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를 위해
다시 오시리라!

이신건 지음

(기독교대한성결교회출판부, 2007년, 143쪽)

전문 공개

1. 종말론과 기독교  

  1) 여러분은 아직도 종말을 믿습니까?
  2) 종말론이 없는 기독교는 가능합니까?

  
3) 종말론이 없는 인생도 의미가 있습니까?

4. 공의(公義)란 무엇입니까?

  1) 인간의 공의
  2) 하나님의 공의
  3) 종말론적 공의
  4) 새로운(더 나은) 공의

2. 종말론의 신학적 기원과 근거
  
  
1) 약속과 성취를 통해 오시는 하나님
  2) 하나님의 통치와 메시아의 오심
  3) 성령의 오심과 새로운 창조

5. 공의를 위해 일한 사람들

  1)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2) 존 웨슬리
  3) 마틴 루터 킹

3. 하나님은 왜 다시 오십니까?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2) 공의를 세우기 위해
  3) 평화를 이루기 위해

 

나가는 말

 

 

 

1. 종말론과 기독교

1) 여러분은 아직도 종말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1992년에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른바 '휴거파동'을 여전히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퍼지기 시작한 '시한부 종말론'은 1992년 10월 28일(새벽 12시)을 휴거의 날로 확정한 가운데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시한부 종말론'을 대변한 사람은 이장림 씨였습니다. 그는 '다미선교회'를 조직하여 국내에 지부를 설립하고 해외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넓혀 갔습니다. 언론과 방송의 집중적인 관심 아래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확신한 바로 그 날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채, 흰옷을 입고 찬양하면서 휴거될 것만을 고대하였습니다. 혹시 휴거가 일어나지 않을 경우에 집단 자살과 가해 등과 같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경찰이 투입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그와 같은 끔찍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장림 씨는 구속되어 실형을 살게 되었고 그날의 휴거는 불발로 끝났지만, 앞으로도 다시 소동이 일어날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다미선교회를 떠났지만, 1992년 10월 28일은 예수님이 공중에서 재림하시는 날이었고, 예수님의 지상 재림은 1998년에 일어날 거라고 믿고 여전히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 교회에 대체로 두 가지 영향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영향으로서 종말론에 대한 의식적인 기피 현상을 들 수 있습니다. 불발로 끝난 휴거 소동은 평소부터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 교회와 기독교를 비난하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도가 잘 되지 않고 교회 성장이 둔화되어가던 상황 가운데서 터진 휴거 소동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종말에 대한 혐오감을 낳았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끝없이 주장되었던 구체적인 재림 예언은 모두 허황한 거짓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불발로 인해 사회와 기독교에 큰 타격을 준 자들은 대개 이단이나 사교적인 집단에 소속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교회들은 종말 신앙을 기피하거나 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심지어는 안전히 그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는 결과가 생겨났습니다.

더욱이 과학과 이성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현대인들은 점점 더 초월적인 세계를 의심하고 이 세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더 강하게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인들에게조차 인기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르침은 심리적 평안과 사회 안정과 발전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 중에 터진 휴거 소동은 교회로 하여금 종말과 재림 신앙은 물론이거니와 종말에 관한 말조차 꺼내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습니다.

휴거 소동이 끼친 긍정적인 영향은 그 동안 종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이를 기피해 오던 교회로 하여금 올바른 종말론을 갖도록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말론은 교회와 기독교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인들 사이에서도 종말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 두 번째 천년 시대를 마감하는 해가 가까워 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종말 신앙이 다시 기승을 부렸습니다.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2000년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재림한다는 예루살렘 신드롬, 새 천년에 일어난 컴퓨터 장애(Y2K)에 대한 불안,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진, 태풍, 가뭄, 홍수,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적 재난은 지구의 종말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산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으로 1,200개 정도의 종말론 집단이 생겨났고, 국내에도 70-80개의 종말론 집단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교적, 기독교적 종말론을 물려받은 기독교는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정립할 필요성을 다시 절감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종말론에 관한 연구 서적들과 홍보 책자들이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지금도 이와 같은 두 가지 현상이 교회 안팎에 공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두 길 중에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종말론을 포기하고 행복한 이 세상을 만드는 일에만 온전히 열중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붙들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종말을 믿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근거와 이유로 믿습니까?

 

2) 종말론이 없는 기독교는 가능합니까?

기독교의 역사는 종말에 대해 열광적인 기대를 품었던 사람들로 인해 빚어진 갈등과 혼란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열광주의자들의 종말 기대는 교회와 사회를 심히 어지럽혔을 뿐만 아니라 종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난 것은 다만 이와 같은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의 가치관 혹은 세계관은 점점 더 현실주의적, 과학주의적, 실용주의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내세 혹은 종말보다는 이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더욱이 오늘의 학문도 더 이상은 하나님 혹은 초월이라는 작업가설(전제)을 요청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점점 더 자율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현대적 세계관에 적응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기독교인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향은 교회 안에서도 종말론을 기피하는 결과를 광범위하게 낳았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강단에서 종말에 관한 설교를 듣기가 어려워졌으며, 성도들도 위기와 불안을 주는 종말론적인 설교보다는 위로와 평안을 주는 설교를 더욱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교회 안에서조차 종말론이 푸대접을 받는 이와 같은 경향은 다만 현대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매우 오래된 현상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기독교의 복음은 먼저 서양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 땅에서 생겨난 기독교의 복음이 헬라와 로마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서 새로운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전혀 다른, 아니 전혀 상반된 세계관을 가진 사람과 문명을 만난 것입니다. 서양 문명의 토대가 된 히브리 전통과 그리스 전통은 여러 면에서 아주 다르거나 상반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두 전통은 서서히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기독교의 세계화(世界化)와 교리화(敎理化)를 위해 필요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현상은 기독교의 본질을 심각하게 위협하였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Platon)처럼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영원의 모방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시간과 변화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변화는 무상한 것, 덧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은 피안(彼岸), 즉 사후의 세계를 동경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에게 죽음은 바로 육신과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시간을 철저히 사건의 흐름으로 보았습니다. 히브리인의 생각에서 영원은 피안이 아니라 차안(현실)을 표시합니다. 영원이 하나님에게 적용될 경우에도 그것은 시간과 현실을 벗어나는 세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은 시간과 현실을 초월하는 피안을 동경하기보다는 이 세계의 미래 혹은 종말을 철저히 기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스 전통은 교회와 신학에 점점 더 막강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히브리 전통에서 형성되어온 종말에 대한 신앙은 점차로 피안(사후)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영향력이 이 세상에서 점점 더 확장될수록 종말론은 교회 안에서 점점 더 퇴색하거나 억압되어 갔고, 결국 종말에 대한 기대는 열광적인 소종파 집단이나 혁명적인 사회 운동 안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샤머니즘이나 불교 혹은 유교의 영향 아래 종종 그 본질에서 이탈되거나, 잘못된 종말론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예컨대,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하늘나라' 혹은 '천국'은 기독교의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과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구 섞여 사용되거나 뒤바뀌어 사용되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한편으로는 한국 교회가 한국의 문화에 잘 적응함으로써 크게 성장하는 효과를 누릴 수는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과 기름이 섞이듯이, 교회와 복음의 본질이 상당히 흐려졌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전통과 그리스 전통의 차이는 왜 생겨났습니까? 많은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그리스 철학은 대체로 자연 현상 혹은 자연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자연처럼 이해되거나 영원에 의해 압도되었습니다. 즉 영원히 반복하고 순환하는 자연에 대한 인식은 역사의 새로움에 대한 희망을 부인하거나 이를 영원 혹은 내세로 옮겨놓았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적, 기독교적 세계관은 철저히 역사적, 현실적이었으며, 그래서 또한 미래적, 종말론적이기도 하였습니다.
 

현대인의 세계관 혹은 역사관도 대체로 두 가지 종류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순환 모델입니다. 순환 모델은 말 그대로 역사가 순환하고 반복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비록 역사 안에 종종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손 치더라도, 그런 변화도 일정한 법칙 안에서 일어나고 그래서 역사는 주기적으로 순환한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하나는 선형 모델입니다. 선형 모델은 말 그대로 역사를 직선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모델은 고전적인 서양 모델로서 역사의 새로운 변화를 강조합니다. 서양인에게는 순환 모델이 주로 나타나거나 종종 순환 모델과 선형 모델이 결합된 형태가 나타나지만, 동양인에게는 순환 모델이 압도적으로 나타납니다.
 

