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강: 하나님의 은총은 어떻게 옵니까?

   

앞장에서 우리는 악의 실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악에 대한 이러저러한 해석이 아니라 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석가처럼 예수님도 악에 대한 해석보다는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원하옵소서!(주기도문) 그렇지만 불교는 악의 실재를 부정(否定)하거나 악한 현실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추구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악을 극복(克服)하고 악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을 희망합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소중한 작품을 아끼듯이,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들을 보호하듯이, 하나님도 자신의 창조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창조물을 악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오늘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악에게 위협받고 있는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어떤 은총을 베푸실까요? 우리는 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창조의 보존과 갱신'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것을 유지하시고, 창조된 세계를 혼돈의 위협으로부터 보존하심으로써, 창조물을 지키십니다. 창조적인 하나님은 매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피조물에 대하여 태초의 긍정을 반복하십니다. 만약 이러한 긍정이 없다면, 창조는 쉽사리 부정적인 힘(악)의 공격 때문에 혼돈에 빠집니다. 자연은 쉽사리 깨어질 수 있고, 상처입을 수가 있습니다. 처음 창조된 자연은 아직 덧없고 무상하며 연약합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단 하나 밖에 없는 지구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쉽사리 파괴되고 상처를 입습니다. 오존구멍은 점차 넓어지며, 지구의 온실화도 가속됩니다.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생명체가 멸종되어 갑니다. 땅은 점점 더 오염되고, 물은 더욱 더 썩어 갑니다. 산소를 공급하는 ‘지구의 허파’인 삼림은 해마다 엄청나게 사라져 갑니다. 반면에 인구는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핵에 의한 인류의 멸망이 언제나 가능한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사고가 참으로 얼마나 끔찍스러운지를 우리는 깨닫고 있습니다. 일만 여명의 사람들이 사망했고,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감염되었으며, 체르노빌의 어린이들은 장애아로 태어나거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며, 백러시아의 삼분지 일과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들은 폐쇄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연을 그냥 방치해 두시지 않고 창조질서를 파괴적인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자연을 회복시키시고 보존하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갈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덕분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사도행전 17:28). 그렇지만 하나님은 창조물을 회복시키고 보존함으로써, 단지 태초의 창조에만 집착하시지 않고,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꾸 망가지는 건축물을 오래 보존하려면, 단지 그것을 잘 보수할 것만이 아니라 자주 보완해 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늘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만물을 보존하시면서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떠 오른 태양은 어제의 태양이 아닙니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은 늘 새롭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역사 안에는 종(種)들의 보존만이 아니라 그 변화도 존재합니다. 언뜻 보면, 밤낮과 계절의 순환, 천체의 운행은 늘 반복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길게 보면, 우주는 늘 새로워지고 있으며, 지구와 생명체도 늘 변화합니다.   

그렇지만 만약 어떤 건축물을 자주 보수해도 도저히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다면, 아니 때로는 더 좋은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옛 것을 허물고 새 것을 만듭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언젠가 만물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마지막 창조’ 혹은 ‘새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창조의 보존과 그 진보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준비하십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나라는 영광의 나라를 향해 돌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살이하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를 향해 탄식하며 열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창조물은 새로운 창조를 향해 온통 굶주려 있고 목말라 합니다. 덧없고 유한한 자연, 파괴되고 오염된 자연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안식, 축제,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 오늘도 신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의 창조물인 자연의 신음소리를 듣고서,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해 친히 만물 안으로 오시고, 만물의 고통을 함께 나누십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구원자가 살아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새 창조를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9, 17)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용납되었을 뿐만 아니라, 첫 창조의 새 피조물처럼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온 창조의 봄, 새 날의 여명, 부활의 능력은 벌써 우리를 사로잡았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2. 둘째는 '역사적 해방'입니다

 

창조 안에 들어와 있는 ‘물리적인 악’이 하나님의 창조보존과 창조갱신에 의해 극복된다면, 역사 안에 들어와 있는 ‘구조적인 악’은 하나님의 해방활동에 의해 극복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온갖 구조악을 철폐하십니다. 특히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이러한 활동을 활발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과학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기술을 남용하여 높은 탑(바벨탑)을 지을 때, 하나님은 이 교만의 기술문명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또 소돔 성에 사는 사람들이 극도의 성적 방탕과 타락의 도시를 만들 때, 이를 파괴하셨습니다. 또 사람들이 더욱 불어나 온갖 죄악의 문화를 만들 때, 노아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을 홍수로 멸망시키셨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구조악으로부터의 구원을 가장 분명하게 예증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의 노예생활부터 탈출한 사건입니다. 에집트로부터 도망나와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으로 애집트를 괴롭히신 후 이스라엘을 노예생활로부터 탈출시키셨습니다. 이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항상 역사적인 해방의 원형으로 고백되고 회상되었으며, 미래적 해방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에집트 탈출사건은 물론 이스라엘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려는 종교적 목적도 갖고 있었지만, 분명히 구조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 해방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강대국의 식민주의적 착취와 압제, 비참한 경제생활, 인종적 차별과 소외 등 구조악으로부터 형제사랑과 계약에 입각한 평등한 생활 공동체적 이상(理想)으로 탈출시키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습니다.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이러한 압제를 당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해방의 하나님에게 호소해 왔습니다. 우리 민족사에서도 8.15 해방과 군사독재로부터의 해방 등은 바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해방사건의 예증으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도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의 사명을 이사야의 예언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여기서도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명은 온갖 구조악으로부터의 탈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난과 질병, 포로와 압제는 분명히 구조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은혜의 해’, 즉 ‘희년’의 이상은 자연(땅의 휴경과 재분배, 짐승의 휴식)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해방의 목표였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의 중요부분인 죄용서와 치유도 결국엔 개인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차원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즉 죄와 질병은 개인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소외와 차별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사죄와 치유는 사회적인 사귐의 출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다같이 구조적(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인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증언하고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창조자만이 아니라 해방자로도 묘사하고 있습니다.

 

 

3. 셋째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만약 우주의 치유와 보존, 갱신이 없다면, 인간의 구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도 ‘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회구조적인 해방이 없다면, 인간의 구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 천하를 얻고도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서 구원을 얻지 않고 이 세계 속에서, 이 세계와 더불어 구원을 얻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영위한 삶도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얻고 완성될 것을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세상과 사회의 탓만으로 돌린다면, 그래서 그것을 온통 운명이나 팔자의 탓이라고만 말한다면,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동물이나 로보트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은 죄는 용서받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인격은 파괴되고 자존심은 영영히 회복되지 못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희생제사를 통하여,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죄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칭의).

그러나 우리는 ‘죄짐(죄책)’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성령이 오셔서 연약한 우리를 도우십니다. 즉 우리는 매순간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성화). 그러나 험난한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은 완성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거룩한 삶을 사노라면, 우리는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해야 합니다(로마서 5:2). 왜냐하면 언젠가 예수님이 영광 중에 오실 때, 우리가 주의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갈 (고린도후서 3:18)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영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혀 주심으로써,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은 당신과 동료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왜곡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사귐을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사죄와 영생과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만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존재인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할 날까지 영-혼-몸이 온전하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동료인간과의 사귐을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자연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심으로써, 자연을 올바로 관리하고 보호하는 청지기(관리자)로서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