙을 경험할 때, 우리는 이러한 것들마저 만물을 섭리하시는 선한 하나님의 행위로 생각하기가 곤혹스럽습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의 피조물에게 이토록 가혹한 고난을 허용하시는가?”“왜 하나님은 악한 자들만이 아니라 선한 자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재앙을 허용하시고, 때로는 선한 자들이 악한 자들보다 더 불행한 재앙을 당하도록 허용하시는가?”“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가 꼭 이처럼 엄청난 혼돈과 낭비, 광포함과 잔인함을 포함해야 하는가?” “혹시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못하거나 선하시지 않는 분은 아닐까?”“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 변덕과 무자비로 가득한 악마는 아닐까?”이런 질문을 우리는 자주 던지게 됩니다.

물리적인 악에 대한 건전한 성서적 답변이 있을까요? 모든 물리적 불행을 무조건 죄의 결과라고 보는 생각은 이미 욥과 예언자, 예수님 등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비록 불행이 때로는 인간에게 덕행과 미덕을 위한 교육의 수단이 되고, 더 큰 행복과 소망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모든 고통을 이렇게 정당화하고 체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무고한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더 낫습니다. 그리고 욥처럼 하나님에게 항의할 권리도 마땅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적인 악의 기원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 그 자신의 은밀한 일을 인간에게 행하십니다.

 

2. 둘째는 '구조적, 사회적인 악'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악은 구조악(정치적 독재와 억압, 경제적 착취와 불평등, 문화적-사회적 차별과 소외, 세계전쟁과 범죄조직, 식민제국주의, 쾌락주의, 물신주의 등)입니다. 이것은 물론 대부분 범죄한 인간의 책임으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타락과 범죄의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조적-사회적 범죄는 인간의 운명(유한함과 무상함, 부패성)이 자연의 운명(유한함과 무상함)과 결합됨으로써 일어납니다. 만약 인간이 무상하고 유한하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이 세계가 무상하고 유한하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악행도 저질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인간과 세계가 무상하고 유한하더라도,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많은 구조악도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조악은 범죄한 인간이 스스로 자신과 세계의 운명을 악용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이 만든 구조악에서 자신만의 힘으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여기에 구조악의 비극성과 연대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범죄하여 스스로 자신의 팔에 사슬을 채우는 결과를 초래하면서도, 스스로 그 사슬을 풀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범죄하여 감옥에 들어가지만, 이 감옥의 닫힌 문을 자유의지로 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술과 담배 혹은 마약에 빠지지만, 이에 심하게 중독된 후에는 스스로 이 상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회의 범죄단체, 재물, 쾌락, 권력의 매혹과 그물 안에 사로잡히면, 스스로 헤어 나오기가 거의 어렵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뱀이나 용 혹은 야수들은 대개 이런 구조악을 인격화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원죄(原罪)라는 용어도 인간의 죄악의 연대성, 비극성, 숙명성을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조악에 진노하심으로써, 혹은 구조악이 그 자연스러운 결과를 치르도록 하심으로써, 혹은 구조악을 방치하심으로써, 죄의 결과를 인간에게 지우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행의 많은 근원은 자연의 운명을 오해하거나 오용한 인간 자신의 자업자득이 아니면 하나님의 보응입니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한 대로, 인간의 모든 구조적 불행이 죄의 대가이거나 교육의 수단만은 아닙니다. 여기서도 우리 인간은 이런 구조악을 허용하시거나 방치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구조악은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는 자유와 운명의 산물입니다.  

 

3. 셋째는 '인간의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연의 운명을 오해하고 오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남용함으로써, 죄악을 행합니다. 이 죄악은 창조질서의 교란을 초래했는데, 이 교란은 특히 하나님의 형상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의 교란, 왜곡은 삼중 관계(하나님-인간-자연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고 경험됩니다.  

1) 첫째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왜곡됩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순종하도록 지음받은 인간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정욕에 이끌려), 하나님을 불신앙하여,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여, 하나님에게 불순종합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과 신뢰와 사랑과 기쁨의 사귐을 나누도록 창조된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도피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과의 의존관계를 부인하거나 온갖 우상을 창조하여 거기에 경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킵니다.

 2) 둘째로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왜곡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돕도록 맺어진 남녀가 죄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함으로써, 둘 사이의 친밀한 배필관계가 파괴됩니다. 그리고 이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이용하고 악용하려고 합니다. 여자는 이제 남편의 굴욕적인 지배를 받고, 남자에 대한 그리움은 성취되거나 안식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자는 임신과 분만을 고통스럽게 체험합니다. 더욱이 남녀 간의 성적인 사랑도 파괴됩니다(간음, 매음, 계간, 수간, 동성애), 그리고 형제살해(가인의 아벨 살해)와 인간살상(전쟁), 사기, 도둑질, 강탈, 무관심, 소외 등 온갖 종류의 범죄가 인간 사이에서 행해집니다.

 3) 셋째로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은 왜곡됩니다. 인간과 땅 사이의 유대관계에 단절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인간과 경작지 사이에 있는 무언의 고투로 표현됩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남자는 종신토록 땀 흘리며 수고해야 합니다. 노동은 그 자체로서 저주가 아닙니다. 노동은 낙원에서도 부과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노동은 생을 매우 고달프게 만들고, 노동이 실패의 위험 속에 있으며, 노동의 소득이 노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과 땅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인간은 지배욕과 불안으로 인해 기술적 가능성을 남용하여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문화를 세우고(바벨탑 건설), 오늘 날에 이르러서는 자연을 오염시키고 생명을 착취합니다. 더욱이 인간이 지배해야 할 물질에게 오히려 인간이 지배를 당하는 비인간적 현실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동료인간-자연과의 관계왜곡으로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불행은 범죄의 자연스러운 결과나 하나님의 보응(방치, 형벌)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 자연 사이에서 비극적인 결과를 빚고, 또 새로운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