선형 모델을 믿는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 다분히 진취적, 낙관적인 자세를 취하는 편입니다. 그에 반해 순환 모델을 믿는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 대개 운명적이고 비관적인 자세를 취한 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희망을 품는 사람들은 역사의 변화에 참여하려고 애쓰지만, 역사에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희망을 품는 사람들은 역사의 변화에 무관심한 편입니다.

지금 우리는 점점 더 작아지는 지구촌 안에서 서로 간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다른 문명과 생활 속에서도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야 할 임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가운데서도 서로에게 배워야 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종교인 기독교도 당연히 열린 자세로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세가 곧 기독교의 본질 혹은 기독교 복음의 독특성을 포기하는 자세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그래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종말론이 없는 기독교는 이 세상에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며, 그래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갱신하고 변혁할 아무런 근거와 능력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를 바르게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전파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종말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포기할 수 없으며, 이와 같은 믿음을 다른 것과 마구 뒤섞거나 바꿀 수도 없습니다. 종말론의 포기는 곧 기독교와 복음의 종말입니다.

 

3) 종말론이 없는 인생도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가 종말을 믿는 것은 결코 세상이 멸망할 것을 기대하거나 그렇게 예견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운명이 종말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조직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는 "전적으로, 정말 그리고 철저히 종말론이 아닌 기독교는 전적으로, 정말 그리고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의 신학'의 저자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도 "종말론은 다만 기독교 신앙의 부록이 아니라 전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아니 기독교 신앙 그 자체와 다름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실로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자신의 인격 안에서 가까이 다가온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쏠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교회와 신학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든, 원래부터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은 교회를 낳은 어머니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종말에 대한 신앙은 실로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종말에 대한 신앙은 수많은 종교와 신화 속에서 살아가던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진 혼돈과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괴롭히던 온갖 세력들은 잔해만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졌지만,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던 교회는 역사의 모진 격랑을 헤치고 지금도 온 세계를 향해 왕성하게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만약 인생과 우주에 대한 뚜렷한 목적 의식이 없었더라면, 복음과 교회의 생명력은 시나브로, 아니 단숨에 꺾여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투철한 목적 의식, 미래에 대한 불굴의 소망만이 시련에 처한 교회를 건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에 대한 뚜렷한 의식은 고난을 이길 뿐만 아니라 고난에 대해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목적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수동적으로 고난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고난을 활용하고 때로는 자발적으로 고난 속으로 뛰어들어갑니다. 인생의 목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고 인생의 목적을 눈앞의 이익에 두는 사람들과도 달리 원대한 목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남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역사는 수동적인 고난만이 아니라 자발적인 고난으로도 점철되어 있습니다. 목적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무의미하게 살아가게 되는지, 그리고 목적 의식이 뚜렷한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가는지를 실례를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과거의 소련 연방 정권들은 반체제 인사들이나 중한 범죄자들을 시베리아 땅으로 보내서 심한 노동을 시켰다고 합니다. 혹독한 추위와 결핍된 영양 속에서 노동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노동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죄수들은 무거운 짐을 어느 지점에 옮겨놓으라는 임무를 받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짐을 그리로 옮겨야 하는지는 잘 몰라도, 그들은 최소한 짐을 특정 지점에 옮겨놓아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은 갖고 있었고, 그래서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에 그들은 어제 옮겨 놓았던 짐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라는 임무를 받습니다. 무슨 영문인지는 잘 몰라도, 뭔가 착각이나 실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죄수들은 짐작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또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 그들은 짐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반대로 일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아무런 설명과 변명도 없이 매일 똑같은 작업이 반복되었습니다. 어떠한 질문과 항의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죄수들은 스스로 의심하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그들로서는 이를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날로 의욕을 상실하기 시작하였고, 노동의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삶의 의미도 서서히 잃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바로 무기력과 우울증, 질병과 자살이었습니다. 아무런 목적이 없는 노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노동은 곧 정신적인 자살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들에게 가해진 가장 혹독한 형벌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와는 완전히 다른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대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태국에서 일본군의 포로로 사로잡혔던 영국군들이 태국의 콰이강에 다리를 놓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미얀마(버마)로 진출한 일본군인을 위해 물자를 수송하는 다리를 놓는 작업이었습니다. 이곳의 작업 환경도 무척 열악하였습니다. 배고픔과 무더위와 질병 속에서 노동하던 중에 많은 동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우 신명나게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군수 물자를 나르는 다리를 놓는 일은 분명히 적을 이롭게 하고 동지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최소한 작업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비록 포로의 신분 속에서도 멋진 다리를 만드는 것은 고된 생활을 잊고 동지들이 서로 협력하며 재미있게 살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노동과 삶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다리를 놓은 것 자체만이 그들의 목적일 순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그들은 다리를 멋지게 폭파하기 위해 멋진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멋지게 성취되었습니다. 오로지 분명한 목적이 있는 인생만이 의미 있는 인생일 수가 있음을 보여준 멋진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실제로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의미는 분명한 목적과 목표에서 나옵니다. 만약 목적과 목표가 분명하면, 때로는 나쁜 일도 -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 신나는 일이 됩니다. 목적과 목표를 바라보고 사는 생활에는 긴장과 변화와 희망이 있습니다. 비록 도중에 잠시 멈칫거리고 뒤로 나자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때로는 뒷걸음치는 한이 있더라도, 더욱이 도중에 한 지점을 맴도는 한이 있더라도, 분명한 목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다시 일어나 전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생이 늘 반복된다면, 만약 인생이 같은 지점에서 맴돌기만 한다면, 인생은 참으로 지겹고 괴로울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살아야 할 이유와 의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순환하고 반복한다고 믿는 인생관 혹은 종교는 인생의 허무를 깨닫는 것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여기거나, 이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희구합니다. 설령 인생의 허무를 깨닫는 일은 쉬울지는 모르지만, 이를 벗어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설령 생각으로는 현실을 벗어날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몸으로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몸을 가진 이상 세상을 완전히 등질 수는 없습니다. 죽음조차도 동일한 반복과 순환을 벗어나게 해 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생관으로는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갖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인류에게 가져온 가장 귀중한 선물 중의 하나는 바로 창조와 역사와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의미를 가져온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자신의 출발 지점과 목표 지점을 바르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인류가 처한 위치와 자신의 사명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삶이 목표까지 이어질 것으로 믿는 사람은 오늘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의 영원한 목표를 바라보는 사람은 현실에 완전히 동화되거나 절망하지 않고, 열린 미래를 향해 뛰어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성경 속에 분명히 담겨져 있으며, 교회는 이를 전할 사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은 이를 정교하게 다듬어 줍니다. 필자는 '종말론' 혹은 '재림론'이라는 무거운 신학 주제를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듬으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어렵다고 생각되시더라도, 중도에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이 작은 책이 여러분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2. 종말론의 신학적 기원과 근거

1) 약속과 성취를 통해 오시는 하나님

만약 기독교가 종말론적인 종교라면, 무엇이 기독교로 하여금 독특하게 종말론적인 종교로 만들었을까요? 종말론이 가능하게 된 기원과 근거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다만 현재에 대한 불만 때문에만 미래를 마냥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물론 현재에 대한 불만은 때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좌절하게 하지만, 때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현재에 대한 억눌린 불만 때문에 과격한 종말론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종말론적인 종교가 된 것은 이처럼 유치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은 다만 막연한 환상 때문에만 종말을 열렬히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미래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사람으로 하여금 환상을 품게 하고, 이런 환상이 종종 망상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할 때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이처럼 병적인 환상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종종 나타나곤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종말론적인 종교가 된 것은 이와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달리 역사와 우주의 종말을 믿게 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신학적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는 바로 기독교가 믿은 하나님은 바로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거의 모든 민족에서 주술적인 요소는 종교적인 것과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술을 곧 종교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주술(呪術)이란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비적인 힘을 빌려서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해결하려는 기술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모든 삼라만상이 어떠한 보이지 않는 초인적인 힘에 의하여 지배되고 운행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초인적인 힘을 유도하거나 조작하여 닥쳐올 불행을 예방하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컨대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물을 길어다 키로 쳐서 비가 오는 것처럼 하거나, 병에 물을 넣고 솔잎으로 물병의 주둥이를 막아 대문 곁에 거꾸로 매달아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술은 특히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 사회에서 널리 행하여져 왔습니다. 풍요와 다산, 축복과 성공을 위해 사용된 주술적 방법들은 이 밖에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가 믿는 야웨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임의로 유도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주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야웨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와 역사와 인생의 주님으로서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주술은 완전히 추방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주변 사회에는 여전히 주술이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그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위급한 상황에 부닥치거나 강한 소원을 품을 때에 본능적으로 초자연적인 존재를 향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주술가를 이스라엘 사회에서 추방하였던 사울 왕조차도 밤에 몰래 주술가를 찾아가 죽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삼상 28:3-15).

하지만 주술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생활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야웨 하나님에 대한 이탈 혹은 신앙의 변질로 이해되었고, 그래서 야웨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격렬하게 비판되고 배격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믿는 야웨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조종되거나 지배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복을 빌기도 전에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야웨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야웨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복을 주셨고,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화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에 몸이 벗을 사실을 알고 나무 뒤에 숨었을 때,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찾아오셨고,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먼저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인류가 번성하면서 죄악이 넘쳐나자, 하나님은 노아에게 찾아오셔서 방주를 지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람(아브라함)이 살던 곳이 주술이 매우 성행하던 곳이었지만, '믿음의 조상'이라고 길이 추앙을 받는 그도 먼저 하나님을 찾고 불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야웨 하나님이 먼저 그를 찾아오셨고, 그에게 고향을 떠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사건에서도 언제나 야웨 하나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야웨 하나님은 먼저 오시고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인간의 기도 혹은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인간의 몸짓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응답일 따름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오신다 - 임하신다"는 고백이 자주 나옵니다(시 96:13, 98:9, 사 35:4, 40:10, 59:19, 52:8, 60:2, 슥 14:5). 하나님이 왜, 어떻게 오시는지는 다음에 알아보기로 합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이 오신다"라는 신앙 고백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모든 종교가 동일한 형태와 내용을 지니지는 않습니다. 불교가 과연 종교라고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견해가 엇갈립니다. 불교인도 절대적인 진리를 믿고 그에 귀의한다는 점에서는 불교를 종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원래의 불교는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불교는 인생과 우주의 원리(法, 無)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석가와 노자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신앙과 상당히 다릅니다. 물론 불교에도 종말론적인 요소가 없진 않습니다. 특히 민중불교에서는 미륵불(彌勒佛)과 같은 미래의 보살을 기대하는 신앙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존재는 기독교가 믿는 초월적인 하나님 혹은 메시아와 같은 존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기독교가 형성되고 전파되던 시절에 상당한 영향을 떨쳤던 헬라 철학의 신(神)들도 우주의 원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헬라의 철학자들이 믿었던 신은 모든 것을 움직이면서도 스스로는 절대로 움직이는 않은 존재였습니다. 헬라인들은 만물의 변화를 초월하는 존재,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존재를 갈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은 모두 무상(無常)하고 허무(虛無)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상하고 허무한 것을 벗어나는 세계를 동경하였고, 그래서 세계와 몸(영혼의 옷 혹은 감옥)을 벗어난 사후의 세계 혹은 플라톤(Platon)이 말한 이데아(Idea)를 동경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믿는 야웨 하나님은 이와 같이 정태적이고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살아서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오신다"고 말할 때, 이와 같은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하나의 원리가 아니라 살아 계신 분으로 믿는 신앙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야웨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정적인 원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즉 새로운 사건과 질문으로 만나 주시는 자유로우신 하나님입니다. 파스칼(Pascal)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고 말했을 때에도 바로 이를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야웨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야웨 하나님은 미래로부터 현재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미래로부터 오신다"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야웨 하나님은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사 43:18)고 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미래로부터 오신다"면, 하나님은 현재를 그냥 가만히 놓아두시지 않습니다. 미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바로 이런 점에서 야웨 하나님은 고대사회의 신들, 특히 가나안 종교와도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유목민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은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농경민 가나안 사람의 신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농경민의 신들은 지역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나타난 장소는 거룩한 예배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목민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만났던 야웨 하나님은 영토와 지역에 매여 있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래로 인도하셨고, 약속을 통해 그들을 미래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야웨 하나님이 나타난 장소와 시간은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설령 야웨가 나타나셨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출현하신 장소와 시간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야웨 하나님의 나타남보다 이스라엘 백성이 더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약속은 장차 되어질 미래의 사건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도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넘어서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실현되지 못한 미래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웨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사람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납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방주를 짓기를 명령하셨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번성한 땅을 심판하시고 땅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홍수를 내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타나신 장소와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과거의 번영이나 현재의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실 미래의 사건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쏟아 넣어서 다가올 홍수에 대비하였습니다. 노아가 홍수로부터 구원을 받고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와 새로운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명령(약속)을 노아에게 다시 상기시키신 다음에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아브람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하나님이 나타나신 장소와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아브람은 하나님이 나타나신 장소를 거룩한 장소로 구별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나타나신 시간을 고정하여 해마다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 12:2)는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고, 과거의 번영과 현재의 안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약속만을 의지하고 길을 향해 떠났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인 후에 삼촌의 집으로 도망하던 중에도 하나님이 꿈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도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야곱에게 미래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여기서는 야곱이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자신이 베고 잤던 돌로 제단을 쌓았지만, 그곳을 특별히 거룩한 곳으로 만들지 않았으며, 해마다 그곳을 찾아가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야곱의 관심은 하나님이 나타나신 장소와 시간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포로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하시기 위해 호렙 산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모세가 선 땅이 거룩한 곳이므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나타나시는 곳은 분명히 거룩한 곳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곳을 거룩하게 여기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라지신 후부터는 그 땅은 더 이상 거룩한 곳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곳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의미로 제단이나 성전을 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나타나신 시간에 주기적으로 순례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출현하셨을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고통에서 해방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약속 신앙이 처음부터 종말 신앙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약속 신앙이 어떻게 해서 종말 신앙으로까지 발전하였을까요? 여러분도 일상 생활 중에서 경험하시듯이,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미 성취된 약속도 항상 상대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성취된 약속 안에는 아직도 다 성취되지 못한 그 어떤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취된 약속 안에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받은 사람은 역사 속에서 완전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성취된 약속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야웨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늘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바로 이과 같은 약속 신앙의 토양 위에서 종말론이 자라났습니다. 약속된 미래로부터 새로운 기대가 자라났고, 새로운 기대로부터 궁극적인 기대가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민족의 한계선을 뛰어넘어 온 민족과 온 우주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죽음마저 넘어서게 되었고, 급기야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을 기대하기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약속 신앙은 서서히 종말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통치와 메시아의 오심

기독교가 종말론적인 종교가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신앙과 "하나님이 그분의 통치를 위해 메시아를 보내신다"는 신앙에 있습니다. 성서는 단지 개인과 한 민족의 운명에 관해서만 말하지 않고 창조와 역사의 기원과 의미와 목표를 가르칩니다. 성서적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와 인생의 주관자입니다. 우주 만물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나 다른 권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전능한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은 맹목적인 우연에 내맡겨져 있지 않으며, 다른 신들이나 영웅적 인간들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우주 만물은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만물의 지배자가 되신다는 신앙을 고백할 때에 자주 사용했던 말은 바로 "하나님은 왕이시다" 혹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부터 야웨 하나님을 왕이라고 불렀는지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조금 다릅니다. 유대교 학자 부버(M. Buber)는 이 칭호를 유목 시대까지 소급시킵니다.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땅과 종족의 번성, 동행을 약속하신 야웨 하나님은 왕과 같은 인도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왕'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부족의 인도자를 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을 격파하고 돌아오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당신과 당신의 자자손손이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오"(삿 8:22)라고 간청했습니다. 여기서 기드온은 "내가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니오, 내 자손이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니다. 야웨께서 그대들을 다스릴 것이다."(삿 8:23)라고 말했습니다. 이 답변 속에도 하나님이 왕으로 직접 다스린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 기드온이 죽은 다음에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에게 물은 질문,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의 지배를 받는 것과 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과 어느 것이 나으냐고 물어봐 주십시오"(삿 9:2)라는 말에는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는 신앙이 존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왕이라고 불렀던 시기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다음입니다. 하나님을 왕이라고 불렀던 것은 무엇보다도 가나안 땅의 이방 신들과의 투쟁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날씨와 풍요의 신들을 믿었습니다. 그 중에 최고의 신이었던 바알(Baal)은 바다의 신과 죽음의 신과 투쟁한 끝에 죽지만, 이듬해 봄에는 다시 살아납니다. 이 때에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이 왕이 되었다"는 외침과 함께 바알을 왕으로 등극시키는 축제를 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와 창조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유일한 통치권을 고백하기 위해 가나안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신들에게 속하던 통치권을 오로지 야웨 하나님에게만 돌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만물이 오로지 야웨 하나님에 의해서만 창조되고 보존되고 갱신된다는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즉 왕이라는 칭호를 통해 야웨 하나님의 보편적인 통치를 만 천하에 공공연히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야웨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곳은 주로 시편입니다. 이런 시편들을 보면, 야웨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있습니다. 즉 야웨 하나님은 태초부터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셨습니다(시 24:1-2, 93:1-2, 96:10). 하나님은 창조행위를 통해 모든 혼돈과 무질서의 세력을 물리치셨고, 땅을 견고히 세우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의 주(主)가 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야웨 하나님의 왕권 통치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역사 속에서 분명히 경험하였습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어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넜을 때, 모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주님, 신들 가운데서 주님과 같은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과 같이 거룩하시며, 영광스러우시며, 찬양받을 만한 위엄이 있으시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는, 그런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주님께서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출 15:11. 18). 홍해의 기적 외에도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일, 외적을 물리친 일 등을 통해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고백하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왕권 신앙은 예언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예컨대 예언자 이사야는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臨在)를 체험한 후에 하나님의 왕권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 6:5). 예레미아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세계 만민의 임금님, 누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공경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세계 만민의 모든 지혜 있는 자들 가운데에도, 모든 나라의 왕들 가운데도, 주님과 같으신 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렘 10:7). 말라기도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왕권을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큰 임금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이방 민족들까지도 내 이름을 두려워한다"(말 1:14).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시절에 활동하였던 예언자들의 선포에는 "왕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다스림"을 고백하는 구절이 자주 나옵니다.

하지만 야웨 하나님의 통치는 역사 속에서 자주 시련에 봉착하였고, 그래서 하나님 왕권 신앙은 자주 흔들렸습니다. 야웨 하나님의 왕권은 역사 속에서 여러 권세들에 의해 종종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권 통치가 가까운 장래에 궁극적으로 - 완전히, 종말론적으로 - 실현될 날을 기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이 날을 '야웨의 날'(사 2:12), '주의 날'(욜 2:1, 암 5:18)이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날이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것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이사야는 야웨 하나님의 통치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선포하였습니다.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사 52:7-9). 이 외에도 여러 예언자들이 임박한, 혹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야웨 하나님이 장차 어떻게 오실 지에 관해서는 예언자들 간에 견해가 엇갈렸습니다. 어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자임했던 옛날의 왕이나 지도자들에게 너무 실망한 나머지 이제는 야웨 하나님이 친히 왕으로 오시고 왕으로 다스릴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통치할 이상적인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사 9:6-7). 스가랴는 다음과 같이 메시야의 오심을 선포하였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 9:10).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가 예언하였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의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이 자신에게서 실현되기 시작하였음을 공공연하게 고백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그리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간접적인 답변을 주셨습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 11:5).

마태와 마가는 다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써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 4:17).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4-15). 실로 예수님의 오심은 곧 하나님의 가까이 오심이었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선포하셨을 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오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눅 17:21)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마 12: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 안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 다가왔고, 그래서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돌입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예수님 한 분만을 위해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만인의 부활'을 미리 앞당긴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1)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완전히 오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죽은 자들이 부활하지 않았고, 아직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은 아직도 기도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기도처럼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마 6:10)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안에서 가까이 왔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히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인자(人子)이신 예수님은 장차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마 25:31),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막 13:26)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막 14:26)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눈에 보이는 '자연의 하늘'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은 '은혜의 하늘', 즉 하나님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구름'이란 하늘에 떠 있는 물방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가리개(출 16:10)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출 13:21, 계 10:1)를 말합니다.

초대 교인들은 다시 오실 인자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행 1:11).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늘로 완전히 철수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하는 자리에 앉히셨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물려 받으셨습니다(마 28:18).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참여하셨습니다(빌 3:10, 3:21, 엡 1:20, 벧전 3:22). 종으로 오셨던 예수님이 이제는 만 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통치는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만물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그 날까지 그리스도는 만물을 통치하시는 만물의 주가 되셨습니다(고전 15: 28).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후부터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 만물 가운데서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통치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통치하십니까? 먼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통해 통치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교회를 어떻게 통치하십니까? 그리스도는 칼과 창으로 다스리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법과 권력과 돈으로도 다스리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만찬을 통해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말씀을 듣고 성만찬을 받는 성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단지 교회의 머리로서만 교회를 통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교회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신성의 모든 충만으로 교회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을 누립니다(골 2:1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에 참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왕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는 둘이 아니라 곧 하나입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통치는 교회 안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만물의 주로서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떻게 만물을 다스리십니까? 그리스도의 통치는 교회의 선포를 통해 온 인류로 뻗어나갑니다. 교회의 선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는 온 세상에 선포되고 온 세상 안에서 실현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그러므로 모든 족속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제자로 삼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장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현할 수 있는 권한과 의무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선교의 사명을 실천하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선교의 사명을 실천하는 우리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통치는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까? 물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 가장 힘차게, 가장 효과적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온 창조의 머리가 되시고, 하늘 위에 오르신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엡 4:10).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 왕의 왕으로 인정하든 말든,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든 말든, 만물은 지금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아직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부하는 세력들, 혼돈과 어둠의 세력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통치가 완전히 드러날 날을 탄식하며 기다립니다(롬 8:19). 그리스도는 옛적에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성령 가운데서 매일 가까이 오십니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 22:20)!

 

3) 성령의 오심과 새로운 창조

메시아 희망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파괴되고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쓰라린 고난의 시기에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기다리게 된 것은 단지 이와 같은 고난의 경험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희망은 절망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귀향과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큰 힘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고난의 경험이 메시아 희망을 낳은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외에도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한 다른 민족들이 많았지만, 모든 민족들이 메시아 희망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스라엘의 메시아 희망은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기다림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메시아 희망은 하나님의 영(靈)에 대한 기다림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메시아 희망은 성령에 오심에 대한 희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사 11:2). 메시아에게 임할 하나님의 영에 대한 기대는 공의와 해방의 실현을 위한 메시아의 사명과 직결됩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다"(사 42:1-4).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사 61:1-2).

하나님의 영에 대한 기대는 메시아 기대만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에 대한 기대와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땅을 새롭게 창조할 것이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한 새 창조는 창조자의 권리와 공의를 가져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공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사 32:15-18).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다시 태어날 것을 희망하였습니다. 에스겔 37장은 하나님의 영이 오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죽은 자들의 골짜기에서 죽은 자들은 다시 부활하는 환상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가운데 나를 내려 놓으셨다. 그런데 그 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들이 널려 있는 사방으로 다니게 하셨다. 그 골짜기의 바닥에 뼈가 대단히 많았다. 보니, 그것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그가 내게 물으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다. 내가 대언을 할 때에 무슨 소리가 났다. 보니, 그것은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였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 속에 생기가 없었다.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겔 37:1-9)

여기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메시아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 백성이 하나님의 영을 지니는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겔 37:14). 요엘도 하나님의 영이 온 백성에게 부어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욜 2:28-29).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이 오시면, 모든 특권이 무너집니다. 즉 여자에 대한 남자의 특권, 종에 대한 주인의 특권, 자녀에 대한 부모의 특권이 중지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출생과 세례, 죽음과 부활은 모두 하나님의 영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하였던 메시아의 오심과 하나님의 영의 오심이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에게 임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의 힘이 그에게 넘치도록 부어졌습니다(요 3:34). 이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만물의 새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예수님은 귀신들을 내어쫓으셨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바치셨으며(히 9:14),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전 15:45).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영원한 생명과 새로운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였을 때,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에 따라 성령의 오심을 종말의 표징으로 보았습니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또 나는 위로 하늘에 놀라운 일을 나타내고, 아래로 땅에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이다.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행 2:17-21).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더 강하게 성령의 오심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한 사람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성령의 현재적 경험은 장차 올 영광의 나라의 시작과 선금(先金)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롬 8:23-25). 바울에 의하면 성령의 경험은 만물의 새 창조를 앞당겨 미리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엡 1:14).

그러므로 히브리서도 성령을 '미래의 능력'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히 6:5). 성령의 경험은 다만 현재를 위해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은사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능력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서 종말론적인 선물입니다. 성령의 경험은 새로운 탄생과 새로운 창조입니다.


3. 하나님은 왜 다시 오십니까?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어떤 목적으로,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까? 먼저 하나님은 온 세상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오십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와 이사야와 에스겔 등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은 장차 우주적으로 펼쳐질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리게 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장차 '야웨의 날'(사 2:12)이 되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그분의 영광으로 덮으실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왕이 되실 때, 달은 볼 낯이 없어 하고 해는 부끄러워할 것이고, 하나님은 시온 산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다스릴 것이며, 장로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사 24:23). 사막에는 꽃이 무성하게 펴서 크게 기뻐하고 즐겁게 소리칠 것이며, 사막에서 꽃이 피고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사 35:2).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모든 사람들이 그 영광을 함께 볼 것입니다(사 40:5). 해는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되지 아니 할 것이며, 달도 더 이상 밤을 밝히는 빛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원한 빛과 영광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60:19).

에스겔도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날에 모든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겔 39:21).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비취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은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 땅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환해졌습니다. 이에 놀란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고, 그러자 하나님은 영광에 싸여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에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습니다(겔 43:2-5). 하박국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온 세계에 오실 때, 바다에 물이 가득하듯이 주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땅 위에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을 덮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할 것입니다(합 3:3).

바울은 '야웨의 날'과 곧 '그리스도의 날'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고전 1:8, 5:5, 고후 1:14, 빌 1:6, 2:16, 살전 5:2). '그리스도의 날'에 인자(人子)이신 그분은 아버지의 영광 중에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것이며(마 16:27, 막 8:38, 막 13:26, 눅 21:27),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마 25:31). 그 날이 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우리의 생명이 드러날 것이고,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골 3:3-4). 그 날이 되면,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빌 3:21).

2) 공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욥 34:17, 느 9:33). 하나님의 모든 길은 공평하며,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십니다(신 32:4).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공의롭습니다(단 9:14). 하나님은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십니다(삼하 23:3). 하나님은 공의로 옷을 삼으십니다(욥 29:14).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십니다(욥 37:23, 시 37:28, 사 61:8). 그러므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시 9:8, 시 96:13, 시 98:9, 사 11:4, 렘 11:20, 행 17:31).

야웨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죽음 후에 있지 않고 '마지막 시간'에 있을 것입니다(사 2:2, 미 4:1).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심판자도 되십니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너희가 이 모든 악을 저질렀으니 내가 너희를 처벌하겠다"(암 3:2).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다른 백성들 사이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력화되고 억눌린 이스라엘에게 권리를 찾아주시고, 이스라엘 위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이스라엘의 적들을 불의하다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른바 '보복의 시편들'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편들의 본질은 보복에 대한 환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이 당한 불의한 현실을 다시 되돌려놓은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고난은 다만 이스라엘만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고난으로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권리를 찾아주시고, 불의한 자들의 악행을 심판하심으로써 스스로 정의로운 분이심을 입증하십니다(시 94).

하나님의 종 메시아도 공의로운 분이십니다(슥 9:9). 그분은 세상에 공의를 베푸실 것이며(사 42:3), 세상에 공의를 세우실 것입니다(사 42:4). 그분은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계 19:11). 메시아는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시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선포하실 것입니다(사 11:4). 바로 여기서도 메시아의 심판은 단지 형벌을 주고 악한 자들에게 보복하는 심판만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공의를 창조하고 공의를 확립하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사 1:27).

이 세상에는 이미 많은 심판이 이루어져 왔는데, 굳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공의로 심판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리고 모든 일에 심판이 꼭 이루어져야만 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셔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는 심판이 제대로, 그리고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의에 의해 희생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이 하늘 끝까지 사무치고 있습니다. 정의를 향한 목마름으로 탄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하늘의 보좌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고 공의를 세우시기 위해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3) 평화를 이루기 위해

만약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분쟁과 전쟁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 분쟁과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도 대개 불의 때문입니다. 만약 불의가 심판을 받지 않으면, 만약 공의가 수립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온통 피와 눈물과 한숨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제거하고 공의를 세움으로써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하나님은 다시 오십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온 세상에 공의가 실현될 때, 평화도 역시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됩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물밀듯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고,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고 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이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사 2:2-4). 그리고 사람마다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입니다(미 4:1-4).

그 날이 오면,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닐 것입니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입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이 바다를 채우듯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11:6-9). 그러므로 '메시아의 날'은 진노의 날이 아니라 평화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메시아는 불의와 증오를 심판하심으로써 평화의 우주적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메시아는 참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알렸던 천사는 또한 이 땅에 평화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렸습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 2:14).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 5:9).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제자들은 기뻐하며,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눅 19:38)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다가옴을 슬퍼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눅 19:41-4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롬 5:1), 세상 모든 사람들과도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로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가 된 것을 없애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셨고, 원수가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셨습니다(엡 2:14-17). 그분은 십자가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골 1:20).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평화의 인사를 하셨습니다(요 20:19, 21, 26). 그리스도를 본받아 바울도 편지를 쓸 때마다 '평화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문안의 인사를 하였으며(롬 15:33, 고후 13:11, 살전 5:23),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사람들에게 있기를 빌었습니다(고전 1:3, 고후 1:2, 갈1:3, 엡1:2, 빌1:2, 4:9, 골 1:2, 살전 1:1 살후 3:16,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3). 베드로(벧전 1:2)와 요한(요이 1:3, 요삼 1:15, 유 1:2, 계 1:5 )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안할 때마마 역시 평화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분쟁과 갈등이 넘치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였으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영원한 평화의 나라를 세워 주시기를 간절히 고대하였습니다.

 

4. 공의(公義)란 무엇입니까?

1) 인간의 공의

이스라엘과 그 주변 민족들의 사회 생활에서는 법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공의에 관한 설명은 주로 법률 문서에 많이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이미 다음과 같은 명령이 나옵니다. "너희는 근거 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하여 죄인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너희는 또한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도 안 된다. ... 너희는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거짓 고발을 물리쳐라. 죄 없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나는 악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출 23:1-3, 6-8). 레위기도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레 19:15)고 말합니다.

신명기도 재판관들에게 "당신들 동족 사이에 소송이 있거든, 잘 듣고 공정하게 재판하시오. 동족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동족과 외국인 사이의 소송에서도 그렇게 하시오"(신 1:16)라고 명령합니다. 재판관은 오직 정의를 따라서만 재판해야 합니다(신 16:21).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서 그들이 법정에 서게 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옳은 사람에게는 무죄를, 잘못한 사람에게는 유죄를 선고해야 합니다(신 25:1).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담보물을 잡고 꾸었을 때, 그의 담보물을 당신들의 집에 잡아 둔 채 잠자리에 들면 안 되며,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담보로 잡혔던 그 겉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다(신 24:13).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모든 명령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이 곧 의로운 사람입니다(신 6:25). 의로운 사람은 주머니에 크고 작은 다른 저울추를 두 개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며, 집에 크고 작은 다른 되가 두 개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는 바르고 확실한 저울추와 바르고 확실한 되를 사용해야 합니다. 틀리는 추와 되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사람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신 25:15).

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공의를 지키는 일입니다. 압살롬은 "누가 나를 이 나라의 재판관으로 세워 주기만 하면, 누구든지 소송 문제가 있을 때에 나를 찾아와서 판결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고, 나는 그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려 줄 것이오"라고 약속합니다(삼하 15:4). 다윗과 솔로몬이 칭송을 받는 것은 그들이 왕이 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언제나 자기의 백성을 공평하고 의로운 법으로 다스렸기 때문입니다(삼하 8:15, 왕상 10:9, 대상 18:14, 대하 9:8). 솔로몬은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님의 종들을 심판하시되,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죄가 있다고 판결하셔서 벌을 주시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은 죄가 없다고 판결하셔서 옳음을 밝혀 주십시오"(왕상 8:32, 대하 6:23)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왕은 구름이 끼지 않은 아침에 떠오르는 맑은 아침 햇살과 같고, 비가 온 뒤에 땅에서 새싹을 돋게 하는 햇빛과도 같습니다(삼하 23:3). 아무런 재판 과정도 없이 어진 사람을 죽인 사람들은 흉악한 자들입니다(삼하 4:11).

예언자들의 공의 사상은 종교적, 윤리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됩니다. 8세기의 예언자들은 뇌물을 받고 잘못 재판한 재판관들과 연약한 사람들을 학대한 행위를 고발합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고 하며, 의인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구나"(사 5:23). "그들은 말 한 마디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을 올무에 걸리게 하며, 정당한 이유 없이 의로운 사람의 권리를 박탈하던 자들이다"(사 29:21).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암 2:6). "너희는 공의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며,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치는 자들이다"(암 5:7). "그런데도 너희는 공의를 뒤엎어 독약을 만들고, 정의에서 거둔 열매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었다"(암 6:12). 왕은 최고의 재판관이고 정의의 최고 수호자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사 11:4, 32:1),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사 9:7), 하나님이 보내시는 왕을 기대합니다(사 9:6, 11:4-5, 16:5). 의의 열매는 평화이고,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입니다(사 32:17).

호세아에 의하면 주님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의로운 백성입니다(호 14:9). 그리고 공의는 의로운 사람의 의무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호 10:12).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호 2:19-20).

예레미야에 의하면 서약은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렇게 서약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복을 베푸실 것입니다(사 4:2). 예레미야도 공의와 법의 밀접한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요시야의 아들 살룸을 다음과 같이 고발합니다.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는 너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내가 살 집을 넓게 지어야지. 누각도 크게 만들어야지' 하면서, 집에 창문을 만들어 달고, 백향목 판자로 그 집을 단장하고, 붉은 색을 칠한다.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짓기를 경쟁한다고 해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렘 22:13-16).

하박국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 2:4)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은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 주님께서는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조용히만 계십니까?"(합 1:4,13)고 항의합니다. 에스겔도 공의의 실현을 요구합니다. "너희는 정확한 저울과 정확한 에바와 정확한 밧을 써라"(겔 45:10). 공평하고 올바른 길은 단지 재판관과 왕의 의무만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입니다(겔 18:5, 33:14, 45:9).

2)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의(정의)를 말할 때에도 역시 우리는 법적인 용법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최고의 재판관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성 안에 의인이 쉰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 성을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의인 쉰 명을 보시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그처럼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의인을 악인과 똑같이 보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는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 18:20-25).

바로는 "이번에는 내가 죄를 지었다. 주께서 옳으셨고, 나와 나의 백성이 옳지 못하였다."(출 9:27)고 고백합니다. 계약의 책은 "거짓 고발을 물리쳐라. 죄 없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나는 악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출 23:7)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님의 종들을 심판하시되,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죄가 있다고 판결하셔서 벌을 주시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은 죄가 없다고 판결하셔서 옳음을 밝혀 주십시오"(왕상 8:32)라고 말합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시삭에게 쫓겨 예루살렘에 모여 있을 때, 스마야 예언자가 르호보암과 지도자들을 찾아 와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내주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왕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대하 12:6).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하나님을 공의로운 분으로 고백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허물이 많다고 하더라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살려 주셨고(스 9:15),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느 9:8). 비록 이스라엘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하나님은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십니다(느 9:33).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에는 보상적, 보응적 측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측면, 즉 자비와 약속 실행의 측면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또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은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고, 당신들의 조상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대로 서 있으십시오. 내가 주님께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조상을 구원하려고 하신 그 의로운 일을 주님 앞에서 증거로 제시하고자 합니다"(삼상 12:7).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기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와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렘 9:23).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공의와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니,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사 45:21). 다니엘 9장 7-16절에도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의 외에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납니다.

시편도 하나님을 의로운 재판관으로 봅니다. "주님은 공정하신 재판장이시기에 보좌에 앉으셔서 공정하고 정직한 판결을 나에게 내려 주셨습니다"(시 9:4). "주님의 판결은 옳으시며, 주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시 51:4). 하지만 시편 저자들이 찬양한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의로운 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불의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착취를 당하는 의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을 시편보다 더 자주 찬양하는 곳은 없습니다. "주님, 나의 하나님, 주님의 공의로 나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그들이 나를 이겼다고 하면서 기뻐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 내 혀로 주님의 의를 선포하겠습니다. 온종일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시 35:24, 28). "하늘이 주님의 공의를 선포함은 하나님, 그분만이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시 50:6).

3) 종말론적 공의

하나님의 공의는 항상 현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현실로부터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강제로 적용되는 일종의 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욥은 자신의 고난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여전히 그런 관점에서 그의 고난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욥은 자신의 고난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이해하기를 한사코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에게 격렬히 항의하였고,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의로운 사람이 왜 고난을 당하는지에 관해 명쾌한 답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자신의 기대와 죽음까지도 뛰어넘는다는 사실과 장래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반드시 돌보실 것이라는 사실을 욥은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욥 19:25-27).

시편 73편을 썼던 경건한 시인도 자신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공의의 하나님을 의심하고 넘어질 뻔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토로합니다. 그렇지만 그도 하나님의 성소에서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의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심치 않게 믿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나는 우둔하여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이사야도 종말에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궁극적으로 실현될 날을 기대하였습니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사 9:6).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공의를 행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곧 나타날 것이다'"(사 56:1). "예레미아도 종말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렘 23:5-6). 호세아도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날을 기대하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호 2:20).

하박국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공의로운 하나님이 왜 불의와 부정과 폭력에 대해 계속 침묵하고 계시는지를 항의하듯이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갈대아(바빌론) 사람들을 통해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이 대답에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을 벌하시려고 어떻게 그보다 더 불의한 세력을 사용하실 수 있는지를 하박국은 다시금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대답은 정한 때에 불의한 갈대아 사람들도 징벌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 2:3-4). 궁극적으로 불의한 세력과 악한 자들에게는 종말이 올 것이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기다려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서 미래의 소망을 노래한 아름다운 노래가 하박국의 입가에서 흘러나왔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합 3:17-18).

4) 새로운(더 나은) 공의

예수님에게 이르러 하나님의 공의 개념은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실로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4:17). 유대인들처럼 예수님도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을 기대하셨으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공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고, "의(공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마 5:6)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당시의 율법 전통과 예언자와 묵시문학이 품었던 희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그 당시의 율법 이해와 묵시묵학적 표상을 거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대에 의하면 인자(人子)는 마지막 심판 때에 의로운 자의 구원자와 죄인의 심판자로 출현합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죄인의 구원자로서 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율법을 모르는 자들,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자들을 찾으시며 불의한 자들을 용납하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회개 운동을 전개한 세례 요한과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 전통과 묵시문학적 희망을 충실히 따르던 경건한 유대인들과 충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공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예컨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마 5:45)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근거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계시된,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근거해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마 5:43-45). 율법 전통과 묵시문학적 공의를 완전히 뒤집은 새로운 하나님의 공의 이해는 '포도원의 비유'(마 20:1-15)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먼저 온 일꾼과 늦게 온 일꾼을 가리지 않고 후하게 같은 품삯을 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선언하시고 실천하신 새로운 하나님의 공의는 조건적, 보복적인 공의가 아니라 죄인을 의롭게 하고 공의를 창조하는 은혜로운 공의였습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먼저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근거한 새로운 하나님의 공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서 못 박은 자들(원수)을 위해 하나님의 보복을 요청하시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야 한다"(마 18:22)는 가르침대로 예수님은 그들의 사죄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장차 심판자로 오실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심판을 받는 자리에 대신 서셨습니다. '심판을 받은 심판자'(칼 바르트)기 되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을 뿐만 아니라(엡 2:16), 십자가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심으로써 만물을 자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골 1:20). 이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롬 5:1).

죄인을 위해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바울도 '율법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였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으로서 아무 차별이 없이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는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롬 3:21-25).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고난 안에서 계시된,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삽니다(롬 1:17).

그렇다면 이제부터 율법은 완전히 폐기된 것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부터 율법무용론자가 되어도 무방합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마 3:31). 이미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 5:17-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한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율법의 단 하나도 없어질 수 없고, 또 없어져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즉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될 때까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관행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떤 율법은 더 가볍게 만들었고, 어떤 율법은 더 엄중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율법은 완화하였고, 어떤 율법은 강화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그런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약속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율법은 248개의 명령과 365개의 금령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의 서기관들은 율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수천 개의 규례를 만들어냈습니다. 과연 누가 그 많은 율법과 규례를 일일이 다 기억하고, 또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실로 예수님도 종종 율법과 규례를 공공연히 공격하셨을 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어기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안식일에 배고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허용하셨으며,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 습관도 어기시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에 이런 행위들은 율법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 것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율법을 폐하려 오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

실로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구약성서의 희생제사를 폐기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롬 10:4)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성취하심으로써 율법을 폐기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약성서의 모든 가르침, 율법의 근본 정신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몸소 실천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으로 요약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 계시되고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9-20)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합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 당시에 종교의 최고 지도자로서 대중의 존경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의가 상당한 수준에 있음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가 그들보다 훨씬 더 나아야 한다는 사실은 강조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합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것을 가르쳤습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계명을 선별적으로 지켰음을 암시합니다. 예컨대,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는 제4계명은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안식일에 그들은 밀 이삭을 비벼 먹은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3계명은 엄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다가 가벼운 맹세나 거짓 맹세를 일삼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온전한 실천을 주장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은 모든 율법을 어긴 행위와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순종, 온전한 헌신을 원하십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란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천하는 의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지도 않으면서 가르치기만 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에서도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겨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 하나님은 입술로만 믿는 자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행위의 열매를 기쁘게 받으시고, 이를 통해 믿음을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름지기 율법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율법의 실천을 통해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실증해 보여야 합니다.

셋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단순히 양적인 의만을 의미하지 않고 근본적으로는 질적인 의, 새로운 의를 말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다만 외면적, 형식적인 의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의 의는 내면적인 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단순히 외형적인 실천보다 더 깊은 내적인 의, 마음의 의에 속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외적이고 형식적인 복종, 즉 율법을 문자 그대로 엄밀하게 따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눅 16:15). 하나님은 율법을 마음에 기록해 주셨습니다(렘 31:33). 하나님은 당신의 신, 즉 성령을 마음 속에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게 하십니다(겔 36:27). 하나님의 명령은 마음과 양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더 나은' 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특히 산상수훈(山上垂訓) 속에 잘 집약되어 있습니다.

 

5. 공의를 위해 일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 다른 것들을 먼저 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방 사람입니다(마 6:32-33). 그리스도인은 공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마 5:6). 하지만 공의롭지 못한 사회 속에서 공의를 실현하기도 정말 어렵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실로 많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공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5:10).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일한 그리스도인 몇 사람을 소개할까 합니다. 그리함으로써 우리도 공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요한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 1805-1880년)의 아들로서 1842년에 독일 남부 뷔템베르크(Wüttemberg)를 정점으로 한 경건주의(敬虔主義)의 전성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목회자였습니다. 그의 목회자적 자세는 매우 경건주의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회개하지 않은 영혼'의 문제가 목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뜻밖에 그는 귀신 들림과 정신 착란 현상을 매우 심하게 보인 고트리빈 디투스(Gottliebin Dittus)이라고 불리는 자매와 씨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주 경련과 발작을 일으켰고, 악령의 말을 내뱉으며 험상궂게 그에게 덤벼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둠의 세력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는지를 그는 초조하게 물었습니다. 악령과의 싸움에서 그는 예수님이 주체가 됨을 느꼈습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감이 깊어질수록 그의 마음에서는 "전진하라, 예수가 뱀의 머리를 밟아 부수었다고 하는 사실이 거짓이 아니라면, 가장 깊은 못에 빠져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좋은 목표로 인도될 것이다"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는 승리자다, 예수는 승리자다'라는 음성과 함께 소녀는 기적적으로 치유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은 그 이후의 블룸하르트의 사역에서 놀라운 각성과 참회와 신유의 사건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삶에서 지친 사람들이 추구하는 피안의 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도 개인의 영혼이나 먼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 땅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전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는 보편적이고도 포괄적인 희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그의 설교와 존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고트리빈의 치유 사건의 와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찬양하며 암흑의 세력과 싸우는 현장의 한복판에서 자라났고, 13살부터는 부친의 설교를 항상 필기하기까지 부친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도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 부친이 사역하던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부친 밑에서 장사진을 이루는 사람들을 상담하며 치유사역을 행하였습니다. 그에게서도 여러 차례 병자 치유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도 부친처럼 살아 활동하시는 하나님, 승리의 예수님을 굳건히 믿고 활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활동은 점차로 교회의 테두리를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강한 내면적 투쟁을 거친 후에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진보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수직적인 차원에 주안점을 두었던 그의 부친과는 달리 그는 점점 더 하나님 나라의 수평적인 차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곤궁보다 더 큰 하나님 나라의 곤궁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갈취하는 이기적인 성향을 버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기적 욕망과 만족을 위해 기적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에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블룸하르트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세상 한가운데 계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회의 벗이요, 특히 비참한 사람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인간의 거의 모든 삶의 차원을 지배하는 정치적 현실에 대한 관심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사회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가 된 것은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금지하는 '감옥법안'에 항의하는 집회에 우연히 참석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목회하던 곳 근처의 산업도시 괴핑엔(Göppingen)은 제2의 산업혁명의 단계에 들어간 자본주의 사회의 조류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들이 드러났고, 노동자 계급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황제 빌헬름 2세와 정부는 노동자의 단결을 억압하는 법을 공포하였고, 노동자들은 항의집회를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블룸하르트는 이 법안이 정의에 대한 범죄임을 깨달았으며, 대중 앞에서 연설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블룸하르트는 대중의 환호를 받았지만, 군주제의 독일에서 국가와 결합되어 있던 국가교회의 종무국(宗務局)의 권고에 의하여 목사직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도적인 사회민주당원이 되었고, 뷔템베르크 지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습니다. 블룸하르트는 6년 동안의 의회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길을 닦는 작업에 투신하였습니다. 그는 협동조합과 같은 단체를 구성하여 농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힘썼고, 왕에 대한 원내교섭단체의 충성서약, 화학비료에 의한 인공적 농업 등에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속한 정당 안에도 야만적 폭력 정신, 다툼과 투쟁, 교조주의, 끊임없는 계급투쟁, 새로운 이기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재선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민주당을 탈당하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1906년의 팔레스틴 여행 도중에 얻은 말라리아 병의 재발, 1910년의 이집트 여행 도중에 얻은 기후병의 악화, 1911년 여름의 심장발작 등 때문에 그는 점차로 은둔 속으로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그의 생활은 조용한 기다림의 자세를 띠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향해 서두르던 그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나라를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의 블룸하르트가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위한 인간의 참여를 전적으로 배격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는 인식 가운데서 도리어 인간은 기쁨으로 그 진전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인간을 통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능동적 인간이 되어야 하고, 더 의롭고 좋은 일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도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자로서 나타나기 위한 기회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전장에서는 대포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 승리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에는 항상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의지와 지배는 일체를 꿰뚫고 진행하여 최후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1917년 10월에 산책 도중에 그는 갑자기 뇌졸중 발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1918년 9월 설교 후의 저녁모임에서 이사야 49장 7-13절의 본문을 근거로 한 그의 설명은 그의 최후의 유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약속의 빛 가운데 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 그것이 약속되어 있고, 항상 지상의 빛이 된다. 우리들은 종종 하나님이 우리들을 잊어버리시고 만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우리들 곁에 계신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고 참되어서 우리들이 언제나 확신을 갖고 살도록 하신다. 모든 것은 그분의 지배에 복종한다." 그의 비석에는 그의 부친이 지은 찬송가 한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의 승리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네. 온 세상은 모두 그분의 것일세." 블룸하르트는 그의 부친 옆에 누워서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우렁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2) 존 웨슬리

존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에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의 열 다섯 번째의 아들로서 영국 엡워스(Epworth) 지방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부친은 설교자였고, 교회에서 충성된 봉사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웨슬리는 22세가 되던 때에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심사숙고한 끝에 성직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웨슬리는 동생 찰스와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을 만들어서 성경 읽기와 구제 운동에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온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치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의 나이가 70살의 고령에 이르렀을 당시에도 그는 해마다 5천 마일의 여행을 하였고,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 전도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1791년에 8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와 감리교회의 창설자로서, 그리고 영국 사회를 개혁한 자로서도 널리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특히 '그리스도인의 완전' 혹은 성화(성결)의 교리를 널리 주창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절대적 완전이 아니라 상대적인 완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 의와 참된 성결로 새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란 마음과 생각과 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는 순수한 사랑으로 넘칩니다. 그리고 웨슬리에 의하면 성화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내면적이지만, 신앙의 증거는 사회적입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나는 사회적 성화가 아닌 성화를 모르며, 사회적 종교가 아닌 종교를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특히 웨슬리는 그 어느 누구보다 더 강하게 지금 이 땅 위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였습니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습니다. 물론 목표는 아직도 미래에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땅 위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은 하늘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미리 확보하는 것입니다.

웨슬리에 의하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사귐을 갖는 공동체에 의해 대표됩니다. 이 사귐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공동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로 이 땅 위에서 체험되는 상태라면, 그것은 신자들의 삶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의 목적과 목표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과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삶의 모든 활동 장소에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성화 혹은 이 땅에서 미리 확보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웨슬리는 어떤 활동을 전개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먼저 웨슬리는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한 구호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호의 차원을 넘어서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고 제거하는 것을 기독교의 참된 사명으로 강조하였고, 이를 통해 영국의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웨슬리의 활동은 가난한 자들을 먹여주고 입혀주며 거처할 곳을 제공해 주는 일,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 가난한 병든 자들과 수감되어 있는 자들을 방문하는 일, 곤궁에 처한 자들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건강교육을 고안해 전달해 주는 일, 가난한 자들에게 책을 배포해 주는 일, 그리고 가난을 낳는 경제문제에 대한 구조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일들을 포함합니다. 특히 3개월간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대여기금(Benevolent Loan Fund)은 흥미롭습니다. 이 대여기금으로 어떤 사람은 성공하여 유명한 인물이 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는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웨슬리는 가난한 병자들을 위해서도 근본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병자들을 방문하고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무료 진료소를 열고 의학서적도 출판하였습니다. 영국 최초의 무료 진료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의학적인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는 나그네 우호 신도회(Strangers’ Friend Society)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병들고 친지가 없는 일반 사람들을 위한 봉사 센터로서 감리교 신도회가 설립되는 곳마다 함께 세워졌습니다.

사회구호 활동과 더불어 웨슬리는 교육 활동에도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그의 교육적인 공헌은 대중들에게 보편적인 교육의 기회를 증진시킨 점과 대중교육의 질을 높인 점입니다. 18세기의 영국에서는 대중, 특히 가난한 자들은 교육적인 혜택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웨슬리의 운동은 영국의 대중 교육사에 새롭고 중대한 전기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대중 교육을 위한 웨슬리의 구체적인 공헌은 그가 1739년에 설립을 추진한 브리스톨 킹스우드(Kingswood)의 광부들을 위한 학교로부터 출발합니다. 웨슬리는 이 학교에 연이어 브리스톨, 런던, 뉴캐슬과 다른 지역에도 영세민과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 학교들은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성인 교육에도 기여하였습니다. 웨슬리는 또한 대학을 설립하여 가난한 계층 출신들도 최고 지성의 자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6명의 감리교 학생들이 옥스포드 대학에서 쫓겨나고 1명이 입학 거부를 당했을 때, 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킹스우드에 대학을 세웠습니다.

이 외에도 웨슬리는 교도소 개혁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습니다. 수감자들을 위한 그의 활동은 설교와 위로에만 머물지 않고 필요한 물품 전달, 병간호, 석방을 위한 탄원서 제출, 그리고 사형수들을 위한 형장 동행과 보호 등을 포함합니다. 그의 활동은 교도소의 상황을 개선시킨 실질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교도소 개혁을 위한 그의 강력한 노력은 불의한 상태에 대한 그의 공개적이며 분명한 항의 제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신문이나 단행본을 통해 지옥을 방불케 하는 교도소의 환경, 악을 배우게 되는 교도소의 도덕적 자세, 오랜 재판과정,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불공평한 처리, 전쟁포로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에 관해 항의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여성들의 지위향상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는 여성들로 하여금 다양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지도력 배양에 혁신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는 노예제도 반대를 위해서도 투쟁하였습니다. 그는 책을 통해 노예제도의 불의를 체계적으로 지적하며 노예매매 철폐를 위해 설득하였습니다. 그의 책은 미국 감리교 첫 연회(1780년)의 노예제도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 선언과 총회의 노예해방 결의(1784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3) 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은 1929년에 조지아 애틀랜타 시의 중산층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침례교 전도사였습니다. 그는 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의학과 법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2년 동안 펜실베이니아 크로저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처음으로 간디의 비폭력 철학과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보스턴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에서 킹은 하나님을 적극적이고 인격적인 실재로 보았으며,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이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킹이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가(街)의 침례교회의 목사로 활동하던 동안에 소규모 민권옹호 단체가 공중 버스 안의 인종차별에 대해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55년 12월 1일에는 로자 파크스라는 사람이 백인 승객에게 좌석을 양보할 것을 거부함으로써 인종분리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흑인 행동주의자들은 교통수단 이용을 거부하기 위한 몽고메리 개선협회를 결성하고, 젊은 지식인으로서 그 도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킹을 이 운동의 지도자로 선출하였습니다. 이 운동으로 인해 공중 버스 안에서의 인종을 차별하는 정책은 철폐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을 계기로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깨달은 킹은 전국 곳곳을 다니며 흑인 민권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의 투쟁 방법은 사랑과 비폭력에 의한 항거의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저항 운동은 전투적인 인종분리주의자들로부터는 물론 법과 치안을 빙자한 경찰의 폭행, 구타, 테러, 체포, 투옥 등의 수난을 당하였고, 심지어는 그의 집과 교회당이 폭파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기 않고 비폭력적 방법으로 일관되게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킹의 사상과 운동의 저변에는 기독교 신앙의 3대 기본 요소인 신앙과 사랑과 희망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하고 순수한 사랑과 이사야가 꿈꾸고 그린 낙원에 대한 소망을 확고하게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적 신앙과 사랑과 희망에 근거한 그의 낙관주의는 그가 1963년에 행한 유명한 역사적 연설 '나는 하나의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몇 구절을 인용해 보기로 합시다.

... 이 순간의 어려움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하나의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꿈이 깊이 뿌리내린 꿈입니다. 어느 날 이 나라가 일어나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명한 진리라고 믿는다'는 신조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할 날이 오리라는 꿈을 나는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전날의 노예들의 아들들과 전날의 노예 주인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불의와 압박의 뜨거운 열기로 범벅이 된 사막의 주 미시시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하게 되리라는 꿈을 나는 간직하고 있습니다. ...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의 가사를 노래할 수 있는 그 날이 속히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흑인 영가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드디어 자유, 드디어 자유,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드디어 자유합니다."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형제가 될 것이라는 신념은 그의 화려한 수사와 어우러져 세계 각지의 추종자들을 고무시켰습니다. 킹의 희망대로 1964년에 공공장소에서 인종차별 대우를 철폐하고 고용 및 공공소유 시설물에서 불법적인 인종차별을 금하는 민권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같은 그해 12월에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그의 업적은 세계인의 인정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실질적인 발전이 없음에 조바심을 느낀 흑인들은 점점 더 호전적으로 변해갔으며, 북부 대도시의 슬럼 가를 중심으로 킹의 종교적인 비폭력 철학은 점차 의문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리노이 주와 미시시피 주에서는 킹의 명성이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젊은 흑인 폭력주의자들로부터는 조롱까지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킹은 자신에게 불만을 품는 흑인들에게 깊은 동정을 느꼈습니다.

그에 대한 비난이 점차 커질 즈음에 킹은 민중들의 진보에 방해가 되는 또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곧 그는 1967년의 뉴욕 리버사이드(Riverside) 교회 집회와 대규모 평화 집회를 필두로 베트남 전쟁 반대에 뛰어들었습니다. 킹은 제3세계의 문제와 온 세계로 시선을 돌려서, 인간을 위한 자유와 정의의 문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월남 전쟁을 맹렬히 반대한 것은 흑인 병사들이 월남 전쟁에서 많이 희생되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월남 전쟁에서 서방의 자본주의 국가들의 새로운 식민주의적 침략과 지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킹은 공산주의자로 몰렸지만,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원자탄이나 책무기로 패배시킬 수 없으며,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 최선의 방어는 그 온상이 되는 빈곤, 불안정, 사회적 불의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말년에 이르러 킹은 세계주의를 더욱 부르짖었습니다. 킹은 흑인 민권운동으로부터 출발하였지만, 세계 평화와 세계 공동체 운동으로 그의 운동을 넓혀 나갔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사랑과 정의, 평화와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에 입각한 이상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실현되는 새로운 세계 건설이라는 목표를 바라보았습니다.

1967년 4월 4일에 동료들과 함께 묵고 있던 모텔의 발코니에서 킹은 백인의 흉탄에 의해 쓰러졌습니다. 그가 암살된 지 18년이 지난 1986년에 미국 의회는 킹의 생일을 국가 기념일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킹이 꿈꾸었던 모든 인류를 위한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고귀한 이상은 미국인만이 아니라 온 세계인의 가슴에서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른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일한 사람으로 소개한 세 사람은 모두 개신교 목사입니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일해온,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있는 분들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예로 든 사람은 모두 외국인이지만, 우리 나라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공의를 위해 투신하여 왔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조국의 독립과 민중 계몽, 사회 봉사 등을 위해, 그리고 해방 후에는 경제 발전과 인권, 민주화, 복지, 통일, 환경 등을 위해 일해온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다행히 그 중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활동의 동기와 배경, 과정과 방법은 제 각기 달랐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결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일해온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 성결교회의 모든 가족들은 '성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깨끗하고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 사랑과 정의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결교회가 물려받은 '재림'의 전통에 입각하여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더욱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성도와 함께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흠이 없는 자로서 큰 칭찬을 받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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